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11/210)

#11.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2021.10.07.

레이나가 더듬거렸다.

16549656337933.png“아서…… 아서 경. 저기…….”

아서는 레이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나는 패닉에 빠졌다. 어떡하지. 어떡해. 그거까지 포함한 대역인 건 안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된 거랑, 이렇게 내가 유혹하듯이 둘이서만 있자고 하고 얘기가 이렇게 된다는 건 다르다. 아가씨가 정말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서워. 내 딴엔 어떻게든 최대한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쓴 건데. 이러면 내가 아서 경을 탐내서 아가씨의 남자를 뺏은 것 같잖아. 어쩌다 보니 아가씨의 신방에 잠깐 발을 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 일 없었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오늘 아침엔 안심했는데.

16549656337933.png“…….”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잠깐만 진정시키면 된다며. 그 사태만 무마하면 된다며. 아서 경도 눈치챈 것 같다며. 왜 아무도 날 데리러 안 와?

16549656337944.png“……이봐.”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히끅. 히끅. 레이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울음을 삼키는 가슴이 숨 쉴 때마다 거세게 일렁이는 걸 숨길 순 없었다.

16549656337944.png“……우는 거야?”

진짜 첫날밤에도 안 울었는데. 이제 와서 울다니. 레이나는 둘이서만 있고 싶다던 거짓말이 너무 뻔해 보일 것 같아서 울음을 참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한심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렸다.

16549656337933.png“…….”

아서가 어색하게 레이나를 안은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등을 달래듯이 토닥였다.

16549656337944.png“왜 울어.”

진심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울릴 줄은 몰랐다. 아서의 손이 어색하게 레이나를 토닥였다.

16549656337944.png“울지 마.”

아무 짓도 안 해.

16549656337966.png

  * * * 【 세기의 커플, 재회하다! 】 【 개선식의 밤 ― 역사상 가장 성대한 대규모 거리 축제가 벌어진 줄리어스 후작령 】 【 혼인 사실이 약혼으로만 알려졌던 이유, 과거 자신의 평판을 고려한 아서 경의 배려인가? 】 【 줄리어스 후작가는 묵묵부답 】

16549656337971.jpg“옛날 자기 평판 때문에 아가씨랑 결혼했다는 걸 비밀로 한 거야?”

16549656337971.jpg“세상에 여기 좀 봐. 전쟁에 나가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비밀로 한 거 아니겠냐는 얘기도 있어……. 아, 너무 속상해. 우리 아가씨한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16549656337971.jpg“예전엔 줄리어스가 손해 보는 혼인이라고 말이 많긴 했지. 황제의 사생아다, 아니다 말이 많았잖아. 황실에서 인정해 주지도 않고 모른척하니 아서 경 평판은 최악이었고…….”

16549656337971.jpg“아무튼 황실도 너무했지. 황실은 아서 경한테 진짜 잘해야 해.”

  【 사상 최초 한밤의 개선식! 아름다운 줄리어스 후작령의 야경 】 【 개선식에서 손을 흔드는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 】 【 아서 경 & 크리스티나 커플, 공주님 안기로 귀가! 신혼부부의 뜨거움 과시! 】 【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손수 품에 안고 환호 속에 저택으로 귀가하는 아서 경 ― 직접 목격 삽화 수록! 】 【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 정략결혼인가, 진짜 로맨스인가!? 】 【 특집, ‘줄리어스 & 아서’ ― 누가 이득을 본 혼인인가? 】

16549656337971.jpg“에이. 그래도 우리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서 경한테 꿀리진 않지. 우리 아가씨가 미모 하나는 사교계에서 최고로 치잖아. 돈도 제국에서 제일 많은 집안이고.”

16549656337971.jpg“언제부터 ‘우리 아가씨’래? 크리스티나 아가씨 까다롭기가 저세상이라고 욕을 욕을 하더니.”

  【 줄리어스, 황실 연구원에 월장석 독점 납품 계약 체결! 】 【 줄리어스, 교착 상태에 있던 사란 해협 조업권 협상 극적 타결! 】 【 줄리어스, 마정석 채굴권 독점 분쟁에서 승소! 】

16549656337971.jpg“흐흐. 없던 애정도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 아서 경 승전 소식 전해지고 줄리어스 후작님이 선제후가 되면서 이 영지 사업은 전부 대 호황이라고. 지금 여기서 사업하는 놈들은 전부 후작님한테 뽀뽀하고 싶을걸?”

16549656337971.jpg“그 정도야?

16549656337971.jpg“말도 마. 다른 영지랑 경쟁입찰 중이던 사업이랑 납품, 전부 줄리어스가 따내고 있다니까? 다들 줄리어스랑 거래를 뚫어 두려고 난리야. 황실이 줄리어스를 파격 대우해 주기 시작한 걸 다들 알아챘다고. 눈치 빠른 놈들은 이미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 들어갔어.”

  【 줄리어스, ‘아서 특수’로 얻은 경제적 이득 단순 환산할 수 없어 】 【 줄리어스, 대 호황! 】 【 특집 ― 아서 & 크리스티나의 개선식 착장 분석 】 【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진주 귀걸이 화제! 】 【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드레스, 주문 폭주! 주문 예약은 라트리아 샵! 】 * * *

16549656337971.jpg“새치기하지 마요! 아이, 참!”

신문사조차 대호황이라는 걸 광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온갖 소식지와 신문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소식지 판매대 앞에 줄을 서서 아서의 이야기가 실린 소식지를 샀다. 특히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공주님 안기 귀가’를 상세히 다룬 소식지들은 진즉 매진이 되어 오후에 추가 발행분이 풀릴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안내까지 붙었다. 품귀 현상은 사원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발행량을 세 배나 늘렸는데도 이미 오전 중에 1차 발행본은 동이 났고, 추가 필사본이 오후 미사 시간에 맞추어 풀린 차라 사람들은 소식지 배부처 앞에서 줄을 서서 기부금을 내고 추가 발행본을 사고 있었다. 사원도 기부금이 평소의 몇 배나 들어와 금빛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필사하는 수도사들의 손목에는 애도를 표할 일이었다.

16549656337971.jpg“뭐야! 추가 발행본 벌써 동났어요?”

줄을 서가면서까지 소식지를 사려던 아가씨가 자기 앞에서 재고가 동나자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마지막 남은 소식지를 거머쥔 사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옆구리엔 오늘 발행한 인기 소식지들이 종류별로 가득했다. 사내가 소식지를 갈무리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아가씨는 아쉬운 듯이 넋을 놓고 그가 들고 있는 소식지들을 바라보다가, 잠깐 그의 가방이 열린 틈새로 인기 삽화가 레이디 세틀다운의 그림이 수록된 희귀 소식지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원래도 삽화가 들어간 소식지들은 더 비싼 가격에 팔리지만, 그중에서도 레이디 세틀다운의 그림이 들어간 소식지는 많이 발행을 하지 않아서 몇 배나 웃돈을 줘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건 추가 발행도 하지 않는 한정판 소식지였다.

16549656337971.jpg“저기요! 실례지만 그 소식지들……!”

꽤나 예쁘장한 아가씨였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매너 있는 미소와 함께 거절했다.

16549656405976.png“미안하지만 안 돼요. 이건 ‘진짜 수집가’한테 팔 거라서요.”

‘팔 거’라는 말에 아가씨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개인 수집용이 아니라 팔 거라면, 제게도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

16549656337971.jpg“얼마면 되나요! 나 돈 많아요! 내가 두 배를 줄게요!”

그러나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사이 사내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16549656337971.jpg“……앗! 어디 가요! 두 배로 준다니까! 세 배도 줄 수 있어요!”

사내, 줄리어스 가의 주치의 앨빈 로렌슨의 아들 테일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 듯이 달려갔다.

16549656405976.png‘누가 돈에 판 댔나? 진짜 수집가한테만 판다니까.’

테일러는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 소식지를 받을 고객님을 생각하며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16549656405976.png“…….”

레이나 아스타린. 그의 고객님. 그 애는 ‘진짜 수집가’다. 반짝 유행한다고 시류에 휩쓸려 잠깐 소식지를 수집하다 어디 처박혔는지도 모르고 잊어버리거나 자기가 모은 걸 버리고 말 애가 아닌, 진짜 수집가. 그 애는 진심으로 소식지를 수집했다. 그게 벌써 삼 년은 넘은 듯했다. 아무렴 귀한 수집품은 정말로 그걸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할 사람한테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테일러의 생각이었다. 유행에 휩쓸리는 사람들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져 정작 소중하게 소식지를 모으던 사람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된다면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 같은 친구가 있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테일러는 씩 미소 지었다. 이 소식지들 받으면 정말로 좋아하겠지? 그는 레이나가 얼마나 그 스크랩북을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모은 걸 남들에게 절대 보여 주지 않아 내용을 본 적은 없지만, 대충 들어 있을 내용은 짐작이 갔다. 소식지를 건네주고 나면 그 자리에서 슥슥 넘겨보다가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가 언제나 정해져 있었으니까. 요즘 소식지들 보며 꽤나 신이 났을 것이다. 어쩔 줄 모르며 소식지를 보고 기뻐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런 거 구해다 주면 절대로 그냥 받는 법이 없으니, 굉장히 쩔쩔매며 곤란한 얼굴로 이거 다 얼마면 되냐고 물어볼 거다. 얼마 정도를 얘기해야 부담 없이 가져가려나. 경제적 부담도 없이, 마음의 부담도 없이. 적당한 금액을 불러야 한다. 테일러는 콧노래를 부르며 줄리어스 후작 저택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레이나는 가만히 있어도 미인이지만, 원하는 소식지를 얻었을 때, 남들한텐 거의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이 나올 때야말로 정말 예뻤다. 그 좋아하는 얼굴을 보는 재미에 실컷 발품을 팔고도 ‘오다 주웠다’를 연기하는 바보 같은 짓을 손에서 못 놓고 있었다.

16549656405976.png“…….”

문득 손에 쥐고 있던 소식지에 실린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삽화를 본 테일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녀들에게 수소문해서 들은 레이나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서 경의 귀환 전날, 레이나가 새벽에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전담 몸종으로 불려갔다는 이야기. 어제오늘 이틀을 내리 레이나가 보이질 않아서 찾아다니다가 다른 하녀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다. ……걱정되네. 그 까탈스러운 아가씨에게 치여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가씨 전담이면 잠깐 빠져나오는 것도 어려울 텐데. 밥이나 제때 먹으며 하고 있나 모르겠다.

16549656405976.png“…….”

……쳇. 테일러는 소식지 속, 아서 경에게 팔자 좋게 안겨 있는 얄미운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레이나는 언제쯤 나올 수 있는 걸까? * * *

16549656406013.jpg

  레이나는 침대에 앉아 남은 울음기로 코를 빨갛게 만든 채 훌쩍거렸다. 아서는 별 표정 없이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저 조용히 레이나가 진정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 레이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끝을 가만 내려다보며 아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16549656337933.png“…….”

화가 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한심스럽거나 황당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난다. 레이나는 침울하게 침묵했다. 아서가 입을 열었다.

16549656337944.png“초야는 의무였지만 그 외에는 아니오.”

16549656337933.png“…….”

16549656337944.png“그러니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16549656337933.png“…….”

그게 문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 진짜 아내가 아니니까. 당신도 알지 않아요?

16549656337933.png“…….”

그는 너무 정중해서 착각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진짜 크리스티나 아가씨’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이나는 슬그머니 눈동자만 굴려 아서를 훔쳐보았다.

16549656337944.png“이제야 봐 주는군.”

아서가 침대 헤드에 기대며 웃었다. 그냥 정면을 본 채로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봐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레이나는 조금 더 오래 아서를 훔쳐볼 수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