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레이나에 대해 묻는 남자들2021.10.17.
영문도 모르고 마리나에게 혼쭐이 난 테일러는 머리 위에 물음표만 가득 띄운 채 쫓겨났다. 꽤나 많은 사용인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줄리어스 저택 내 최고 인기남의 눈치 없음에 애도를 표했다. 한편 레이나의 행방을 묻는 질문들을 받고 받고 또 받은 하녀들은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테일러 로렌슨, 황실 귀빈 렘브란트 경의 수행원, 진짜 그냥 레이나가 왜 안 보이는지 궁금한 하인들까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레이나의 행방을 찾았다.
“…….”
그리고 가장 늦은 발걸음을 한 트리스탄이 같은 질문에 이골이 난 하녀들에게 접근하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레이나인가요? 오늘만 벌써 몇 명째야. 대단하다, 정말.”
저희들끼리 마주 보고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하녀들의 반응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트리스탄은 어리둥절해 눈앞의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말고도 ‘레이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하녀들이 어딘지 짓궂은 빛으로 그를 보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레이나한테 줄 서시려면 꽤나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아, 아니.”
트리스탄은 그녀들의 말에 담긴 뉘앙스에 불쾌하여 정색하고 손을 들어 부정했다.
“그런 뜻의 관심이 있어 묻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저는 기혼이고요. 그냥 그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게 궁금한 것뿐입니다. 나이나 평판이나 가족, 뭐 그런…….”
“경.”
하녀는 픽 웃었다.
“저희는 저택 내부의 사람에 대한 정보를 팔지 않아요. 아마 오신 지 얼마 안 되셨고 잘 모르셔서 물어보신 걸 테니 경의 무례를 탓하진 않을게요.”
“!”
트리스탄이 말을 멈추며 멈칫했다. 하녀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는 ‘줄리어스’의 사용인들이에요. 무거운 입과 높은 전문성을 대가로 높은 급료를 받죠.”
그들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급료를 받는 하인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왠지 반발심에 울컥하여 꾹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서 경의 최측근 기사인데도 정보를 파는 게 됩니까? 아시다시피 아서 경은 이 후작가를 이어받을 사람인데요. 예비 가족 아닙니까.”
하녀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가, 놀랍게도 그가 귀엽다는 듯이 씩 웃었다. 트리스탄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하녀가 말했다.
“경. 주제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하나 충고할게요.”
“……네. 듣겠습니다.”
“저라면 아서 경의 명령으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걸 티 내지 않을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아서 경은 후작가를 이어받으실 분이시고, 트리스탄 경은 곧 저희와 같은 교육을 받게 되실 예비 가족이시니 미리 알려 드리는 거예요.”
“!”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혹한 트리스탄은 확 얼굴을 붉혔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하녀는 프로다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너그럽게 답해 주었다.
“뭐. 레이나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남자의 수가 오늘만 세 손가락을 넘어가고 있다는 건 말씀드려도 될 것 같네요. 예비 가족이시니까.”
* * * 일개 사용인에 대한 정보 수집이라고 일을 만만하게 봤던 마음을 다잡으며, 트리스탄은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가족을 만나고 드디어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한 탓이었을까. 마음이 해이해졌나 보다. 허술한 멍청이처럼 굴고 말았다. 저택의 일을 얕보다니. 이곳은 아서에게 또 다른 전장일 텐데.
“…….”
처음부터 다시 접근해야겠다. 레이나. 그리고 테일러 로렌슨…….
“실례합니다. ‘레이나’가 혹시 일을 그만두었습니까?”
반성하며 걸어가고 있던 트리스탄은 찾던 이름이 들려오자 기둥 뒤에서 딱 멈추었다.
“아뇨. 아직 일하고 있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렘브란트의 수행원, 프랜시스는 조금 곤란한 듯이 미소 지었다.
“레이나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요.”
“아, 편지요. 제가 전해드릴게요.”
하인이 선뜻 손을 내밀자 프랜시스는 짐짓 미소를 지으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음……. 떠나기 전에 직접 전하고 싶어서요. 원래 여기서 청소 일을 하지 않았나요? 왜 안 보이죠?”
하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 원래는 그런데…… 레이나는 며칠 전에 아가씨의 몸종으로 불려갔거든요. 아가씨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쩌죠.”
트리스탄은 기척을 감추고 몸을 숨겼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였다. 트리스탄은 내심 행운에 감사하면서도 놀랐다. ‘레이나’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다더니, 정말이잖아? 그는 기둥 뒤에 숨은 채 빠르게 질문자의 옷차림과 얼굴을 훑었다. 남자의 겉옷에 들어가 있는 특유의 비단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황실 소속?’
최근까지 황태자의 군대와 함께했기에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황실 소속으로 일하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양. 사용 범위와 패턴을 보니 지위는 중상급 정도. 젠트리*. 최소한 준귀족. 평민은 아니다. 높은 귀족의 측근이거나 수행원인가?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몸종이요? 사실 저도 그건 알고 있었는데, 개선식에선 안 보이던데요. 몸종으론 다른 하녀들이 붙어 있지 않았나요?”
“아, 그랬나요? 글쎄요. 전 못 봐서……. 그렇다면 아가씨 개인 심부름을 갔을 수도 있겠네요. 몸종이 늘 한 명은 아니니까요. 먼저 붙어 있던 몸종이 아가씨 개인 심부름을 하느라 자리를 비우면 다른 몸종들이 다시 붙는 일은 흔합니다.”
“그렇군요. 음……. 혹시 레이나는 통근을 하나요? 아니면 여기서 숙식을 하나요? 갑자기 찾아가면 폐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으니 실례를 저지르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 해서…….”
“아, 레이나는……. 음, 원래 이런 얘기 막 안 해드리는데. 프랜시스 님이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미 친분과 신뢰가 있는 사이인지, 자신에게는 해 주지 않던 이야기가 술술 나오고 있었다. * * *
“네……? 파견? 이렇게 갑자기요?”
방으로 돌아온 테일러 로렌슨은 아버지 앨빈 로렌슨이 전달한 갑작스러운 명령에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그래. 이제 너도 슬슬 밥값을 해야지. 후작가에서 네게 주는 첫 공식 임무다. 긴장할 거 없어. 그냥 노인 하나 진료하는 일이니까. 간병인도 따로 붙어 있을 거다.”
노인 한 명 진료? 간병인까지 딸려 있다고? 앨빈 로렌슨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은 나랑 같이 갈 거다. 난 너 두고 먼저 돌아 올 거고, 넌 거기서 숙식하면서 환자 돌보면 된다. 그리 힘들진 않을 게야. 환자 상태 꼼꼼히 살피고, 진료 보고. 후작가로 돌아와서 보고하면 된다. 일단 짐부터 싸거라.”
숙식까지 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이라고? 후작가가 직접 의사를 보내서 돌봐 주는 환자에 간병인까지 있다니, 그런 중요한 환자라면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 뭔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의사로서의 테스트인가? 테일러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얼마 동안요?”
줄리어스 일가가 명령했다면 선택권은 없는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레이나가 신경 쓰이는 마당에 저택을 떠나 있게 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앨빈 로렌슨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답했다.
“그건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일단 일주일.”
테일러는 놀랐다.
“일주일? 그렇게 길게요?”
심지어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냥 노인 하나라면서 후작가가 직접 간병인을 보내주고 상주 의사까지 파견한다니. 무슨 일이지? 어쨌든 테일러도 짐을 싸기 시작하며 물었다.
“어떤 분이시길래 후작가에 고용된 주치의가 일주일씩이나 숙식하면서 진료를 봐요?”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아니라 나라고?
“네놈은 아직 주치의 아니다. ……어떤 하녀 애의 할머니인데. 사정이 있어서 후작가에서 특별히 후의를 베풀어 주시기로 하셨다.”
“누구네 할머닌데요?”
앨빈 로렌슨은 짧은 틈을 두고 말했다.
“레이나 아스타린이라는 애. 여기부턴 기밀이다.”
“…….”
가방 속에 차 있던 소식지를 한 손에 가득 잡아 빼내던 테일러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네?”
* * * 레이나가 후작 부인에게 불려가 잡혀 있던 사이. 트리스탄은 아서를 찾았다. 그는 레이나에 대해 그사이에 알게 된 짧은 정보를 전해 주었다. 오늘만 ‘레이나’를 찾는 남자가 세 명이 넘어, 하녀들이 당신도 레이나를 찾느냐며 넌더리를 내고 있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많은 남자들과 관계가 있는 건지 그녀를 찾고 있는 남자들이 많았고 개중 하나는 직접 목격했다며. 그는 이곳에 머문 지 겨우 2주 된, 황실 귀빈 렘브란트 경의 수행원인 것을 확인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위험한 남성 편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계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담담하게 들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잘도 홀려 놓은 것을 보니 순진한 얼굴로 사실은 꽤나 무서운 요부일지도 모르겠다고, 조심하시라는 말이 덧붙었다. * * *
끼익. 신방의 문이 열렸다.
“……아서 경.”
막 찻잔에 차를 따르려던 아서가 눈동자만 돌아보며 싱긋 웃고는 마저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잘 안심시켜 드리고 왔소?”
“……네. 고맙습니다.”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아서가 시가에 불을 붙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그런데 그대는 오 년 만에 다시 만난 남편을 이틀 내내 ‘아서 경’이라 부르는군.”
레이나는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
아서가 그녀를 향해 미소하고는 찻잔을 레이나 쪽으로 밀어주었다.
“더 나은 호칭이 있을 텐데.”
“…….”
레이나는 머뭇거리듯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서.”
“…….”
아서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앉아요. 오랜만의 재회인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야지.”
“…….”
레이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아서 근처에서 담배 연기가 떠돌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
레이나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담담하게 다시 권했다.
“앉아요.”
“…….”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자리에 앉은 레이나는 초조한 손놀림으로 치맛자락을 가다듬었다. 내가 후작 부인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든 그에게 좋은 이야기일 리 없을 것을 짐작할 텐데. 그의 변함없는 다정함은 레이나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지냈소? 오 년 동안.”
――――― *젠트리: 귀족 가문의 사람. 넓은 의미에선 작위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고, 보통은 귀족의 자제이면서 작위가 없는 차남 이하를 가리킨다. 귀족의 문장을 사용하며, 사회의 지배계층이다. 하급 귀족이나 귀족 아래의 부유한 중소 지주, 지방의 유력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