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너랑 나, 두 명?2021.10.28.
아서는 한 번 더 시가를 빨고, 반도 타지 않은 그걸 그대로 재떨이에 눌러 꺼버렸다. 그러고는 슥 식탁 앞으로 가 한 손으로 의자를 끌어 뺐다. 드르륵. 바닥에 의자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
그는 그대로 삐딱하게 고개를 돌려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까닥, 고갯짓.
“…….”
그가 몹시 기분 상했다는 걸 깨달은 레이나는 창백해졌다.
“…….”
레이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발을 움직여 삐거덕거리며 그가 빼준 의자 앞에 가 섰다. 조용히 의자를 밀어 넣어 준 아서는 그녀의 바로 옆에 다른 의자를 끌어왔다. 탁. 그대로 앉은 뒤 레이나의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꼬았다. 그러더니 식기를 들고 곧바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마리나와 브로디는 사양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테이블에 각기 의자를 놓고 둘러앉았다. 식탁에는 줄리어스의 주방장이 공들여 준비한 가장 귀하고 훌륭한 음식들이 한가득 세팅되어 있었다.
“…….”
식기 소리만 찰각거리는 싸늘한 침묵 속에서. 세 하녀는 체할 듯한 얼굴로 산해진미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 * * 식사를 마친 하녀들이 트롤리를 챙겨 도망치듯 물러간 후, 짧은 한숨을 내쉰 아서가 머리를 헤집으며 얼어붙은 레이나를 향해 말했다.
“얘기 좀 하지.”
똑똑. 그러나 뒤이어 울린 노크 소리가 바통이라도 터치하듯 공기를 갈랐다.
“…….”
뒤이어 방문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레이나의 상처를 봐주러 매일 와 주기로 했던, 주치의 로렌슨 선생이었다. * * *
“…….”
주치의 로렌슨은 문밖에서 ‘아가씨’를 부른 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기 결혼 건에 대해 알게 된 후 아서의 앞에 서려니 마음이 선득하고 조심스러웠지만, 어쨌든 어제의 아서는 다 알고서도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어제와 태도가 달라져 죄지은 듯이 움츠러든 모습을 보인다면 도리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로렌슨은 그를 환영하는 우호적이고 기쁜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겠노라 결심하고 있었다. 살갑게 대하며, 후작가의 홀대에 잠시 화가 났어도 여기는 결국 그가 돌아올 곳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덜컹. 들어오라는 말 대신 손수 아서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 아서 경.”
로렌슨 선생은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추며 활짝 웃었다.
“아가씨의 상처를 드레싱 하러 왔습니다……만…….”
로렌슨은 말꼬리를 흐렸다. 새신랑의 분위기가 싸늘했다. 로렌슨 선생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경……?”
“…….”
아서는 싱긋 웃었다.
“로렌슨 선생.”
……그런데 왜 기분이 나빠 보이지?
“들어오게.”
레이나는 아서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앉아 있었다.
―안 잡아먹을 테니, 둘이서만 좀 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게 씹어뱉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 * * 아서는 레이나의 곁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녀의 상처를 드레싱 하는 주치의를 지켜보았다. 어딘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사교적이고 호의적이던 로렌슨 선생도 입을 꾹 닫은 채로 레이나의 상처만 말없이 소독했다.
“…….”
대체 이 망한 분위기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후작님 내외의 말로는, 아서 경은 개선식 전부터 아가씨가 바꿔치기 된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새삼 어제오늘 사이에 사기 결혼 건에 대해 알게 되어서 태도가 변한 건 아닐 텐데……. 처음에는 레이나,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는 이 하녀 애와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싶었지만……. 주치의 로렌슨은 점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는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서의 시선이 아까부터 뚫어져라 제 얼굴에 머물고 있었다. 뭔가…… 어제와 다르게…….
“…….”
갑자기 저를 적진 탐색하듯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초면이었던 어제는 자신의 인사에 산뜻하고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딘지 기묘한 적의가 느껴졌다. 혹시 레이나가 나에 대해 뭔가 아서 경에게 안 좋게 말했나……?
“여기서 얼마나 오래 일했나?”
아서가 불쑥 질문했다. 부드럽게 들리는 어조였다.
‘착각인가……?’
주치의 로렌슨은 조금 눈치를 보면서도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삼십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서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담백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 일했군. 대대로 후작가를 모시고 있나?”
“하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긴 합니다. 아서 경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그리되겠지요.”
로렌슨 선생은 너무 드러낸 속내가 아첨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부담스럽지 않게 어조를 조절하고 민망해했다.
“하지만 저희 가문과 후작가의 인연은 제가 처음입니다. 30년 전에 별 볼 일 없는 젊은 의사였던 저를 과분하게 좋게 봐주시고 거두어 주신 후작 대부인과의 젊은 날 인연이 시작이었죠.”
앨빈 로렌슨은 아서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모난 점도 황당한 점도, 솔직히 진짜 너무한 점도 많은 줄리어스 후작가지만, 그마저도 ‘못난 내 새끼’가 되어 버린 지 오래고. 어쨌든 30년이나 몸담은 데다가, 돈도 잘 주고, 하녀장 허스트 부인, 집사장 짐과 함께 저택의 삼대 터줏대감 취급을 받으며 후작가의 사용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이 일에서 그는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앨빈 로렌슨은 대대로 이 후작가를 섬기는 가신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앨빈 로렌슨은 후작 대부인과의 인연까지만 언급하고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대대로 충성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너스레를 떨기엔, 아직은 불편한 껄끄러움이 너무 많았다. 사기 결혼 건에 대한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이 일이 잘 해결될지도 알 수 없고……. 아서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
로렌슨 선생은 레이나의 상처에 마지막으로 얇은 피부색 거즈를 덧대어 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로 가서 가져온 다른 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덜그럭덜그럭. 그의 앞에 놓인 쟁반에는 후작 부인이 명령하여 제조한 ‘검붉은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앨빈 로렌슨은 그 앞에서 약 가방을 열고, 유리병에 따로 준비해 온 환을 꺼내 약그릇 옆에 슬쩍 곁들여 내려놓았다. ‘검붉은 물’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환이었다. 후작 부인이 요구한 피임 효과는 유지하면서도 몸에 너무 해롭지 않도록……. 그래도 몸에 무리가 가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이 애도 참 욕을 보는구먼.’
앨빈 로렌슨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
줄리어스에서 일하며 어디 가서 창피해서 말도 못 할 일들을 숱하게도 보고 듣고 겪었지만, 이 일은 그중에서도 역대급이었다. 황실을 상대로 사기 결혼이라니. 심지어 그걸 들켜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후작가가 저질러 온 온갖 기상천외한 사고들 중에서도 단연 최악이었다. 세기의 커플, 세기의 개선식이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앞마당에 모여들어 있는 마당에…….
‘……차라리 이번 일로 혼쭐이 나서 후작님네가 좀 정신을 차렸으면 싶기도 하고…….’
하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황실이라니. 될 대로 되라며 생각해 버리기엔 너무 위험했다. 황실만 아니었어도 가문 전체의 존립이 위태롭거나 목이 달아날 것을 걱정하진 않았을 텐데…….
‘큰일이네. 큰 소동이 되지 않고 해결이 돼야 할 텐데…….’
앨빈 로렌슨은 약그릇과 환이 담긴 쟁반을 들고 레이나의 앞으로 갔다. 레이나는 이미 그가 내놓을 약이 무엇인지 아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검붉은 물 옆의 환을 보고는 의아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
아서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애를 빨리 놓아줘야 이 애의 인생을 망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앨빈 로렌슨은 슬쩍 덧붙여 주었다.
“……약을 조금이나마 덜 쓰게 만들어주는 환입니다. 효과는 유지하고요.”
“…….”
주치의가 말 속에 숨긴 의미를 눈치챈 레이나는, 멍하니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앨빈 로렌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런 약을 먹게 하며 듣기는 미안한 말이었다. * * * 주치의가 떠나간 후, 드디어 아서는 레이나와 둘만 남았다. 아서는 힐긋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레이나는 약차를 마신 후 한결 침착해져 있었다.
“…….”
아서는 왠지 거슬리던 마음이 약해졌다. 기분 상한 자신을 보고 기죽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채 벗어나려고 파닥파닥 몸부림하던 새가 한 번 구박을 당한 뒤 날개를 접고 생기를 잃은 채 주저앉아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일 줄 몰랐는데. 그냥 파닥거리며 거슬리던 것이 나았다.
“…….”
망설이던 아서는 적당히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에 마신 차는?”
레이나는 조금 기죽은 듯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잠시 공백 같은 틈을 두고 답했다.
“약차예요. 몸에 좋대요.”
그녀도 말문을 열 말을 찾고 있었던 듯 이내 말이 이어졌다.
“……죄송해요. 둘이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낯설었어요. 좀 창피하기도 하고…….”
레이나가 목덜미를 만졌다. 머쓱한 듯, 얼굴이 좀 붉었다. 그리고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머뭇거린다. 그러더니 거의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못 보겠더라구요.”
뭘? 아서가 눈을 좁혀 떴다. 기어 들어가는 듯 작아진 목소리.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좀 부담되기도 하고……. 하는 말은 거의 소리가 없었다. 아서는 못 박힌 것처럼 뚫어져라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막막한 듯 자꾸만 멈추며 목덜미를 만졌다. 초조한 듯 머리카락 위에서 미끄러진 손이 쇄골을 스치고 반대쪽 목덜미로, 그리고 가슴을 지나 내려갔다.
“그게…….”
살짝 혀가 나와 꽃물을 들인 입술을 축인다.
“전 정말 그런 꿈을 꾼 건 처음이거든요.”
“…….”
레이나가 어색하게 간신히 미소가 되다 만 표정을 짓고는 또 고개를 숙였다.
“……그런 꿈을 꾸고 똑바로 보기 힘든 게 정상 아니에요?”
“…….”
말하더니 또 입을 다문다. 레이나는 또 그렇게 망설이듯 멈추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크게 용기 낸 듯 아서를 마주 보았다.
“그래도 제가 그렇게 무례하게 피해서…….”
“…….”
아서는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레이나는 힘들게 시선을 맞춘 채 말을 이어갔다.
“……기분 상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가 바보 같았어요.”
그리고 금방 한계가 온 듯 다시 앞머리를 만지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 말을 쏟아내는 데 힘을 다 써버린 듯이 연약하게 입술을 깨물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바닥을 향해 속삭였다.
“화내지 마세요…….”
“…….”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정적을 깨며 아서의 입이 움직였다.
“꿈에 나온 게 나야?”
“네?”
그런 질문을 상상하지도 못한 듯, 어리둥절한 그녀의 상기된 얼굴이 이미 그 멍청한 질문에 대답을 주고 있었다.
“…….”
아서는 말을 잃었다.
“……?”
레이나가 상기된 얼굴로 눈치를 보며 살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나만?”
“네?”
당신이랑 나, 두 명? 세 명이었던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