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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얀 손수건 (22/210)

#22. 하얀 손수건2021.11.14.

16549659088392.png“일어나지 마시오.”

아서가 걸어가며 저지했다. 레이나는 어색하게 손에 환약과 물컵을 든 채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16549659088397.png“…….”

아서가 들어오자 부쩍 안심하는 얼굴이 되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레이나에게 주치의가 슬그머니 시선을 두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걱정했는데, 아서가 심하게 굴지는 않는가 보다고 안심이 되었다. 이런 표정 짓게 하는 사람이라면 아픈 애한테 무리한 요구를 한다거나 하진 않겠지. 검붉은 물은 하루쯤 쉬어도 괜찮으리라.

16549659088401.jpg“약 드십시오.”

들고만 있지 말고 먹으라 다시 일러 주었다.

16549659088397.png“아, 네.”

레이나는 새삼 손에 든 환약과 물컵을 어색해하며 아서를 한 번 보고 약을 삼켰다. 아서가 다가와 물었다.

16549659088392.png“괜찮소?”

레이나는 얼른 물을 삼키고 한발 늦게 답했다.

16549659088397.png“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어디 다녀오세요?”

16549659088392.png“어제 일의 연장. 마무리하고 왔소.”

레이나는 머뭇거렸다. 함께 가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다.

16549659088397.png“……같이 못 가서 죄송해요.”

16549659088392.png“괜찮소. 아픈 몸을 이끌고 그대가 갈 의무가 있는 자리는 아니었소.”

아서는 뒤로 고개를 돌리더니 제 부하를 눈짓으로 불렀다. 침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서가 간단히 그를 인사시켰다.

16549659088392.png“내 기사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침실에 들여 미안하오. 그대가 아픈데 내 사람을 두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게 걱정이 돼서.”

그랬구나. 믿는 사람인가보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16549659088397.png“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옆의 기사를 향해 인사했다.

16549659088397.png“안녕하세요, 기사님. 이런 모습으로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16549659116563.jpg“아닙니다. 편하게 부르십시오. 케이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케이는 허리를 굽혀 레이나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16549659088397.png“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케이 경.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짓말도 하다 보면 느나 보다. 한 번 해봤다고 술술 나온다. 훨씬 덜 어색하고……. 레이나는 살짝 웃었다. 잠자코 보고 있던 아서가 툭 던졌다.

16549659088392.png“나 외의 남자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더니 잘만 얘기하는군.”

16549659088397.png“…….”

이건 무슨 소릴까. 케이가 슬쩍 곁눈질했다. 머쓱해하는 레이나의 얼굴이 목덜미부터 붉어져 올라갔다.

16549659088397.png“…….”

케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묵묵히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16549659116563.jpg“…….”

……미인이네. 위험하다. 솔직히 트리스탄의 말이 암시하는 바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는데. 트리스탄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했던 이미지랑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쪽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고,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은근하게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팜므파탈을 생각했는데. ……예쁘긴 하다. 예쁘긴 한데.

16549659116563.jpg‘불쌍해 보이잖아.’

속내는 투명하게 다 비치고. 순진하고 앳돼 보이기까지 했다. 치명적이기보단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쪽이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아서 경에겐 팜므파탈 따위보다 이런 쪽이 훨씬 더 위험했다. 이건 걱정이 되는데.

16549659116563.jpg“…….”

침대 기둥 옆에 비스듬히 기댄 아서가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슬금슬금 손가락 빗질해 들더니 하얀 레이스 손수건 하나를 머리끈 삼아 묶어 주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이나가 머리를 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자, 아서는 그냥 선물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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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49659088392.png“아내에게 문제는 없소?”

아서가 다가와 질문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주치의 로렌슨은 테이블 위에서 빈 약 주전자와 치료 도구들을 챙겨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아서의 질문이 이어졌다.

16549659088392.png“개선식 날은 갑자기 쓰러지고, 사흘 만에 몸살이 나서 일어나질 못하니.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데.”

16549659088401.jpg“…….”

아서가 가볍게 테이블 위에 손을 짚고 시선을 두며 물었다.

16549659088392.png“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군. 의사로서, 양심적인 진단 말이야.”

16549659088401.jpg“…….”

로렌슨 선생은 힐긋 레이나가 있는 침대 쪽을 쳐다보았다.

16549659088401.jpg“…….”

앨빈 로렌슨이 보기엔 뻔한 일이었다. 레이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 한 달 내내 일에 시달렸다. 극도의 피로가 누적되었을 몸 상태. 거기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서 받았을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검붉은 물. 아무래도 첫날 후작 부인이 너무 많은 양을 마시게 한 모양이었다. 매일 희석한 걸 조금씩 마시게 해도 독한 약인데. 건강을 망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앨빈 로렌슨은 레이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16549659088401.jpg“……좀 더 두고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그저 피로의 누적인 것 같습니다. 짐작하시다시피 이래저래 힘들었을 상황이기도 하구요.”

로렌슨 선생은 허심탄회하게, 레이나가 크리스티나의 대역으로 들어온 상황을 피차 아는 것을 전제로 두고 답해 주었다.

16549659088401.jpg“하지만 평소보다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금방 회복할 겁니다. 지금은 단기간에 집중된 스트레스를 몸이 못 버텨 잠깐 탈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왕 걱정해 준다니, 슬쩍 보험 삼아 덧붙여 주었다. 어디까지나 동정심에서.

16549659088401.jpg“……오늘은 내버려 두십시오.”

아서는,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잘 모를 얼굴이었다. 앨빈 로렌슨은 조금 더 직설적으로 다시 말해 주었다.

16549659088401.jpg“잠자리는…… 무리입니다. 오늘만 피해 주십시오.”

아서는 잠자코 있다가,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 * * 줄리어스 저택, 아서의 개인 응접실.

16549659178957.jpg“아악……!”

루칸이 머리를 헤집다 냅다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트리스탄이 침착하게 막았다. 루칸은 분을 못 이겨 식식거리다 소파에 늘어졌다. 막 응접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아서는 빙그레 웃더니 시가를 입에 물었다.

16549659088392.png“…….”

머릿속 의견과는 무관하게 케이는 침착하게 그의 시가에 불을 대주었다. 아서가 싱긋 감사의 눈인사를 건네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16549659178957.jpg“문제 되는 거 아닙니까?”

늘어져 있던 루칸이 벌떡 고개를 들며 물었다.

16549659116563.jpg“당연히 문제 됩니다.”

케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16549659116563.jpg“하지만 아서 경은 피해자니까, 문제가 돼도 줄리어스 쪽이 문제가 될 겁니다.”

루칸이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16549659178957.jpg“……내 딸이랑 결혼한 게 아니니까 권리가 없다고 우기면요?”

케이가 방긋 웃었다.

16549659116563.jpg“황실을 상대로요? 뒈지려고?”

목소리에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역시 신경 쓰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칸이 손으로 재차 머리를 헤집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16549659178957.jpg“초야가 없으면 귀족들 혼인은 무효라면서요. 그럼 그 뭐냐,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몸은, 법적으로 미혼인 거잖아요. 무효라고 우기면 꼼짝없이 당하는 거 아니에요?”

16549659116563.jpg“황실이 그렇게 안 둘 겁니다.”

케이가 냉랭하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16549659116563.jpg“그 전에, 그렇게 되면 줄리어스 쪽이야말로 곤란해질걸요. 제국의 영웅인 각하를 상대로 사기 결혼했다고 떠벌리고. 온 세상 비웃음을 사고 황실이랑 척진 후에. 사기꾼 ‘크리스티나’랑 누가 결혼하려 들겠어요? 그땐 이미 줄리어스가 선제후도 아닐 텐데.”

줄리어스 후작이야말로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하는 소리가 날카로이 덧붙었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쉰 아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6549659088392.png“줄리어스는 이 일을 묻고 싶어 하고 난 그 여자를 합당한 배상의 인질로 삼았다. 그 여자는 과거 일의 증거니까.”

기사들의 시선이 아서에게로 모여들었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16549659088392.png“이래저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 줄 거야. 부실 보급 건의 배상 이야기나, 가문의 일을 포함해서도.”

호오……? 턱을 만지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먼 산을 보는 루칸의 표정이 그럴싸하다고 여긴 듯이 묘해졌다. 아서가 시가에 입을 대며 미소 지었다.

16549659088392.png“그러니 소중히 대해 줘.”

기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라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16549659194979.png“…….”

조금 굳은 얼굴로 트리스탄이 물었다.

16549659194979.png“그 여자가 협조적이겠습니까? 줄리어스 쪽에 매수되어 들어온 하녀인데요.”

아서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16549659088392.png“그럼 나도 매수하지, 뭐. 비슷한 금액이면 마음 가는 쪽으로 움직여 주지 않겠어? 줄리어스 후작보단 내가 더 잘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루칸과 트리스탄이 조금 놀란 눈을 껌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59088392.png“후작에게 약점 잡힌 게 있다면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 준다고 하면 되니까. 뭐, 신뢰를 얻으려면 시간이야 좀 필요하겠지만.”

아서가 트리스탄을 쳐다보았다.

16549659088392.png“‘레이나’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하고 있지?”

16549659194979.png“아……. 네!”

대답하는 트리스탄의 놀란 얼굴에도 서서히 설득된 빛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이런 뜻이 있으셨던 건가……? 태연한 어조로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59088392.png“줄리어스는 가능하면 좋은 분위기로 내 입을 막고 싶어 할 테니 어지간하면 안 그럴 테지만,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염두에 두고 보호해.”

16549659226966.jpg“……!”

기사들이 심각해진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레이나가 과거 그 일로 매수된 하녀라면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그녀는 소중한 증인이고, 그 누구보다도 그녀의 입을 막고 싶어 할 건 줄리어스 후작이니까. 상황을 이해한 트리스탄과 루칸의 얼굴에 새로운 각오의 빛이 떠올랐다.

16549659194979.png“네!”

16549659178957.jpg“맡겨 두십시오!”

아서가 싱긋 웃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던 케이가 물었다.

16549659116563.jpg“……‘진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요?”

지난밤에 아서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던 금발의 레이디에 대한 보고가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그 여자가.

16549659088392.png“진짜 크리스티나?”

아서가 피식 코웃음 하며 담뱃재를 털었다.

16549659088392.png“그쪽은 내가 굳이 찾을 필요 없겠지. 아쉬운 건 그쪽일 테니.”

아서가 무심하게 다시 시가를 입에 물었다.

16549659088392.png“신경 끄고 있어. 알아서 찾아올 테니.”

기사들은 감명 깊은 표정이 되었다.

16549659226966.jpg“네!”

트리스탄은 뿌듯함에 표정 관리를 하려고 꾹 입을 다물었다. 멋있다. 우리 사령관 각하. 그 대단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쥐락펴락하시는데. 불여우 같은 거에 구워 삶아질 우리 각하가 아니시지. 트리스탄은 마음이 뿌듯해서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때, 아서가 갑자기 트리스탄에게 뭔가를 슥 내밀었다.

16549659194979.png“?”

트리스탄은 퍼뜩 쳐다보았다. 얼결에 받아들고 보니 손수건이었다.

16549659194979.png“…….”

어제 레이나가 울 때, 옆에 있던 트리스탄이 마지못해 빌려주었던 것이었다.

16549659194979.png“……?”

갑자기 트리스탄은 기분이 다시 이상해졌다. 그래, 내 거니까…… 돌려받아야 하긴 하는데…….

16549659194979.png“…….”

뭐지……? 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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