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살벌한 조찬 (16/210)

#16. 살벌한 조찬2021.10.24.

짹짹.

16549657841045.png“!”

레이나는 새소리와 함께 눈앞에 비치는 햇살을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침!

16549657841045.png‘늦잠 잤어!’

창가에서 커튼을 걷고 있던 아서가 침대 위에서 벌어진 격한 움직임에 의아한 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16549657841045.png“…….”

아침 햇살을 받은 조각 같은 얼굴이 눈부셨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16549657841071.png“좋은 아침.”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16549657841045.png“조, 좋은…… 아침……. 아서 경…….”

다음 순간 떠올랐다. 맞다. 나 지금 하녀 아니구나. 이렇게 기겁을 하며 일어날 필요가 없었어. 레이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땀에 젖은 이마를 짚었다. 나는 지금, 크리스티나 아가씨. 그리고 저 사람을 다시 만난 지 사흘째였다. 촤아아……. 아서가 커튼을 걷어 창으로 햇살을 들였다.

16549657841071.png“씩씩하게 기상하는군요. 내 병사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네.”

16549657841045.png“…….”

뒤늦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쓱해진 낯으로 헝클어진 앞머리를 만졌다. 아서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

16549657841071.png“좋은 꿈 꿨어요?”

좋은 꿈. 그 질문에 레이나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시뻘게졌다.

16549657841045.png“네, 네?!”

레이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목소리가 비명처럼 높았다. 죄라도 지은 듯이 더듬었다.

16549657841071.png“?”

예상외의 격한 반응에 아서가 얼떨떨하게 멈춰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16549657841071.png“……그렇게 기겁할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아서의 단정한 얼굴 위에 간밤의 꿈이 겹쳐지고 있었다. 당혹한 레이나는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식은땀이 나며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간밤에 꿈에서 깨었을 땐 이 정도로 당황스럽지 않았는데. 잠든 얼굴을 그저 혼자 훔쳐보는 것과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너무 달랐다. 미친 것 같은 간밤의 꿈과 달뜬 감각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머릿속의 생각들을 들킬 것 같았다.

16549657841071.png“?”

아서가 레이나를 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고개를 숙이느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져 있었지만,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는 물론이고 목과 어깨와 팔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아서가 농을 걸듯 웃었다.

16549657841071.png“왜 그렇게 빨개져 있지? 야한 꿈이라도 꿨나?”

16549657841045.png“……!”

레이나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그러더니 불한당에게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이 황망하게 아서를 쳐다보았다.

16549657841071.png“…….”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찌푸리며 웃었다.

16549657841071.png“……뭐야, 진짜야? 오 년 만에 돌아온 남편은 수절하게 해놓고 혼자서 무슨 야한 꿈을.”

16549657841045.png“!”

레이나는 터질 듯 새빨개진 채 아서의 시선을 피했다. 짓이길 듯이 시트를 움켜쥔 채로. 입을 앙다문 레이나의 눈가에 끝내 참기 힘든 부끄러움으로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레이나는 울먹이는 발간 눈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16549657841071.png“…….”

아서는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옆에 조금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얼굴로 레이나 쪽을 쳐다보았다. 무어라 물어보기라도 할 듯 입을 열었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왠지 짜증이 난 듯한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레이나는 죽고 싶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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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49657869458.jpg“……아서 경과 아가씨께서 일어나셨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세숫물 올려 보냈습니다. 조찬실에서 함께 식사하실지 여쭤볼까요?”

후작은 미간을 누르며 손을 내저었다.

16549657909148.png“아니. 다른 조찬실로 보내든지 먹을 것 따로 방으로 올려보내. 이쪽은 약속이 있으니.”

그들은 중요한 거래처가 될 상단 대표들과 조찬 약속이 따로 있었다. 렘브란트 경까지 초대한 자리였다. ‘아서 특수’로 대호황을 맞은 줄리어스에게는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중대한 약속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줄리어스가 ‘아서 귀환’ 이후 며칠 만에 초대한 상인이냐는 것이 지금 그들의 가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가락 한다는 상인들과 지체 높은 귀족들은 아서가 돌아온 이후 얼마 만에 줄리어스의 초대장이 날아오는지를 두고 경쟁을 벌이며 자신들을 향한 줄리어스의 가치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거물급 상단의 대표들은 줄리어스의 빠른 초대를 따내기 위해 온갖 물밑 공작을 하며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다. ‘줄리어스의 첫 번째’는 황실, 즉 렘브란트 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거야 모두가 이의 없이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니 두 번째 혹은 세 번째가 될 수 있다면 베스트.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열 번째 이내의 자리는 차지해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 상단이 줄리어스의 ‘몇 번째’ 타이틀을 가질 수 있을지를 예측해 보고, 조금이라도 등수를 높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면서 파격적인 거래 조건들을 제시해 왔다. ‘아서 특수’를 맞아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줄리어스로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모든 파격 제안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며 숨 막히는 일정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사이사이 티타임에 이브닝 파티까지 줄리어스의 일정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이유였다.

16549657909148.png「제기랄! 아서를 만날 시간이 없어.」

16549657909157.png「됐어요. 일단 그 애를 쥐고 있는 동안은 침묵하겠다고 했잖아. 웃어요. 마이어스 대공 쪽과 경쟁하려면 르나하 상단이랑은 무조건 계약해야만 해.」

  대부분의 상인들이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함께 볼 수 있기를 원했고, ‘줄리어스가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만나게 해 준 상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길 바랐지만, 후작은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해 줄 수가 없었다. 후작 내외는 애써 웃으며, 아서는 아직 쉬고 싶어 해서 일정을 잡지 않고 배려하는 중이라는 둥, 돌아온 남편이 마음 놓고 쉬며 집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크리스티나가 곁에서 보필하는 중이라는 둥 말하며, 아쉬움을 남겨 두어야 또 한 번의 기쁜 만남이 있지 않겠냐, 나중에 꼭 기회를 만들겠다고 회피했다. 대신 정말로 중요한 상대와의 만남일 경우에는 ‘렘브란트 경’에게 함께해 주길 부탁했다. 그것은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내보일 수 없는 후작 내외가 차선으로 보이는 최대한의 성의였다.

16549657909148.png“젠장할.”

하녀가 뒷걸음으로 물러간 후, 후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씹어뱉었다.

16549657909148.png“그 하녀 계집애랑 엉뚱한 정분나는 거 아니야, 그 자식? 크리스티나는 뭘 해 보지도 못했는데 그 애한테 사생아라도 생겨 버리면…….”

후작 부인이 냉랭하게 후작의 말을 잘랐다.

16549657909157.png“불상사 없도록 처리해 두었으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표정 관리해.”

후작이 이를 갈았다.

16549657909148.png“크리스티나 그 정신 나간 건 이 와중에……!”

하려던 말은 이어지지 못한 채 끊겼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활짝 웃으며 조찬실로 들어서는 상단 대표들과 렘브란트 경을 맞이했다. * * *

16549657909178.png“조찬실에서 드시겠습니까?”

16549657841071.png“아니. 가져다줘.”

16549657909178.png“네.”

하녀들이 저희들끼리 눈짓하더니 레이나를 향해 물었다.

16549657938525.png“아가씨, 옷을 갈아입혀 드릴까요?”

레이나는 구원군이라도 만난 듯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57841045.png“응, 부탁할게. 머리도 꾸며줄래? 괜찮다면 화장도.”

창피함 앞에서 아가씨 행세에 대한 모든 거리낌은 사라져 버렸다. 이 자리에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부리려 드는 게 뻔뻔해 보이겠지만, 아서와 단둘이 있는 일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레이나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차마 아서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황당할까. 분위기 잡으면 울어 버리고, 말마따나 남편은 수절시키더니 정작 혼자 그런 꿈을 꾸고. 들키지나 말지.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말의 딱 세 배는 강렬한 흑역사였다. 레이나는 뻣뻣하게 아서의 시선을 피했다.

16549657841045.png“…….”

두 하녀는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서는 뭔가 억울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마지못해 물러났다. * * *

16549657938525.png“히비스커스로 괜찮으시겠어요?”

익숙한 질문이었다. 바로 얼마 전 레이나도 아가씨에게 물었던 말이었으니까.

16549657841045.png“…….”

레이나는 크리스티나가 그랬던 것을 떠올리며 손가락 끝으로 다른 향유를 가리켰다.

16549657938525.png“네, 그럼 작약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옷을 갈아입혀 준 뒤 브로디는 식사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자리에 남은 마리나는 향유를 발라 레이나의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향이 방 안에 퍼져 나가며, 레이나의 머리카락이 촉촉한 윤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버석하니 마른 느낌이 있던 머리카락은 거짓말처럼 찰랑찰랑 빛이 나며 흘러내렸다. 머리에 너무 오랜 시간을 쏟지 않고, 마리나는 화장대 앞의 도구들을 집어 들었다. 삭삭, 눈썹을 가볍게 빗고 얇은 칼로 정돈해 주자 흐릿하고 시무룩하던 인상이 깔끔하고 선명해졌다. 얼굴 전체를 가볍게 두드리는 간단한 기초화장에 피부 톤이 정돈되었다. 스치는 듯한 붓 터치 몇 번에 얼굴의 입체감이 살아났다. 눈꺼풀 위에 살짝살짝 오가는 간지러운 붓질 몇 번에 눈매는 놀랍도록 깊고 그윽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물들여 준 분홍색 꽃물이 푸석하던 인상에 고급스러운 생기를 더했다. 레이나는 멍하니 마리나의 손놀림에 변화해가는 제 얼굴을 쳐다보았다. 레이나의 꾸밈없던 인상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 무엇 하나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는데. 레이나는 뒤늦게 아가씨의 메이크업을 검은 머리 하녀가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16549657841045.png“…….”

그동안은 너무 정신없이 끌려가고 떠밀리느라 이렇게 차분하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적 없었는데. 거울 안의 낯선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님과 허스트 부인이 왜 나를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대역으로 세웠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닮았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풀어 꾸미고 메이크업을 한 레이나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가씨와 비슷해 보였다. 그녀를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나, 눈썰미가 어지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얼핏 봐선 단박에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16549657841045.png“…….”

레이나는 혼란에 빠졌다.

16549657841045.png‘아서 경은 어떻게……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보고 내가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아본 거지?’

오 년 전, 그는 어둠 속에서만 아주 잠시 나를 보았을 뿐인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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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나가 레이나를 다 꾸며 주었을 즈음, 브로디가 고풍스러운 삼단 트롤리를 끌고 식사를 가져왔다. 브로디와 마리나는 신방의 큰 원형 테이블에 식탁보를 펼치고 음식과 식기를 차곡차곡 세팅했다.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났다.

16549657909178.png“편안히 식사하세요.”

16549657938525.png“필요한 게 있으시면 부르세요.”

그리고 물러가려는데. 아직 아서와 둘만 남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레이나가 허둥지둥하며 하녀들을 붙잡았다.

16549657841045.png“같이 먹자.”

16549657968427.jpg“……네?”

붙잡힌 마리나와 브로디가 얼이 빠져 반문했다. 레이나가 얼른 아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16549657841045.png“아서 경, 음식이 무척 많아 보이는데…… 같이 먹어도 될까요?”

16549657841071.png“…….”

언젠가, 크리스티나가 후작 부인 앞에서 같은 핑계로 자신을 붙잡아 함께 식사했던 걸 떠올리며 얼른 덧붙였다.

16549657841045.png“절 많이 돌봐 주는 애들이에요. 챙겨 주고 싶어요.”

16549657841071.png“…….”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기대어 그들을 보고 있던 아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고 있지만 확연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당황한 두 하녀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16549657968427.jpg‘누가 봐도 맘에 안 든다는 얼굴인데……?’

대답하지 않은 채, 아서는 표정 없는 얼굴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16549657841071.png“…….”

후, 담배 연기를 뿜어내곤. 그가 입을 열었다.

16549657841071.png“부인은 나랑 둘이 있기가 싫은가 봐?”

16549657968427.jpg“…….”

쿵. 하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얼어버렸다. 레이나가 황급히 수습을 시도했다.

16549657841045.png“그, 그런 게 아니라.”

아서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16549657841071.png“앉아. 하지만 식사까지만이야.”

16549657968427.jpg“…….”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싸해졌다. 빨리 먹고 꺼지라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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