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크리스티나의 귀환2021.11.07.
“트리스탄입니다. 레이디.”
그 이상의 인사는 없었다.
“…….”
다행이다. 레이나는 차라리 안심했다. 피차 진실을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말을 안 하는 거구나.
“…….”
안심하는 찰나 아서가 촌평했다.
“무뚝뚝하군.”
레이나가 눈을 부릅뜨고 아서를 쳐다보았다. 트리스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아서가 싱긋 웃으며 요구했다.
“더 길게 다시.”
트리스탄이 짧게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레이나를 보았다.
“아서 실딘 로아스 줄리어스 각하의 보좌관이자 플람베르의 명예로운 기사인 트리스탄 고트프리트입니다. 삼십 대입니다. 기혼이고요. 서른이 된 아내와 다섯 살 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전쟁의 공훈으로 남작이 되고 특이사항으로는 무뚝뚝합니다.”
“…….”
트리스탄은 다시 예를 갖추며 레이나의 손등에 입 맞추려 했다. 아서가 막았다.
“그건 다시 안 해도 돼.”
“네.”
아서가 그대로 레이나를 이끌어 에스코트했다. 레이나는 허둥지둥 따랐다. * * * 똑똑. 트리스탄이 문을 두드렸다.
“…….”
문이 열리고, 초로의 한 중년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트리스탄과 아서를 보더니 예를 표했다.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서 경.”
아서가 모자를 벗고 살짝 고개 숙여 시간을 조금 두는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중년 여자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아니,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채 그러지 못했음에 가까웠다. 아서는 잠시 부인과 눈을 맞추며 침묵의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아무리 그를 아꼈던들 감히 부인의 상심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떨어져 뒤에 서 있던 레이나는 이 방문의 의미를 깨닫고 숨을 멈추었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아드님은 훌륭한 기사였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농담을 해서 저흴 웃게 해 주었죠. ……지금도 가장 멋진 친구 중 하나로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조용한 바람이 불었다. 아서는 모자를 가슴에 댄 채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를 잃은 건 저희에게 크나큰 손실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신께서 그를 아껴 빨리 부르셨음을 저희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최고의 기사였고 명예로웠습니다. 그 사실이 부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아서를 바라보던 부인이 잠시 후 눈물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고맙습니다.”
* * * 어떨 땐 많은 아이들이 딸린 대가족이 나왔고, 어떨 땐 단 한 사람만이 나왔다. 겨우 레이나 또래의 여자가 나왔을 때도. 아서가 왔다는 데에 흥분하여 눈을 반짝이고 엄마의 손을 잡아끄는 어린아이가 나왔을 때도. 레이나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장 예의를 갖추어 차려입은 깨끗한 옷차림으로 나온 유가족도 있었고, 초췌하게 비틀거리며 나온 유가족도 있었다. 담담히 슬픔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보이거나 끝내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아서를 바라볼 뿐,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서는 매번, 부하들과의 이야기를 하나하나씩 담아 서로 다른 조의의 말을 건넸다. 레이나는 그걸 들을 때마다 뒤에서 울었다. 아서도 트리스탄도 울지 않는데, 떠난 사람을 알지도 못하는 자신이 우는 것이 주책없고 꼴사납다고 생각해 참으려 애쓰면서도. * * * 마차에 있겠습니까? 눈이 붉어진 레이나에게 아서가 권했다. 레이나는 트리스탄이 건네준 손수건을 쥔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매번 마차에서 내리고, 매번 그의 뒤에 서서 울음을 참았다.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내리고, 마침내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서 그날의 일정이 종료될 때까지. * * * 줄리어스 후작 저택. 새벽 두 시.
“…….”
「아서 특수」의 맛을 본 후작 내외의 아서에 대한 평가는 이틀 만에 180도 달라져 있었다. 아서는 거만하지 않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것이었다. 대책 없이 구는 놈도 아니었다.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갈 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쌓인 선물 더미와, 이틀 내내 그것들을 옮기고도 여전히 쩔쩔매고 있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가는 선물 더미들 사이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거대한 그랜드피아노와, 누군가 유명한 비평가가 극찬했다던 거대한 페달 하프가 차례로 옮겨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심조심 옮겨지고 있었음에도 그랜드피아노가 워낙 큰 탓에 위태롭게 선물 더미들을 건드렸다. 당황한 집사의 외침에 달려온 하인들이 허둥지둥 넘어지려는 것들을 붙들고 다른 선물들을 정리하며 피아노가 지나갈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의 선물 세례는 줄리어스의 성년식에서도, 결혼식에서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
새벽부터 밤까지 몰아치는 일정을 소화하고 간신히 짧은 휴식을 얻은 후작 내외는 저택의 본관 앞에서 앞마당 정원에 즐비한 선물 더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 저택 안으로 들이지도 못해 정원에 쌓여 있는 선물 더미들을 계단 위에서 관망하며, 후작은 하루 종일 이어진 바쁜 일정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물밑 협상들을 곱씹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귀족이었고 제국 제일의 거부였던 줄리어스에게조차 이런 파격 대우는 처음이었다. 제국의 가장 쟁쟁한 상단들과 콧대 높은 귀족들이 저마다 선물을 가져다 바치며 겸손을 떨었다. 아무런 조건도, 만남의 희망조차도 제시하지 않은 채 「축하합니다. 번영을 기원합니다.」, 「축하합니다. 존경과 애정을 담아.」하는 짤막한 카드만 놓인 선물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그에겐 충격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로 고가의 선물을 보내면서 겨우 이런 메시지만 보내온다고? 나라면 뇌물에 이런 거금을 쓰면서 결코 이렇게 얻는 것 없이 점잔만 떨며 끝내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드는 으리으리한 선물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집사장 짐에게 그 모든 선물과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들을 가문 이름과 함께 빠짐없이 기록해 두라고 명령하며, 줄리어스는 머리를 비운 채 선물들이 쌓여 있는 이 기념비적인 광경에 심취했다.
‘그래……. 이런 거였군. 과연…….’
줄리어스 후작은 ‘아서’가 가져다준 명예와 권력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다. 일찍이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무엇보다도 안토니오 줄리어스를 고무시킨 건, 그동안 ‘어떻게든 유리한 방향으로 조율해야 하는 어렵고도 중요한 거래 상대’로 취급받던 그들을 사람들이 ‘가장 품위 있는 귀족이자 가장 존중해야 하는 권력자’로 예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깨달았다. ‘제국 제일의 거부’는 사회 최상층이 아니었다. ‘부자이면서도 명예로운 선제후, 강력한 예비 권력자’ 정도는 되어야 사회 최상층이었다. 그 자리에 오른 줄리어스의 권력에 대한 시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끌어올려졌다. 왜 그토록 무의미한 돈을 써가면서도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얻어야 했던 건지, 줄리어스는 처음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선대 후작, 그의 아버지인 로날드 줄리어스가 평생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떠올리며,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아련한 회한에 흠뻑 취해 달빛에 빛나는 뇌물들의 향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후작은 새로운 깨달음과 잔잔한 감동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호통치던 어머니, 후작 대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명예와 권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사게 해 주는 또 다른 화폐다.」
‘어머니, 그 말씀의 뜻을 이제 저는 진실로 이해하게 되었……!’
“뭘로 아서의 화를 풀어 줘야 하죠?”
후작 부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
감수성이라곤 없는 건지, 저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도 같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 후작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서가 우리한테 원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모처럼 심취해 있는데 들어온 방해가 실망스러웠음에도 한껏 마음이 너그러워져 있던 후작은 소인배처럼 짜증으로 쏘아붙이지 않고 거들먹거렸다.
“뭐든 아서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줘. 못 해 줄 게 뭐 있어? 우리가 ‘줄리어스’인데.”
“뭘 원하는지 말이라도 해 줘야 다 해 주죠.”
후작은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 부인의 종종거림이 피곤했다. 올라간 격에 맞게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우선 아서랑 일정을 잡아야지.”
우리 일정에 언제쯤 짬이 날지 봐서…….
“…….”
그러고 보니 외부 손님들을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아서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는 백년손님인데. 물론 아서야 그저 푹 쉬고 싶을 따름일 테니 우리의 관심이 불편할 그를 배려한 처사이긴 했다. 설마 그걸 홀대라 여기지야 않겠지? 줄리어스 후작은 턱을 만지며 눈을 굴렸다. 어찌 됐든 가문이 이룩해낸 이 괄목할 만한 성과에 사위의 공이 크니, 그가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더 마음을 써 주어야 마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위는 충분히 쉬고 있나? 식사는 주방장이 신경 쓰고 있지? 최상급 귀빈 예우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후작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당한 표정으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당신……. 지금 아서 옆에…… 잊은 거 아니죠?”
부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후작은 슬슬 기분이 나빠져 얼굴을 굳혔다.
‘크리스티나. 그 성질 더럽고 까탈스러운 딸자식 때문에 하여간…….’
오 년 전 내가 말한 대로 고분고분 따랐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걸. 자기야말로 딸을 두 번 팔아먹을 생각에 희희낙락했다는 건 이미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버린 채 후작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쩌라고? 아서가 원한다면 정부로 들이게 해야지. 잘못한 게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이제 걔도 배울 나이 아냐? 왜, 제가 판 무덤인데 그 정도도 감당 못 하겠대? 원, 철딱서니가 없어도 유분수지!”
후작이 신경질적으로 지껄였다.
“걔는 대체 누굴 닮았길래 그렇게 제 성질이 감당이 안 돼? 저질러 놓은 일 수습할 생각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대체? 걔 어쩌고 있어!”
“머리를 식히고 왔어요.”
돌연 다른 방향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후작과 후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그곳엔 직전까지 욕하던 딸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해변이라도 거닐고 온 듯, 달밤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레이스 양산에, 머리에 쓴 하얀 보닛에는 보석과 깃털이 달려 있었다. 살랑, 귀 뒤로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크리스티나는 가볍게 어깨 위에서 돌리고 있던 양산을 내려 접었다.
“크리스티나!”
후작 부인이 얼른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잘생긴 풋맨 두셋이 양손에 짐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크리스티나가 보닛 아래로 생긋 미소 지었다.
“슬슬 사과하러 가야죠. 어디, 아서의 기분은 어때요? 레이나가 그이의 기분을 잘 풀어주고 있나요?”
후작과 후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양산을 접으며 숙인 고개에 앞으로 흘러내린 금발을 다시 어깨 뒤로 쓸어넘기며, 크리스티나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남편을 잘 부탁한다는 말도 못 하고 다녀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