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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서에 대하여 (23/210)

#23. 아서에 대하여2021.11.18.

‘아서 특수’로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던 후작 내외에게 갑작스러운 휴식이 찾아왔다. 그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6549659324149.png‘우리가 바람을 맞다니……?’

줄리어스 후작은 얼이 빠진 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된 거지? 후작 부인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짬이 나자마자 아서에 대해 얘기해 봐야겠다며 쌩하니 크리스티나에게로 가 버렸다. 그래서 후작은 혼자 모처럼 조용한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이번 타임, 그러니까 ‘줄리어스의 사흘째 만찬 시간’에 만나기로 한 상대는 ‘하먼 백작’이라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고위 귀족이었다. 제법 명망 있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고, 꽤나 값비싸고 인상적인 축하 선물을 보내어 온 데다가, 제국의 가장 명예로운 기사들과 명문가의 가주들만 참여한다는 비밀 클럽을 운영하는 상대였기도 했던지라 줄리어스로서는 가입 제안을 하려나 보다 하고 아주 귀한 타임을 내준 것이었다.

16549659324149.png……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은 거지?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줄리어스의 두 번째’ 초대를 기대했는데, ‘세 번째’ 초대라 마음이 상했나? 아니면, ‘아서와 크리스티나’는 볼 수 없다는 답신에 김이 샜나? 하지만 결국 나와의 관계가 아서하고의 관계로도 이어질 테니 인연을 만들어 두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일 텐데. 게다가 ‘줄리어스의 세 번째’라면 제법 자랑할 만한 타이틀이 아닌가. 본인이 그렇게 몸이 안 좋다면 가족이나 대리인을 보내서라도 그 자리가 성사는 되었다는 식으로 일을 끌어가는 편이 자기에게 유리할 텐데. 후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줄리어스의 아홉 번째’ 이전의 자리라도 얻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세 번째’의 만찬 자리를 내주었는데도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라니. 사람을 보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오긴 했지만 영 이상했다. 요즘 내가 얼마나 만나기 힘든 사람인지 뻔히 알 텐데. 무례하지 않은가.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선물 세례를 하며 안달복달하더니…….

16549659324159.jpg“주인 어르신.”

그때 집사장 짐이 후작이 앉아 있던 응접실로 들어섰다. 손에 오늘의 소식지들을 한가득 쥔 채였다. 집사장 짐은 긴말하지 않은 채 가져온 소식지를 줄리어스에게 내밀었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고 별생각 없이 집사장이 가져온 소식지를 받아 훌훌 읽어 내려가던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 줄리어스 후작, 부실 보급 의혹 사실로 확인?! 】 【 ‘제대로 된 보급 없었다’ 참전 용사 폭로! 】 【 부실 보급 의혹에 쏟아지는 증언들! 】 【 참전 용사 J씨의 익명 제보, 충격 보급 실태! 】

16549659324149.png“……!”

격노한 후작의 포마드에서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특히 그를 격분하게 한 건 마지막 소식지였다. 【 줄리어스, 선제후 자격 있나? 】 그 밑엔 우스꽝스러운 돼지로 희화화된 못생긴 후작의 그림이 떡하니 삽화로 그려져 있었다. 눈이 뒤집힌 후작이 소식지들을 찢어발길 듯이 틀어쥐고 일어났다.

16549659324149.png“이……이 신문사 놈들을 내 그냥!”

이것 때문이었구나! 전부 이 쓰레기 같은 신문 때문이었어!

16549659324149.png“신문사 놈들에게 연락해! 저 증언했다는 참전 용사란 놈 누군지 당장 알아 와!”

후작은 버럭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려다가 흠칫 멈추었다.

16549659324149.png“!”

아니, 아니지.

16549659324149.png“……아니다! 기다려, 집사장.”

후작은 허둥지둥 따라오던 집사장을 손을 쳐들어 막고 멈춰서 머리를 굴렸다. ……제 발 저리는 걸로 보일 거다.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자마자 이렇게 헐레벌떡. 신문사를 탈탈 털고 그들의 입을 막았느니, 증인의 입을 막았느니 하는 식으로 보인다면……. 【 줄리어스, 선제후 자격 있나? 】 후작은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목을 꼿꼿이 치켜세웠다.

16549659324149.png“명예로운 선제후는 그런 일 하지 않는다.”

16549659324159.jpg“……예?”

집사장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후작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침착하게 턱을 치켜들며 목깃을 고쳐 세웠다. 그리곤 위엄이 있어 보이도록 명령을 바꾸어 말했다.

16549659324149.png“하지 마라. 아서를…… 총사령관 아서를 찾아가겠다.”

그리고 스스로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더니, 딱 부러지게 끄덕였다. 그는 이제 ‘명예로운 선제후’였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된 선제후답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린 후작은 위풍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16549659350682.png“인사를 했다고?”

후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마리나에게 메이크업을 맡긴 채, 붓질이 지나가는 사이 감고 있던 눈을 뜬 크리스티나가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16549659350686.png“네, 어머니. 하지만 상대해 주지 않더라구요. 사람들 앞에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란 듯이 바람맞히던데요.”

16549659350682.png“널 모르는 척해?”

후작 부인이 히스테릭하게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16549659350682.png“그래서? 그걸 그냥 뒀니?”

크리스티나는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16549659350686.png“모르는 사이는 아니라고, 며칠 전에 한 번 뵈었지 않았냐고 했죠.”

16549659350682.png“그랬더니?”

16549659350686.png“아는 사이라기에도 부족할 것 같다고. 하하.”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16549659350682.png“그게 또 널 망신 줬어?”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16549659350686.png“아뇨. 망신은요. 오히려 아주 존중해 주던데.”

크리스티나가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말했다.

16549659350686.png“야심한 시각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레이디의 방문을 살갑게 받아들이는 실례를 범할 수는 없겠다고 거절하던데요. 아주 젠틀하더라구요. 맘에 들었어요.”

16549659350682.png“…….”

후작 부인은 머릿속으로 아서의 말뜻을 가늠해 보듯 눈을 굴렸다.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59350686.png“솔직히, 사흘 전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한 걸 생각하고 꽤 각오하고 갔는데. 완전히 틀어 버릴 생각은 아니더라구요. 밀고 당기는 솜씨가 제법이에요. 뭐, 저는 그이에 대해선 상당히 좋은 쪽으로 인상이 바뀌었네요.”

후작 부인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대었다.

16549659350682.png“……네가 좋다니 그건 그나마 다행이구나.”

크리스티나가 마리나의 붓질에 입술을 대주느라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16549659350686.png“야심하지 않은 시각에 정식으로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고 물러났어요.”

후작 부인이 못마땅하게 크리스티나를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16549659350682.png“……그런 일은 또 언제 야무지게 다 했대. 올라가자마자 방에나 처박혔을 줄 알았더니.”

크리스티나가 생글 웃었다.

16549659350686.png“엄마아. 저도 이제 열일곱이 아니에요. 귀족 가문의 아가씨로서 제 의무를 안다구요.”

다 큰 딸이 엄마아― 하고 말꼬리를 늘이는 걸 은근히 애교로 받아들여 기분 좋아하면서도 후작 부인은 코웃음 쳤다.

16549659350682.png“흥. 남의 집 딸들은 열일곱에도 다 안단다. 스물둘이 돼서야 쳐놓은 사고 수습하는 주제에 뭘 잘났다고.”

크리스티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16549659350686.png“그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구요. 솔직히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해도 그때 그런 굴욕적인 혼인을 받아들이는 게 제 의무라는 생각은 안 들 것 같은걸요. 가문을 위해서도요.”

16549659350682.png“…….”

전에는 격에 맞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그땐 후작 부인도 펄펄 뛰며 반대했던 혼인이긴 했다.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16549659350686.png“하지만 이젠 맘에 들어요. 배경도, 태도도, 생긴 것도. 도도하게 튕겨 대는 것도. 나한테 맞아.”

크리스티나가 얼굴 각도를 바꿔보며 거울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었다.

16549659350686.png“예전에 무시당한 걸 적당히 유야무야 넘겨주지 않고 야무지게 복수해 주는 것도 매력 있지 않아요?”

크리스티나가 입매를 올렸다.

16549659350686.png“멍청한 것보다 나랑 잘 맞을 것 같아서 맘에 들어요. 앞으로 평생 같이 해 나가야 할 텐데 호구 같이 굴어서 성격 안 맞는 것보다는 호감 가는 편이 낫죠. 난 그이가 그러는 거 유쾌하던데.”

허. 후작 부인은 딸의 말에 기가 차서 웃어 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속 타는 자신과 달리 태연하고 당찬 딸이 새삼 듬직해서 불안감과 초조함이 가시기도 했다.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659350686.png“예전에 그랬던 건, 한동안 비위 맞춰 주고 잘 달래 가며 풀어 줘야 하겠지만…….”

크리스티나가 생글 웃으며 거울 속 완벽한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16549659350686.png“나중엔 다 추억이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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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서가 부하들과 잠시 이야기하고 오겠다고 그의 전용 응접실로 건너간 사이. 침대에 혼자 남아 앉아 있던 레이나는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쪽지를 열어 보았다. 로렌슨 선생님이 이마의 상처를 봐 주면서 기사의 눈을 피해 슬쩍 이불 속에 떨어뜨려 놓고 간 쪽지였다. 【 테일러는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 【 아서 경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쪽지를 남겨 둬요. 도와주겠습니다. 】

16549659407216.png“…….”

혹시 발각되더라도 큰 문제 없이 무마할 수 있도록 구성된 쪽지. 레이나는 그 행간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테일러가 당신의 할머니를 돌봐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예요.> <아서 경의 약점을 찾아내 쪽지로 남겨 두고, 나에게 전달해요. 후작 부인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16549659407216.png“…….”

그렇구나. 아서 경이 뻔히 근처에서 지키고 있는 마당에 후작 부인을 자주 만날 핑계가 없을 텐데, 어떻게 하라는 건가 했더니. 깊은 한숨이 나왔다. 자주 만날 수 없다면 어떻게든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로렌슨 선생님을 통해 쪽지를 보내라는 안배라면…… 미룰 핑계가 없었다. 레이나는 로렌슨 선생님을 매일 보고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면 최소한 며칠 안에…….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뭐든…….

16549659407216.png“…….”

레이나는 막막함에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약점……. 아서 경의 약점.

16549659407216.png“…….”

레이나는 다리를 껴안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하기 싫어.

16549659407216.png“…….”

후작가에 뼈를 묻을까 고민할 정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를 돌봐 준다고 하면, 기꺼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할머니만 생각하려고 애써도 기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레이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그가 무척 멋있고, 다정한 편이고, 동료들을 아끼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16549659407216.png“…….”

가만……. 동료들을 아낀다? 이건 어쩌면 약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레이나는 망설였다.

16549659407216.png“…….”

그러나 이내, 그런 내용은 쓰면 안 된다고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건……. 그건 너무 나쁘잖아. 동료를 인질 삼으면 뭐든 협박해 아서 경을 강제할 수 있을 거란 말처럼 들려. 이건 너무하다. 차마 그런 건 적을 수가 없었다.

16549659407216.png“…….”

어차피 부인도 내가 며칠 만에 뚝딱 아서 경의 약점을 물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겠지? 그러니까 굳이 약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후작 부인을 위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무언가……. 레이나는 망설이다가 억지로 적을 내용 한 줄을 생각해 보았다. 「옷을 몹시 빨리 갈아입습니다.」

16549659407216.png“…….”

멍청해 보여. 레이나는 또 무릎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 경은 약점 같은 거 없단 말이야. 하지만 후작 부인이 할머니에게 의사를, 테일러를 보내준 이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언제까지고 입을 닫을 순 없었다.

16549659407216.png“…….”

후작 부인은 자주 테일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레이나는 할머니의 병세에 대해서 물어보고 상담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려면 후작 부인에게 아서에 관해 뭐든 말을 해 줘야 했다. 뭐든……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서 알 수 있는 정보이면서…… 언젠가는 더 나은 걸 알아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줄 만한 아무 말이라도…….

16549659407216.png“…….”

트리스탄 경과 케이 경이라는 사람을 신뢰하는 거 같습니다? 아니야. 그것도 아까 그거랑 비슷한 이유로 너무 나빠. 그렇게 나쁜 거 말고. 레이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자신 없는 한 줄을 또 떠올려 보았다. 「……여자의 외모에 흔들리는 편은 아니랍니다.」 똑똑. 레이나는 얼른 쪽지를 시트 속에 감췄다.

16549659407216.png“네.”

이내 아서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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