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게 혼인이었던 건 나뿐이었다2021.10.14.
“네가 사람에게 쉽사리 곁을 주는 애가 아닌데. 테일러 로렌슨은 예외라고 들었다.”
후작 부인의 목소리에 레이나가 흠칫했다. 레이나는 후작가와 관련된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있었지만, 테일러 로렌슨만은 예외였다. 그건 그가 의사이기 때문이었다. 아픈 할머니에 대해 조금이나마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 마님.”
레이나는 혹시라도 비밀을 지키지 않고 입을 놀렸냐는 의심을 받을까 반사적으로 변명부터 하려고 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손을 들어 레이나의 말을 막았다.
“탓하는 게 아니다. 넌 선을 넘지 않는 아이니, 어련히 네가 지혜롭게 했겠지. 앞으로는 테일러 로렌슨까지는 허락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로렌슨 선생도 어느 정도 알게 된 마당이고.”
레이나는 숨소리를 죽였다. 후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오죽 애가 탔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더구나. 앞으론 자주 테일러를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 주마.”
후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정식으로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레이나는 가슴이 떨려 치맛자락 위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의사. 너무 간절하지만, 레이나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조치였다. 의사가 곁에서 매일 할머니를 돌봐 준다고? 그럴 수만 있다면 할머니의 완전한 회복도 꿈이 아닐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그간 속앓이만 하고 못 한 말이 많은 것 같던데.”
후작 부인의 말마따나 그동안 테일러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지만, 5년 전 화재 이후, 레이나의 할머니는 온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작가에서 보내주는 간병인이 할머니를 계속 돌보아 주고 있긴 했지만……. 할머니는 점점 레이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빈도가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등의 상처도 가끔 염증이 도지며 할머니를 열에 시달리게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아픈 이야기도, 줄리어스 후작가에서 할머니를 돌보아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후작가와 레이나가 공유하는 비밀과 관련이 있어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정식으로 의사를 허락해 준다니. 그것도, 후작가의 의사를……. 레이나의 능력으로는 어디서도 받을 수 없을 조건이었다. 로렌슨 선생님을 제외하면 테일러는 레이나가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할머니의 병환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도 허락된 정보는 아니어서, 레이나가 그에게 하는 질문은 화상이나 염증, 열, 기억 장애에 대해 아주 조금씩만 남의 이야기인 양 스치듯 물어보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가 후작가의 눈치를 보며 레이나가 시도할 수 있는 한계였다.
“…….”
후작 부인에게 로렌슨 선생님을 부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크게 편찮으시니?」
「당장 위독하거나 심하게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후작가의 주치의를?」
「너에게만 계속 그런 과한 친절을 베풀면 로렌슨 선생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수상하게 보일 수 있어서 곤란할 것 같구나.」
「내가 지금도 네 할머니에 대해선 충분히 챙겨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니?」
레이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작가에서 붙여준 간병인도 사실 레이나의 형편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사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 후작가에 그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할머니의 병은 하루 이틀 진료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레이나도 알고 있었다. 레이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후작가에서 할머니를 돌보아 주는 동안 최대한 목돈을 마련하여 레이나 자신이 직접 할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턴 할머니 곁에 의사가 상주할 것이다, 할머니를 정식으로 돌봐 주겠다니. 레이나로서는 독립을 포기하고 후작가에 뼈를 묻을지를 고민하게 할 정도의 제안이었다. 테일러라면 레이나도 할머니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친구로서도.
“…….”
후작 부인은 레이나가 어떤 마음일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
후작 부인이 이미 예상하고 있듯이 레이나는 이 제안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레이나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체념하는 듯한 수용은 익숙하여 언제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후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나.”
그래서 우리가 널 살려 두는 거지. 후작 부인의 입매에 만족감이 어렸다. 부인은 우아하게 숄을 고쳐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서의 곁에 머물면서 그놈을 관찰해.”
여유로운 목소리가 나긋하게 레이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아서의 약점이 될만한 걸 찾아내서 가져와.”
레이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명령을 들었다. 입에는 역하고 씁쓸한 검붉은 물의 기운이 진득하니 남아 있었다. 사탕에서 나오는 단맛은 그 쓴맛을 덮지 못한 채 겉돌았다. * * *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렇군. 내 약점 말이지.’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아서는 펼쳐 두었던 오러를 거두었다. 예민하게 날을 세운 감각이 잦아들며, 소란하던 세상이 고요해졌다.
“…….”
레이나. 아서는 처음으로 듣게 된 그녀의 진짜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레이나.
“…….”
아서는 턱을 괴며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테일러 로렌슨…… 이라. 주치의의 아들이라고. 아서는 시가 끝에 매달린 담뱃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남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이상했다. 정혼자도, 연인도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혼인이었던 건 나뿐이었다. 그쪽에겐 혼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우고 싶은 기억일 수 있었다. 이렇게 끌려 나올 거라고는 본인도 예상 못 했을 터.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
그녀를 안고 침대로 데려가자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다가 눈물을 터뜨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계속 자신의 눈을 피하던 것도.
“…….”
허공으로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갔다. 담뱃불이 시가를 거의 다 태워 가고 있었다.
“트리스탄.”
“네. 각하.”
영지의 가족들과 오 년 만에 재회하고 돌아온 보좌관이 그의 앞에 다시 와 섰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가족은 잘 만나고 왔어?”
“네.”
무뚝뚝하긴.
“더 길게 다시.”
아서의 요구에 트리스탄은 짧게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20대였던 와이프는 30대가 됐고 애는 다섯 살이 됐습니다. 다 건강합니다. 제가 이번에 남작위 받는다니까 내심 들떠서 기대하고 있는 눈치고요. 딱히 바람난 것 같진 않습니다.”
트리스탄은 머쓱한 얼굴을 감추려고 부러 뚱한 얼굴을 했고, 아서는 웃었다. 다행이네. 오 년 만에 재회한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그런 식으로 요약하는 마음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가족사 복잡한 아서의 앞에서 마냥 행복한 이야기를 하기가 불편한 것이겠지. 내내 그의 존재를 부정하던 아버지로부턴 이용당하고. 이복형제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는 계모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고. 사기 결혼까지 당한 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일 터. 트리스탄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제 가족에 대해서는 배려하셔야 할 별일 없으니 뭐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민망한 건지, 트리스탄은 그리 말했다. 아서는 고맙게 받아들이며 웃었다.
“그래, 나도 행복한 얘기 마음껏 할게.”
“……저만 행복해서 죄송합니다.”
“나도 행복한데?”
“……속도 좋으시네요.”
아서는 웃으며 자세를 고치고 담배를 껐다.
“부인은 한동안 곁에 둘 거야. 자네도 극진한 예를 다해줘.”
‘부인’에 대한 아서의 결론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지 살짝 눈썹에 그게 드러났지만, 트리스탄은 이의 없이 명령을 받아들이며 확인했다.
“네. ‘극진히’요.”
“그래.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격에 맞춰서.”
“알겠습니다.”
재떨이에서 시선을 거둔 아서는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레이나’라는 이름에 대해 알아봐.”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트리스탄은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쉽게 눈치챘다. 가짜 신부의 본명인가 보구나.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테일러 로렌슨’에 대해서도.”
……그건 무슨 이름이지? 뭐, 알아보면 나올 터였다. 트리스탄은 “네.” 하고 명령을 받들었다. 아서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방 안에는 갇힌 담배 연기가 흐르고, 창밖에선 버썩 마른 단풍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 * * 그 즈음하여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렘브란트 역시 자신의 수행원 프랜시스에게 같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레이나 아스타린’에 대해 알아봐 줘요. 내가 알아보는 거라는 걸 드러내지 말고 당신의 개인적 호기심으로 처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대충 미인이라 관심 가진 척하면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의외로 프랜시스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금발 하녀 아가씨요?”
이미 그녀를 아는 듯한 수행원의 반응에 렘브란트는 조금의 놀라움을 담아 물었다.
“아는군요?”
수행원 프랜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요. 이 저택의 금발 미녀로 유명한 사람이 ‘레이디 크리스티나’뿐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라고 우리끼리 말이 많았는데요.”
가볍게 웃으며 농담 같은 소리가 덧붙었다.
“우리 사이에선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가치가 떨어질까 봐 줄리어스가 그 아가씨 소문 안 나게 하인들 입단속 꽤나 시켰을 거라는 게 정설입니다.”
렘브란트가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로 미인이라 관심 있었어요?”
프랜시스가 눈썹을 으쓱하며 웃었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조사는 미인이라 관심 있는 걸로 하고 진행하죠.”
“본의 아니게 중매 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렇게 되면 한잔 사겠습니다.”
렘브란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실의 의견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레이나 아스타린에 대해 알아보길 원하는 사람이 또 하나. 후작 저택에 돌아와 자신에게 주어진 의사로서의 업무를 마친 테일러 로렌슨도 슬슬 그녀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 가신 거지?’
그는 아버지가 지시해 둔 대로 가져온 약재들을 정리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나는 오늘도 안 보이네.’
테일러는 레이나가 평소에 일하는 동선을 따라 움직여 보다가, 지난번에 그녀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하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마리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테일러가 손을 흔들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달려오자 마리나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며 달아올랐다.
“……테일러.”
활짝 웃으며 테일러가 물었다.
“레이나는 아직 아가씨 몸종으로 있는 거야?”
“…….”
눈치 없이 해맑은 남자의 질문에 마리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응?”
이내 예견된 벼락이 떨어졌다.
“야!”
마리나의 고함에 얼이 빠진 테일러가 흠칫 몸을 움츠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리나는 씩씩거리며 테일러를 노려보았다. 아가씨 몸종 같은 소리 하네! 니가 좋아하는 그 여자애는 반짝반짝한 드레스 입고 어젯밤부터 내내 다른 남자랑 있거든! 그것도 지금 제국에서 제일 핫한 남자랑! 아가씨 자리를 꿰차고 떡하니 같은 침대 쓰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