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설령 그런 약속을 했어도2021.10.31.
줄리어스 저택, 아서의 개인 응접실. 아서는 자신이 신뢰하는 기사들 몇과 트리스탄을 불러들여 말했다.
“신방 문이 너무 쉽게 뚫리더군.”
내가 원치 않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방문자들이 문을 두드리고 쳐들어온다며, 아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길 원한다고 부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런 일 없게 해줘.”
“알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부하들은 딱딱한 얼굴로 분개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건 굴러 들어온 돌인 아서가 후작가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무방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작 저택 내부에서 ‘아서’를 존중받는 고유 영역을 가진 후계자이자 지배권자로 인식시킬 필요성이 있다며, 그들은 아서의 기사들을 저택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구역을 구축하기로 했다. 저택 안에 아서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자연스럽게 기사들이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며 저택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가진 후계자의 존재에 익숙해지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좋아.”
아서가 싱긋 웃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린 수도에 다녀와야 해. 그동안 이곳의 내 자리가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그대들이 잘 준비해 줘.”
“네. 염려 마십시오.”
그들이 자리를 비우기 전에 이 후작가에서 그는 손님이 아닌 후계자로 공고히 인식되어야 했다. 저택을 떠나 수도에 다녀오는 일이 손님의 외출처럼 여겨져선 안 되었다. 아서는 최대한 빨리 후작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가문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돌아와 다시 줄리어스에서 자리를 잡는 일은 배로 어려워질 것이었다. 용병 출신 기사 루칸이 투덜거렸다.
“황실이 보장한 계약서가 있는데도 방심할 수 없긴 마찬가지네요.”
또 다른 기사, 보좌관 케이가 손에 든 노트를 넘기며 말했다.
“할 수 없죠. 데릴사위로 들어온 후계자 자리란 불안한 거니까요.”
설명이 이어졌다.
“다른 가문의 역사적 선례들만 보아도, 초야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효화, 딸이 죽었다는 이유로 무효화, 심지어 일방적 파혼으로 무효화까지, 온갖 이유로 물먹은 데릴사위들이 수두룩하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루칸이 입술을 삐죽이다 불쑥 아서를 향해 물었다.
“각하. 혼인 계약서는 확실하게 하신 거죠? 다른 것들도요.”
아서는 암시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케이가 대답했다.
“다행히 계약서 쪽은 황실 덕분에 코를 베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각하께서 줄리어스의 이름으로 6개월 이상 참전할 경우 줄리어스 쪽에서 일방적 파혼은 불가능. 2년 이상 참전한 경우 설령 ‘크리스티나’가 사망하거나 실종되더라도 후계자로서의 권리를 인정.”
계약서의 내용을 똑같이 필사해 놓은 노트의 페이지를 넘기며 케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줄리어스’의 이름으로 현저한 공을 세웠을 경우 ‘가주’와 동등한 가문 내 공동 지배권을 인정. ……이건 황실이 너무했다 싶을 정도의 조항인데요. 후작이 용케도 이 조항을 받아들였네요.”
기사들이 신이 나서 잘근잘근 씹어댔다.
“살아서 못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죽어라 고사를 지냈는데 보란 듯이 ‘현저한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
케이가 씩 웃으며 여유롭게 페이지를 넘겼다.
“물론 ‘현저한 공’이라는 게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뭐…….”
기사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짜릿한 여운을 즐기며 케이가 다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경이 전사할 경우 혼인 사실은 없었던 일로, 지참금은 전액 반환. 이건 좀 서운한 조항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미 무의미해진 조항이고요.”
기사들이 소악마 같은 얼굴로 쌤통이라는 듯이 킬킬거렸다. 이 저택 안에서 후작과 동등한 ‘공동 지배권자’로서 아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혼인 계약서에 대한 법적 자문도 한 번 더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
한편, 기사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트리스탄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런 불쾌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서는 묘하게도 기분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상대를 회유할 때나 협박할 때나 시종일관 웃는 아서긴 했지만. 오래 그와 함께한 트리스탄은 아서의 기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왜 기분이 좋으시지?’
트리스탄은 미심쩍게 아서의 뒤편, 신방으로 이어져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한동안 곁에 둘 거야.」
「자네도 극진한 예를 다해줘.」
트리스탄은 심각한 얼굴로 눈빛을 굳혔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격에 맞춰서.」
“…….”
다 뜻이 있으시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혹시 이거…… 위험한 상태인 거 아닌가? 마음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남성 편력 있는 여자 같으니 조심하라 말씀드렸는데……. 좀 더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말씀드렸어야 했나? 경을 털어먹으려는 여자일 수 있습니다. 유혹해 조종하려는 여자일 수 있습니다. 당신을 파멸로 이끌 팜므파탈일 수 있습니다.
“…….”
……설마 아서가 그 정도도 모를까?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아서를 존경하고 믿고 있지만, 외로운 사람이 얼마나 쉽게 불여우에게 홀라당 넘어가느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아서가 그런 케이스면 어쩌지? 트리스탄은 실례가 될지도 모를 불안과 걱정을 내색하지 못한 채 무릎 위에 둔 손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각하의 기분이 좋은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면 위험하다. 하지만 자신이 아서의 가족사나 여자 문제에 어디까지 간섭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서는 공성이나 수성이나 빈틈없이 해내는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이니 자신의 마음에 빗장을 거는 일에도 완벽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비록 전장에 다녀오느라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지만,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정을 지키는 트리스탄으로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염려가 되었다. 특히, 가정사가 복잡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온 아서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고 걱정이 되었다.
“…….”
아서가 여자에게 면역이 있을까? ……과연?
“…….”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서의 낌새를 살피며, 트리스탄은 레이나를 경계했다. 혹시라도 외로운 사령관 각하를 격 떨어지는 불여우가 구워삶는 중인 건 아니겠지? 날 크리스티나 아가씨 대신 당신의 아내로 삼아달라며, 우리 좋지 않았냐며 베갯머리송사를 하기라도 한다면……. 외로운 아서가 거기에 그만 홀라당 넘어가 버리기라도 한다면……. 트리스탄은 그런 일을 미연에 막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나도 행복한데?」
담담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르며 트리스탄은 마음이 아파졌다.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로도 성에 안 차는데. 줄리어스의 끄나풀로 들어온 사기꾼 따위가 그의 옆자리를 노린다니. 그런 일이 발생하면 오히려 줄리어스는 옳거니, 그의 약점을 잡았노라며 기세등등하겠지. 그리고 아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웅의 영예엔 먹칠이 될 것이다. 트리스탄의 눈이 싸늘해졌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겠다. 다른 기사들이 준비를 하겠다며 물러간 후. 아서와 둘만 남자 트리스탄이 입을 열었다.
“레이나와 테일러 로렌슨. 어느 쪽부터 들으시겠습니까? ‘레이나’ 쪽은 아직 정보가 미흡하긴 합니다만.”
아서는 살짝 틈을 두고 말했다.
“레이나부터.”
* * *
레이나는 살짝 아서를 곁눈질했다. 정말 살짝 본 건데. 막 마차에 오른 아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웃으며 툭 물었다.
“가면이라도 쓸까?”
탁. 마차 문이 닫혔다. 레이나는 민망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다행이다. 기분은 풀린 것 같았다. 저렇게 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인이 내 눈도 못 마주치는 건 좀 그런데.」
“…….”
확연히 기분이 풀린 얼굴로 웃던 아서를 떠올리며 레이나는 열이 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식혔다. 아서가 손을 들어 마차 천장을 툭툭, 두 번 쳤다.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
레이나는 어색함과 창피함을 견디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서는 씩 웃으면서 마차에 기대어 턱을 괴고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눈웃음이 돌아왔다.
“…….”
좀 민망하긴 해도……. 싫진 않았다. 레이나로선 그가 화가 나 있지 않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놓였다. 그는 이렇게 눈을 마주 봐 주는 걸 좋아한다. 이젠 레이나도 알 것 같았다. 아서가 잠자코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당신도 미인이오. ……무척이나.”
“…….”
갑작스러운 기습에 레이나는 서서히 목덜미부터 빨개져 올라왔다.
“뭐…….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
잘 익은 레이나의 얼굴을 보며, 아서가 짐짓 농담하는 투로 선심 쓰듯 덧붙였다.
“……당신이 덜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오. 내가 여자의 외모에 평정이 흔들리는 인격은 아닌지라.”
레이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반문했다.
“그럼 저는 그런 인격이라는 거예요……?”
아서는 고민하는 듯이 턱을 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음……. 얘기가 그렇게 되나.”
“…….”
잘난 얼굴로 짐짓 웃으며 덧붙였다.
“그럴 수도 있지. 나쁜 취향이라 생각지는 않소.”
“…….”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나의 얼굴을 보고 아서가 웃음을 참는 듯이 입가를 가렸다.
“억울한 얼굴이군?”
“억울하니까요.”
“그래? 자주 있는 일이 아닌가?”
“전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거든요?”
“한 번도?”
“한 번도요!”
레이나가 빨간 얼굴로 반발했다. 잠자코 그녀를 보던 아서의 입매에 참지 못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큼, 하고 짧게 목을 가다듬더니 살짝 콧등을 만지며 고개를 기웃했다.
“……내가 그만큼 잘생긴 건지 당신의 정숙함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
레이나는 뭔가 복합적으로 억울한데 뭐가 억울한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로 꾹 입을 다물고 표정을 찌그러뜨렸다. 아서가 끝내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차가 가을빛으로 물든 거리를 달려갔다. · · · 그녀가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다. 언젠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게 돌아가야 하는 내가 그녀의 인생을 망치지 않도록, 그녀에게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보내 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나에게만 혼인이었고, 그녀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했다. 어쨌든 나는, 오 년 동안 너를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순간, 꿈에서라도 그녀를 가진 남자가 나였다는 건 기분이 좋았다. 그냥. 아무리 진짜 연인이 따로 있어도. 잠깐이라도 지금은 내가 남편이라고 옆에 있는데. 멀쩡히 내 옆에서 잠든 아내를 꿈에서라도 빼앗겼다는 건 기분이 나쁘니까. 멍청한 오해를 하고, 못내 화가 나 짜증을 부리고 말았는데도 용기를 내주었다. 내가 무섭고 어려울 텐데도 다가와, 자신의 실수로 내가 기분 상했을까 사과하려 애를 썼다. 적어도 그 순간, 그녀의 진심을 보았다.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나도 그녀에게 좋은 시간을 주고 싶다고. 그것이 오 년 동안 의지 되었던 말을 해 준 사람에게 해야 할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다른 남자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 약점을 찾아다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어도. 어차피 이미 알고 있는 만큼 내가 조심하고 선을 지키면 되는 문제니까.
「……다친 데는 없으세요?」
목소리가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내 부인은 용의주도한 첩자는 못 되었다. 그래도 그 순간에, 조금은 배신감을 느꼈으려나.
“…….”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나에게만 혼인이었다는 게 좀 더 충격이었어서.
“…….”
아서는 무의식중에 눈을 살짝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보내주어야 할 사람. 어차피 짧은 시간일 텐데. 그녀가 편하게 나를 봤으면 좋겠다. 편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녀를 안전하게 보내 줄 수 있게 되었을 때에. 함께했던 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