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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떻게 지냈어? (15/210)

#15. 어떻게 지냈어?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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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57225895.jpg“어떻게 지냈소? 오 년 동안.”

레이나는 어색하게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일과를 대답했다.

16549657225901.jpg“그냥…… 잘 지냈어요.”

16549657225895.jpg“…….”

16549657225901.jpg“평일엔 집에서 가족들이랑 보내고…… 주말에는 사원에 가서 미사를 드렸어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했어요.”

아서의 시선을 피한 채, 떠듬떠듬 대답하며 레이나는 그가 밀어준 테이블 위의 찻잔만 바라보았다. 그는 “그랬군.” 말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 후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16549657225895.jpg“나한텐 궁금한 거 없소?”

레이나는 가만히 찻잔을 보던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16549657225901.jpg“…….”

시가를 태우며 눈앞의 배경에 일상처럼 녹아든 그의 모습을 눈에 담자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입이 움직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던 듯, 가슴이 밀어 올리는 물음이었다.

16549657225901.jpg“……어떻게 지냈어요?”

그러나, 말하고 보니 아서의 질문을 평범하게 되돌린 것뿐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 무심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저택에만 있던 사람이지만 그는 전쟁에 다녀온 사람인데. 레이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

16549657225901.jpg“……다친 데는 없으세요?”

아서가 소리 없이 짧게 웃었다.

16549657225895.jpg“…….”

그리고 미소가 남은 얼굴로 시가를 빨며 답했다.

16549657225895.jpg“평범하게 다쳤다가 나았다가 했소. 지금은 딱히 불편한 곳은 없어.”

16549657225901.jpg“…….”

시가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담뱃불이 타들어 갔다. 아서가 깊게 시가를 빨아 연기를 들이켠 뒤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16549657225895.jpg“렘브란트 경을 아나?”

16549657225901.jpg“…….”

갑작스레 나온 황실 귀빈의 이름에 레이나는 조금 굳은 얼굴이 되었다. 렘브란트 경……. 이 주 전쯤 도착해 저택에 머물기 시작한, 황실에서 보내준 사절. 십여 명의 수행인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고, 선제후가 되신 후작님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있다고 들었다. 황후의 오라비의 아들이라던가? 무척 지체 높은 귀족이라 들었지만 레이나가 마주칠 일은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한 번 별채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그분의 수행원을 마주치고, 황실 소식지를 산 적은 있지만…….

16549657225901.jpg“…….”

아가씨도 렘브란트 경과는 교류가 없었지? 레이나는 ‘크리스티나’와 렘브란트가 만난 적이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저택에 고귀한 신분의 손님이 온다 해도 결코 만나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두 분이 만난 적이 있다면 진작 화제가 되었을 터였다. 후작님도 마님도, 중요한 손님일수록 방문자가 아가씨를 직접 만날 수 없도록 꼭꼭 숨겼으니까. 그저 먼발치에서 아가씨의 ‘외모’만 볼 수 있도록 교묘하게 안배할 뿐. 아가씨는 무척 아름답지만, 결코 사교적이고 온화한 레이디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아가씨가 렘브란트 경과 교류가 없었으리라 내심 결론짓고 말했다.

16549657225901.jpg“……황실에서 보내주신 귀족분 말씀이시죠? 와 계신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성함만 전해 들었고, 가까이서 뵌 적은 없어요.”

아서의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16549657240125.jpg「특히 ‘렘브란트 경’ 앞에 나서는 일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피해라. 저택에 머물고 있는 황실 귀빈, 알지? 그 사람한테 얼굴을 보이면 일이 복잡해진다. 적당히 몸이 좋지 않다거나, 남편 외의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렴.」

  레이나는 초조하게 거절할 말을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날 아플 예정이라고 할 수는 없고……. 남편 외의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기엔…… 남편의 권유인데? 또다시 둘만 있고 싶어요 따위의 헛소릴 하고 아서를 황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지금은 알았다고 말하고 나서 당장 일이 닥쳤을 때 아프다고 주저앉는 방법밖에 없나?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생각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16549657225901.jpg“…….”

그때까지는 그게 그날 쓸 심력의 전부일 줄 알았다. 아서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16549657225895.jpg“테일러 로렌슨은?”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렘브란트’의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속도로 얼굴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건 그의 약점을 가져오라는 명령의 대가로 약속받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거지? 어떻게 이 타이밍에 묻는 거지? 무언가 알고 있나? 레이나는 그와 마주하고 있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아직 그에게 해를 끼치는 첩자 활동은 한 것이 없었지만, 할머니의 보살핌을 바라며 그 명령을 받은 자체로 레이나는 아서의 앞에서 당당할 수가 없었다. 레이나는 간신히 ‘크리스티나’의 관점에서 대답했다.

16549657225901.jpg“주치의…… 로렌슨 선생님의 아들 말인가요?”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치맛자락을 틀어쥔 손이 떨렸다.

16549657225901.jpg“절 돌봐 주시는 분은…… 로렌슨 선생님이셔서…… 잘은 모르는데……. ……유능한 의사라고 듣긴 했어요. ……그분은 왜요?”

아주 천천히 말해서, 간신히 말을 더듬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아서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레이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서에게까지 닿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16549657225895.jpg“…….”

뚫어져라 레이나를 보고 있던 아서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마주 보던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시가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16549657225901.jpg“……?”

레이나는 순간 숨을 멈추며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공기를 채우고 있는 듯하던, 무언가 서늘한 감각이 사라졌다.

16549657225895.jpg“…….”

아서는 새 시가에 불을 붙이며 자신의 입가에 걸린 냉랭한 미소를 가렸다. 그리고 가벼운 날숨에 담배 연기를 실어 보내며 말했다.

16549657225895.jpg“아무것도 아니오.”

16549657225901.jpg“네?”

레이나는 퍼뜩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57225895.jpg“식사를 가져오게 하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향하는 아서의 음성은 변함없이 다정했다.

16549657225901.jpg“…….”

레이나는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레이나는 그를 붙들고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테일러에 대해 물은 것이, 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과 관계있는 질문이었으면?

16549657240125.jpg「아서 앞에선 철저히 크리스티나로 있어라.」

16549657225901.jpg“…….”

자신의 입에 족쇄를 채우는 목소리를 느끼며,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49657225895.jpg“렘브란트 경이 말하길, 그대는 무척이나 정숙하다더군.”

레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16549657225901.jpg“……네?”

아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16549657225895.jpg“사원의 승전 기원 미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던가. 다른 사람들과는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고,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그대의 절개를 칭찬했소.”

16549657225901.jpg“…….”

아서는 레이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16549657225895.jpg“고맙소.”

  * * * 그의 손이 레이나의 손을 깍지 껴 침대 위에 눌렀다. 레이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응했다. 어둠을 가르고 들어오는 푸른 달빛. 촉촉하게 젖은 몸에 진주색 달빛이 부서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압도한 채 움직였고, 레이나는 그의 밑에서 오 년 전처럼 흐트러졌다.

16549657225901.jpg「아서.」

16549657225901.jpg「아서.」

  고요한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심연까지 들여다볼 듯. 아찔한 숨결. 그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녀를 탐했다. 레이나는 그의 눈빛에 저를 온전히 빼앗긴 듯했다. 그에게 붙잡힌 곳은 침대에 눌린 손과 허리뿐인데도, 레이나는 온몸을 얽매인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16549657225901.jpg「아. 아……!」

  입술을 짓씹고 참으려 애를 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소리가 목을 울렸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던 오 년 전 그 밤처럼. 그가 거칠게 속도를 올렸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부림치는 그녀의 위에 그가 쏟아졌다. 오싹하게 퍼지는 감각. 거친 움직임 속에서 몸을 누르는 손은 거짓말처럼 나긋하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견디기 힘든 쾌락에 질식할 것 같다.

16549657225901.jpg「그만……. 그만……!」

  차라리 끔찍했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집어 삼켜지는 느낌. 벼락같이 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이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16549657225901.jpg「아……! 아!」

  뜨거워. 뜨거워……. 울 것 같은 다정함과 자신을 내던지게 되는 전율에 그녀는 끝내 흐느끼며 호소했다.

16549657225901.jpg「제발……!」

  레이나는 울며 토해낸다.

16549657225901.jpg「제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닌 걸 알고 있잖아요.」

  아무런 말 없이 허리를 쳐올리던 아서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차갑고도 상냥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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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57225895.jpg「날 속였어?」

16549657225901.jpg“!”

레이나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16549657225901.jpg“헉……. 헉…….”

낯설도록 포근한 침대. 척척하게 젖은 몸에 무거운 이불이 감겨들었다.

16549657225901.jpg“…….”

옆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레이나는 숨소리를 죽이며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 돼……. 소리 내지 마.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16549657225901.jpg“…….”

조마조마한 가슴을 내리누르며, 레이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한참 울고 난 것처럼 목이 메었다. 허탈하고 공허했다. 두려우면서도 슬펐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레이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이내 떨림이 잦아들고, 일말의 흔들림조차 사라진 침대 위에서 레이나는 아서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16549657225895.jpg“…….”

그의 숨소리는 고요했다.

16549657225901.jpg‘조용히 자는구나…….’

레이나는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옆으로 시선을 옮겨, 가만히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16549657225895.jpg“…….”

그의 콧대와 속눈썹에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16549657225895.jpg“…….”

레이나는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기 두려워 차마 바라보지 못했던 모습을, 비로소 그가 잠든 후에야 눈 속에 담듯이.

16549657225895.jpg“…….”

레이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16549657225901.jpg‘……당신은 어떻게 지냈어요?’

16549657225895.jpg“…….”

레이나는 조용히 마음속 말을 이어갔다.

16549657225901.jpg‘나는 사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하녀 생활이라는 게 그러니까요.’

16549657225895.jpg“…….”

특히 지난 한 달은 무척 바빴어요. 당신이 돌아온다고 해서 주인마님이 우릴 무척이나 달달 볶았거든요.

16549657225895.jpg“…….”

오 년 동안 똑같이 평범한 하녀로 바쁘게 지냈고, 가끔 집에 가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냈어요. 저는 원래 가끔씩만 집에 가거든요…….

16549657225895.jpg“…….”

가끔 당신 소식이 담긴 소식지를 사 모았어요. ……사실 가끔은 아니고, 무척 열심히 사 모았어요. 사원에 꾸준히 기부해서 사원 소식지도 놓치지 않고 받아다 보구요, 후작님이 보고 버린 소식지가 있으면 얻으려고 그 방은 항상 제가 나서서 청소했어요. 줄 서야 하는데 늦는 바람에 똑 떨어져서 못 구한 소식지들은 광장 쓰레기통 뒤져서 찾아내기도 하고. 구하기 힘든 소식지들은 발품 팔아서 구하기도 하고. 웃돈 줘가며 구하기도 하고……. 가끔 못 보던 귀한 소식지를 가진 사람을 보면, 옆에서 다 보길 기다렸다가 말을 걸기도 하고……. 그래서 저, 꽤 귀한 소식지도 많아요.

16549657225895.jpg“…….”

……다른 뜻은 없어요. 먼 세상에 훨훨 날아가서 잘되고 있다니까 괜히 뿌듯하더라구요. 하지만 당신, 힘들었겠죠? 위험한 곳에 다녀왔으니까요…….

16549657225895.jpg“…….”

당신은 어땠어요? 당신은…… 어떻게 지냈어요?

16549657225895.jpg“…….”

레이나는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천정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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