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쪽에겐 혼인이 아니었다2021.10.10.
“…….”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알고 있는 거 맞아? 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거…….
“…….”
레이나가 그에 관해 들은 말은 아서가 눈치챈 것 같다는 말. 그리고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본 아서가 ‘내 아내가 아니다.’ 했다던 말뿐이었다. 아, 하나 더 있구나. 그가 화가 난 것 같으니 너는 잠깐 이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에 쓰일 뿐이라는 말. 레이나는 다리를 모아 안은 채 소심하게 무릎에 입술을 갖다 댔다.
「아서 앞에선 철저히 크리스티나로 있어라.」
「하녀인 거 알고 있으니 편하게 있어도 된다거나, 다 알고 있다며 대답을 유도한다 해도 잡아떼. 빌미를 주지 마.」
「어차피 아서도 네가 대답하지 않을 건 예상하고 있을 테니까.」
「실수로라도 하녀라는 걸 드러내는 말을 하지 않게 조심하고.」
「저택 안에 눈과 귀가 많다는 걸 명심해라.」
「무심결에 지껄인 말이 우리 발목을 잡지 않도록, 유도 신문에 넘어가지 마라.」
“…….”
모르겠다. 오히려 잡아떼고 있는 건 아서 경인 것 같고, 묻고 싶은 건 나였다. 나는 당신 아내가 아니잖아요. 왜 모르는 것처럼 굴어요? 왜 나를 옆에 두는 거예요?
“…….”
이 모든 게 전부 유도 신문을 위한 거라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일 거야. 아서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합니까.”
“……당신 생각요.”
“…….”
무심결에 솔직하게 대답한 뒤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이서만 있고 싶댔다가. 다정하게 행동하려니 울어 버렸다가. 이젠 당신 생각을 한다니. 미친 건가. 아서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홀로 피식 웃었다.
“…….”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숨이 멎을 정도로 근사했다. 완벽한 그림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랑 은회색 눈동자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나. 그냥 조각상 같아.
아서가 눈동자만 움직여 레이나를 보았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곧바로 눈을 피해 버렸다.
“…….”
몇 번이나 그러는 게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서 안 그러고 싶은데도, 너무 잘생겨서 마주보기 무서운 얼굴이었다. 저 사람이 보고 있으면 숨을 못 쉬겠어.
“…….”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여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밖을 향한 대답이 나가기도 전이었다. 레이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작 부인!’
레이나는 물건이라도 훔치다 들킨 것처럼 후다닥 일어나 황급히 치마를 털고 섰다.
“마……어머니.”
마님이라는 소리가 튀어나갈 뻔했지만 간신히 어머니로 고쳤다. 주인어른 앞에서 밀회를 발각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부인이 얼마나 엄격하게 이 침대를 꾸미고 공을 들였는지 레이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하녀가 들어가 앉아 있으라고 그런 건 아니었을 터다. 후작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나를 보고 있다가 미소 지었다.
“크리스티나.”
다음 순간 스륵 아서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
아서가 레이나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레이나의 손목을 잡아 나긋하게 제 뒤로 당겼다. 당황한 레이나는 약간 헤매는 걸음으로 그의 뒤로 끌려갔다.
“후작 부인.”
뒤에서 아서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이 부부의 공용 침실인지, 아니면 저의 개인 침실이거나, 아내의 개인 침실인지는 안내받지 못했습니다만.”
아서가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든 부부가 안심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곳이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습니까?”
레이나는 당혹해서 아서의 뒤통수와 그 너머 후작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가만히 레이나와 아서를 함께 바라보고 있던 후작 부인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미안합니다. 이제 이러면 안 되는데. 언제나 이렇게 딸아이 방에 들어왔어서 실수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어요.”
“…….”
뜻밖에 부인은 선선히 사과했다. 레이나는 내심 충격을 받아 후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딸아이가 아프다는 소리에 놀라서 함께 있을 아서 경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례를 범했어요.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
마님이 저렇게 온화하게도 말할 줄 아는 분이었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감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후작 부인의 입에서 뻔뻔하게 ‘딸아이’ 소리가 나올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이래도 되는 거야? 당장에라도 싸늘하게 돌변한 아서 경의 비웃음을 살 것 같은데…….
“……!”
다음 순간 후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레이나는 흠칫하며 살모사 앞의 토끼처럼 얼어붙었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떨었다. 그녀가 레이나에게 당장 어떤 행동을 하기를 명령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작 부인이 원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이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어라도 말해야 했다. 지금 당장.
“거……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아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후작 부인은 몹시도 걱정스러운 투로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로렌슨 선생에게 들었다. 괜찮니?”
레이나는 굳은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그냥, 찬바람 맞으면서 오래 서 있었던 게 피곤했나 봐요.”
후작 부인은 근심스레 레이나를 살폈다. 레이나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검사에 응했다. 아마도 그것을 검사하는 것일 터였다. 부적절한 일은 없었는가 하는 것. 눈으로 본다고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나는 차라리 그것이 후작 부인의 눈에 보이기를 바랐다. 후작 부인은 사뭇 레이나를 염려하는 듯이 바라보다가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몸이 약해서 어쩌니.”
이후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레이나는 떠듬떠듬,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릴 수 있도록 잠깐 따로 이야기 나눠도 되겠냐고 아서에게 물었다.
“…….”
아서는 그녀를 보내주었다.
“다녀오시오, 부인.”
입매만 무감하게 올리는 건조한 미소와 함께. 자연스럽게, 잡혔던 손이 놓였다. 둘만 있을 땐 도망치고 싶었는데. 막상 놓여나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 * *
“잘했다, 레이나.”
후작 부인의 첫마디에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안도했다. 솔직히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는데……. 그래도 아가씨 침실을 쓴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알아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후작 부인의 말에 레이나는 다시 마음이 철렁했다.
“잘해 주는 걸 보니 좀 더 너를 그 자리에 두어도 괜찮을 것 같구나.”
레이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네?”
뭘 더……. 싫어, 빨리 빼내 줘요. 소파에 앉아 부채를 펼치며 후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아직 아서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고 있다. 한동안 우리 약점이라도 쥐고 있는 양 널 곁에 두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유치하긴 하지만, 뭐. 어차피 우리도 그에게 보상으로 줄 걸 준비하는 중이니까. 잠시 여유를 두어도 좋겠지. 조금만 더 부탁하마.”
후작 부인이 냉랭한 눈빛으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하녀 애 앞에서 초조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것은 후작 부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도 네가 눈치 빠른 아이라 다행이야. 쓸모없는 아이였다면 난감했을 텐데, 그나마 너라서 듬직하구나.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
무슨 뜻이지? 진심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공치사를 들으며 두려움 속에 망연히 부인을 바라보는 레이나를, 후작 부인은 짧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달그락. 어느새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쟁반에 찻잔 하나를 받쳐 들고 다가와 있었다.
“마시렴.”
후작 부인이 말했다. 레이나는 살짝 얼어붙은 채 그 정체 모를 찻잔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붉은빛이 도는 시커먼 물이 담긴 찻잔이었다.
“이게…… 뭔가요?”
후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서 주는 약이다.”
부인이 손수 쟁반에서 찻잔을 들어 레이나에게 건네주었다.
“너의 꿈을 지켜줄 거다.”
“…….”
레이나는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그게 무슨 약인지 깨달았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게 하는 약이구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레이나도 하녀들 사이에서 ‘아이 떼는 검붉은 물’의 이야기가 떠도는 걸 들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마시고 불임이 되거나 병을 얻은 하녀가 허다할 정도로 몸에 좋지 않은 약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레이나는 아서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부인이 주는 독배를 받아 들었다.
“…….”
아서 경이랑 자지 않았다고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 그런 말로 약을 마시는 걸 피하려 든다면 오히려 아서 경이랑 어떻게든 엮여 보려는 걸로 보일 거야. 솔직히 잤든 자지 않았든, 부인으로선 보험 삼아 이런 약을 먹이지 않을 이유가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예방 차원이라고 하시면 할 말도 없었다. 부인에겐 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
왜 지금 그 생각이 나는지……. 레이나는 두 손으로 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약은 역하고 썼다.
“……콜록.”
다 삼키고 나니 작게 기침이 나왔다. 레이나가 약을 모두 마시는 걸 보고, 허스트 부인이 사탕을 하나 건네주었다. 레이나는 두 손으로 받아들고 “감사합니다.” 하며 그것까지 순순히 입에 넣었다. 마님의 명령이 이어졌다.
“외출은 최대한 자제하고, 특히 ‘렘브란트 경’ 앞에 나서는 일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피해라. 저택에 머물고 있는 황실 귀빈, 알지? 그 사람한테 얼굴을 보이면 일이 복잡해진다. 적당히 몸이 좋지 않다거나, 남편 외의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렴.”
“네, 마님.”
후작 부인이 짧게 틈을 두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여기서 더 뭘……?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후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그 일을 실수 없이 잘 해낸다면 주급의 열 배를 챙겨주마.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 매주.”
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열 배? 그런 임금이 가능한 거였어? 그 돈이면…….
“…….”
레이나는 순간 갈등했지만, 이내 포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지금도 위험한데. 여기서 저 정도의 대가를 제시하고 요구할 만한 일이라면 굉장히 위험한 일일 터였다. 그런 돈이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았다. 레이나에게는 무엇보다 할머니에게 무사히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했다. 레이나는 가엾고도 간절한 표정으로 눈썹을 꺾으며, ‘저는 두렵고 부족하여, 감히 그런 막중한 직책을 떠맡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미리 표현하려고 했다.
“마님…….”
하지만 후작 부인은 레이나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였다.
“네 집에 테일러를 보내주겠다. 테일러 로렌슨, 주치의 로렌슨 선생의 아들 말이야.”
“…….”
레이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멈칫했다. 테일러 로렌슨. 로렌슨 선생님과 함께 후작가에 상주하는, 주치의 선생님의 아들이자 후작가의 두 번째 의사였다.
「테일러, 그 애도 나이에 비해 꽤 실력이 괜찮아요. 로렌슨 선생님이 은퇴하시면 줄리어스 일가의 주치의가 될 녀석이기도 하니, 실력은 믿을 만하지요.」
‘할머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후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어떠니. 너와 각별한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래저래 꽤 마음에 드는 제안 아니니?”
* * * 아서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의자에 기댄 채 손가락 끝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팔을 풀고 손을 책상 위로 뻗어 시가를 집어 든 아서는 거기에 불을 붙였다. 후 입김을 불어 내자 긴 담배 연기가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군. 남자가 있었을 수 있겠군. 그쪽이야말로 진짜 혼인이 아니었을 테니……. 오러가 일렁였다. 아서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다른 층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아서의 입매에 부드럽게 냉소적인 분위기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