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돌아오다 (21/210)

#21. 돌아오다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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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돌아오는 길에 마차에서 잠이 들었다. 많이 울어서 그런지,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달빛 아래 젖은 얼굴이 창백했다. 아서는 잠든 레이나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16549658842642.png“…….”

레이나의 손에 쥐어진 트리스탄의 손수건에 아서의 눈길이 머물렀다. 살짝 당겨 빼 보려 했지만, 긴장한 상태로 쥔 채 잠든 탓인지 쉬이 빠지지 않았다. 불편한 듯 찌푸려진 얼굴이 수척했다. ……몸이 좋지 않거나 피로한가. 아서는 레이나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16549658842652.png“좀 허약하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선식 날도 갑자기 쓰러지셨었죠?”

트리스탄은 딱히 부정적이지도 동정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레이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티가 나지만, 아서의 명령대로 예의를 지키려는 듯 딱히 그녀가 엄살을 부린다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내색은 아니었다.

16549658842652.png“……내일은 저희끼리 움직일까요?”

그건 아서도 고민하던 바였다. 레이나를 혼자 두어서 후작 부인과 접촉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 아서에게는 좋지 않겠지만…….

16549658842642.png“아내의 의향을 물어보지.”

16549658842652.png“네.”

트리스탄은 덤덤히 답하고 물러났다.

16549658842642.png“…….”

후작 측의 접근이야, 기사들에게 경비를 맡기기 시작했으니 어느 정도 차단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기사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안전하게 가려면 한 번 정도 마찰이 생긴 뒤. 확실하게 ‘건드리면 문제가 된다’는 인상을 준 후여야 안전할 것이다.

16549658842642.png“…….”

그럼에도 교묘하게 접근해 오거나 ‘레이나’ 쪽에서 자발적 접촉 의사가 있다면 완벽하게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아서가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 수 있고.

16549658842684.png“…….”

저택에 도착해, 아서가 그녀를 안아 내릴 때까지도 레이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서는 살짝 레이나의 허리에 손을 대고 그녀가 코르셋을 심하게 졸라 입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 * * 신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아서는, 기사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여자를 마주쳤다. 아서가 머무는 층을 지키기 시작한 기사들이 그녀를 통과시키지 않아, 출입을 허락받지 못한 여자는 기사들의 창검 앞에 가방을 든 채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서를 발견한 기사들의 눈이 움직이자, 여자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보았다.

1654965884269.png“…….”

그리고 보닛에 가려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1654965884269.png“안녕하세요.”

금발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선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품 안에도 숄을 걸친 채 얼굴을 가리고 잠들어 있는 그런 여자가 한 명. 여자의 인사에 아서는 그저 싱긋 미소 지어 대답을 대신한 뒤, 그녀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기사가 보닛을 쓴 여자를 힐긋 보고 아서에게 물었다.

16549658871783.jpg“각하를 기다리셨습니다. 아는 레이디이십니까?”

아서가 말했다.

16549658842642.png“아니.”

여자가 뒤에서 웃었다.

1654965884269.png“모르는 사이는 아니에요. 며칠 전에 한 번 뵈었습니다.”

16549658842642.png“아는 사이라기에도 부족할 듯한데요.”

아서가 답하며, 한발 늦게 뒤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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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58842642.png“시각이 야심한데. 단지 안면이 있을 뿐인 정숙한 레이디의 방문을 살갑게 맞이하는 실례를 범할 순 없을 것 같군요.”

1654965884269.png“…….”

여자가 기탄없이 웃었다.

1654965884269.png“그렇네요.”

담담하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1654965884269.png“정식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야심하지 않은 시각에요.”

오늘은 인사만 드리러 왔어요. ―덧붙이며. 여자는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살짝 무릎을 굽혀 묵례한 뒤 사뿐히 몸을 돌려 떠났다. 아서가 품 안에 안고 있는 여자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 * * 다음날 새벽. 아서가 침실을 나설 때 레이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잠은 어렴풋이 깨었으나 몸살 기운이 있는 것처럼 정신이 맑지 않고 열이 났다. 아서는 그날의 일정을 함께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기사들, 트리스탄, 루칸, 케이 등과 함께 문 앞에서 짧게 상의한 뒤 종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주치의를 불러오라는 말과 함께 하녀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하달한 후. 아서는 자신의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 가운데 오늘의 일정에서 그나마 빠질 수 있으면서도 임무에 적합한 한 명을 그곳에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아서는 기사들에게 그녀에 대해 알아야 할 몇 가지 이야기를 일러두었다. 짧은 시간, 약간의 소요가 벌어졌다. 아서는 그저 싱긋 웃고, 뒷일을 트리스탄에게 맡긴 뒤 방으로 돌아갔다. 하녀가 주치의를 데리고 오길 기다리며, 의장을 갖추어 입은 아서는 떠나기 전까지 침대 곁에 앉아 레이나의 젖은 이마를 쓸어 주었다.

16549658842642.png곧 의사가 올 거요.

16549658842642.png하녀들과 내 기사를 남겨 두겠소.

  아서는 가만가만 서늘한 손등으로 그녀의 열 오른 뺨을 식혀 주며 나직이 말해 주었다. 레이나는 몽롱한 와중에 아서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16549658842684.png같이 가요.

  아서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며 내려다보다가. 몸을 굽혀, 달래듯 그녀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술을 댔다.

16549658842642.png……금방 다녀오겠소. 늦지 않게 올게.

  살짝 벌어진 문을 닫아 주며. 트리스탄은 조용히 문에 등을 댄 채 그들을 기다려 주었다. · · ·

16549658842642.png「자네들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

16549658842642.png「트리스탄에겐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대들도 알 때가 된 것 같군.」

16549658842642.png「지금 저 안에 누워 있는 여자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아니다.」

16549658842642.png「줄리어스는 내가 돌아오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오 년 전 크리스티나 대신 다른 여자를 대역으로 내보냈어.」

16549658842642.png「레이나 아스타린.」

16549658842642.png「그게 지금 침실에 있는 내 아내의 이름이다.」

  * * * 짹짹.

16549658842684.png“…….”

레이나는 아침 햇살과 새소리에 놀라지 않고 눈을 떴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놀라지 않고 침착한 상태로 침대에서 깨어났다. 레이나는 멍하니 침대 시트 위로 드리워진 하얀 햇살을 바라보았다.

16549658842684.png“…….”

처음으로 침대가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나는 뒤척이듯 몸을 굴려 푹신한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마 위에 얹혀 있던 젖은 수건이 데굴 옆으로 떨어졌다.

16549658842684.png“…….”

레이나는 베개 옆에 굴러가 떨어져 있는 젖은 수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16549658842684.png“…….”

지난밤의 어렴풋한 기억이 머릿속에 스쳤다. 줄리어스 영지를 돌며 유가족들을 만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마차에서 지쳐 졸고 있으니, 그가 말없이 어깨를 빌려주었던 것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물먹은 솜처럼 움직이지 않던 몸. 그리고 새벽엔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올라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 모두 아득한 꿈속의 기억처럼 희미했다.

16549658842642.png「금방 다녀오겠소. 늦지 않게 올게.」

16549658842684.png“…….”

그건 꿈이었을까? 레이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스스로의 손으로 이마를 덮어 보았다. 거기엔 얹혀 있던 젖은 수건의 습하고 시원한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16549658842684.png“…….”

레이나는 일어나기 위해 뒤척였다. 몸은 편안한 잠옷 차림이었다. 몸은 살짝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속이 썩 좋지 않았다. 미식거리네……. 레이나는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서 대신 브로디와 처음 보는 기사 한 명이 문 근처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주치의인 로렌슨 선생님이 있었다. 아서는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아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16549658842684.png……아서 경은 어디 갔지?

16549658937443.jpg“일어나셨습니까.”

로렌슨 선생이 그녀가 일어난 걸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보다 먼저 브로디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레이나의 잠옷 차림 위에 숄을 걸쳐 주었다. 브로디가 침대 위에 떨어진 수건과 젖은 베개를 정리해 주고 레이나를 편히 앉을 수 있게 해 주었다.

16549658937443.jpg“기분이 어떠십니까?”

주치의가 물었다. 아서를 찾던 시선이 로렌슨에게 돌아왔다.

16549658842684.png“좋아요.”

습관적으로 대답했지만 사실 좋지 않았다. 목이 잠겨 있었다. 큼, 목을 가다듬자 속이 울렁거려 레이나는 참지 못한 채 불편한 표정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표정이 찌푸려지자, 로렌슨 선생이 레이나의 침대에 더 가까이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16549658937443.jpg“손목을 주십시오. 진맥해 보겠습니다.”

16549658842684.png“아…… 네.”

레이나가 로렌슨 선생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로렌슨이 레이나의 손목에 손가락을 대었다.

16549658937443.jpg“…….”

로렌슨이 문진을 시작했다.

16549658937443.jpg“속이 불편하십니까?”

16549658842684.png“……네. 약간 그러네요.”

16549658937443.jpg“언제부터 그러셨죠?”

16549658842684.png“오늘 처음이요. 자고 일어나서…….”

16549658937443.jpg“어제는 무얼 드셨습니까? 잠은 몇 시간이나 주무셨나요?”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 같은 명의가 세심하게 물어봐 주는 것을 황송하게 느끼며, 레이나는 하나하나 대답했다.

16549658937443.jpg“식사는 요즘 규칙적으로 하십니까?”

16549658842684.png“아, 네. 그 어떤 때보다도 잘…….”

16549658937443.jpg“많이 드십니까?”

16549658842684.png“입맛이 없어서 많이는……. 하지만 평소보단 많이 먹고 있어요.”

16549658937443.jpg“잠은요?”

16549658842684.png“그것도 평소보단 훨씬 길게 잘…….”

레이나는 민망스러워 목덜미를 눌렀다. 누군지 모를 기사가 신경 쓰여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하녀에서 아가씨로 생활이 바뀐 게 너무 드러나는 대답들 아닌가? 레이나는 브로디가 걸쳐 준 숄을 어색하게 끌어올렸다.

16549658937443.jpg“잠을 설치지는 않으십니까?”

16549658842684.png“가끔 설치긴 하는데……. 그래도 평소보단 훨씬 잘 자고 있어요.”

16549658937443.jpg“월경 주기는요? 규칙적으로 있으십니까?”

16549658842684.png“……기억해 두지 않아서 잘…….”

레이나는 자신 없게 조그만 소리로 답했다.

16549658937443.jpg“음…….”

잠시 후 로렌슨 선생은 조용히 물러나 트롤리 위에 놓인 쟁반 앞으로 갔다. 달각이는 소리가 났다.

16549658937443.jpg“그제는 차를 얼마나 드셨습니까?”

검붉은 물을 말하는 거구나.

16549658842684.png“한 잔 가득요.”

16549658937443.jpg“…….”

달각이던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16549658937443.jpg“……많이 드셨네요.”

16549658842684.png“…….”

잠시 동안 로렌슨 선생은 거기에 선 채 달그락거렸다. 달각. 소리가 멈추며 선생이 몸을 돌렸다.

16549658937443.jpg“안 먹던 약에 몸이 적응을 못 하는 모양입니다. 몸에 누적된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약이 들어오니 독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앨빈 로렌슨은 검붉은 물을 쟁반 위에 그대로 놓아둔 채 곁들여 주던 환만 가져와서 물이 담긴 컵과 함께 내밀었다.

16549658937443.jpg“오늘은 이것만 드십시오.”

투명한 물이었다. 레이나는 받아 들지 못한 채 얼떨떨하게 로렌슨 선생을 바라보았다.

16549658842684.png“…….”

레이나는 눈치를 보며 검붉은 물 쪽을 쳐다보았다. ……후작 부인에게 보고되지 않는 건가?

16549658937443.jpg“하루 정돈 괜찮습니다.”

로렌슨 선생이 재차 권하듯 손을 까닥 들었다 내렸다. 레이나는 받아 들었다. 그 후 로렌슨은 쟁반 위의 약그릇을 들고 창가로 가더니 그대로 화초에 조르륵, 그것을 따라 버렸다.

16549658842684.png“!”

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검붉은 물’은 상당히 고가의 약이었다. 줄리어스 저택의 하녀 주급은 상당히 후한 편인데도, 저 약이 필요한 애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금전적 곤혹을 겪는 걸 많이 보았다. 그걸 저렇게 버려 버리다니?

16549658937443.jpg“오늘은 쉬십시오.”

로렌슨은 덤덤하게 말했다. 끼익.

16549658871783.jpg“각하.”

기사의 목소리와 함께 공기가 바뀌었다. 부인께선 조금 전에 깨어나셨습니다,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들어선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이 마주쳤다. 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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