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둘만 있고 싶다더니2021.10.03.
마리나가 욕조를 치우고 하인들에게 인계하는 사이, 신방의 호출에 응하러 올라갔던 브로디는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왜 이리 늦었어?”
묻는 말에 브로디가 대답했다.
“로렌슨 선생님 모셔다드리고 오느라고.”
순간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있던 마리나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아가씨 신방에 로렌슨 선생님을 모셔다드렸다고?”
“응. 아서 경이 주치의 불러달래서…….”
말없이 브로디를 바라보는 마리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
“마리나? 표정 왜 그래?”
마리나가 중얼거렸다.
“로렌슨 선생님이 알까?”
“뭘?”
얼빠진 반문에 마리나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리쳤다.
“지금 아서 경 옆에 아내라고 있는 게 아가씨가 아니잖아! 로렌슨 선생님은 당연히 보자마자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 올려 보내도 되는 거냐고!”
“!”
손을 멈춘 브로디가 눈을 크게 뜨며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 * *
내가 요즘 눈이 침침한가? 줄리어스 일가의 주치의 로렌슨은 아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을 한 번 끔뻑이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다음엔 눈을 가늘게 좁혀 떠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번엔 안경을 닦았다. 그리고 눈도 한 번 비볐다. 아가씨가 뭔가 평소랑 달라 보이는데.
“처음 뵙겠소, 주치의 선생.”
옆에서 아서가 주치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아서 경.”
로렌슨은 아가씨에게서 시선을 떼고 얼른 아서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 악수했다. 저절로 만면에 활짝 핀 미소가 걸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줄리어스 일가의 주치의 앨빈 로렌슨입니다. 눈부신 영예 속에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요.”
“고맙소.”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후작가의 가족이시지 않습니까.”
아서는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치의는 감동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감개무량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과분한 사위가 이 줄리어스 가문에 들어오다니. 삼십여 년을 일한 줄리어스 가문에 대하여, 주치의 로렌슨은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충성심이나 존경심이 포함된 애정이냐 하면 그건 아니고. 못난 내 새끼 내가 품어야지 어쩌나 하는 것과 비슷한, 철없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부침이 많았던 가문의 역사를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주치의 로렌슨은 싱글벙글하며 예쁘고 자랑스러운 우리 사위, 아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후작가의 전속 주치의인 그의 임무는 줄리어스 일가족을 보살피는 것이었지만, 줄리어스 일가족이라야 후작 내외와 슬하에 딸 하나, 그리고 멀리 별장에서 사는 후작 대부인이 전부인 단출한 집안인지라 그는 줄리어스 일가족보다 저택의 하인들을 돌보는 일이 더 많았다. 후작님한테 재떨이를 맞은 하녀라든가, 아가씨한테 채찍질을 당한 하인이라든가. 주로 그런 이들이 주치의 로렌슨이 돌보는 환자들이었다. 가문의 전속 주치의는 일반적으로 일가족과 그들의 최측근까지나 보살피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상 후작 내외와 후작 영애, 세 사람만 돌보기엔 전속 주치의는 한가한 자리였기도 했고, 선대부터 가문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시작한 후작 대부인이 주택에 주치의를 상주하게 하며 아픈 하인들도 잘 돌봐 주도록 지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작가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치료해 주며 사용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도 했고, 보수도 따로 줄리어스가 후하게 쳐주었으니 로렌슨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줄리어스의 전속 의사 로렌슨을 포함해 하인, 하녀들이 모두 후한 급여를 받는 이유는 대외적으론 사용인 복지 때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론 비밀 엄수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줄리어스는 아슬아슬하게나마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줄리어스가 사고를 칠 때마다 하녀장 허스트 부인, 집사장 짐과 함께 수습하느라 속을 썩이기야 했지만, 그래도 철없는 아들 고생고생해 키워 놓으니 드디어 떳떳하게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는 걸 보는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었다. 세기의 개선장군이라는 자랑스러운 데릴사위가 아들이 없어 걱정이던 이 가문을 잇게 된 것도, 세기의 커플이라며 온 세상이 미녀 크리스티나와 영웅 아서를 치켜세워 주는 것도 좋았다. 우리 아가씨가 예쁘긴 하지. 성질은 좀 더럽지만. 로렌슨 선생은 흐뭇하게 웃었다. 누가 이 아가씨를 감당할까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런 무인이라면 안심이다. 그 대단한 아가씨라도 이런 남편에겐 함부로 못 할 거고. 게다가 그는 기가 막히게 늠름한 미남이었다. 아가씨와 잘 어울린다. 이 두 분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얼마나 예쁠꼬? 로렌슨 선생의 머릿속에선 이미 그가 돌보게 될 줄리어스 일가의 다음 세대 아이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아서가 말했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에 내가 아내를 좀 무리시킨 것 같아서.”
로렌슨 선생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아무리 의사라지만 이건 아가씨께서 당황하실 수도 있겠는데. 주치의 로렌슨은 일부러 아가씨 쪽을 보지 않고 아서의 말을 들었다. 새벽녘 아서 경이 고생한 아가씨를 손수 품에 안고 뜨거운 밤이 예상되는 분위기로 저택으로 들어가더라는 이야기는 이미 영지 전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있었다. 로렌슨 선생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소문을 전해 듣기만 했던 참이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과장이 섞인 소문일 거라 생각하고 믿을 수 없어 하던 참이었는데 그게 정말이었다니. 얼굴 보자마자 결혼식만 하고 헤어져야 했던 정략혼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튼 괜찮다. 부부 사이가 다정하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밤새 바람이 찼는데 얇은 드레스만 입고 있었거든.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계속 서 있는 것도 힘들었을 거야. 아내는 괜찮다, 그냥 피로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쓰러졌던 게 걱정이 되니 한번 진찰을 부탁하고 싶네.”
아…….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그래, 밤새 개선식을 했다고 했지. 나도 참. 그나저나 아가씨가 갑자기 쓰러졌었다니 로렌슨 선생도 걱정이 되긴 했다. 생전 그런 일은 없던 분인데. 아무튼 아서 경은 배려심도 깊은 분인 것 같으니 흡족했다.
“알겠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이마에 상처가 있는데. 그걸 먼저 한번 봐주면 좋겠군.”
“상처요?”
무슨 상처? 귀족 아가씨의 얼굴에 상처라니? 로렌슨 선생은 깜짝 놀라 아서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황급히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아서가 아가씨의 오른쪽 앞머리를 살짝 손으로 걷어 올리며 이마에 난 상처를 드러내 보였다. 로렌슨 선생은 얼른 다가가 안경을 올려 머리에 걸치며 아서가 가리키는 부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
그리고 다시,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아가씨가 이렇게 생겼던가? 로렌슨 선생은 이마에 올린 안경을 다시 내려썼다. 그리고 다시 올려 썼다.
“?”
분명 낯익긴 한데 뭔가 자주 본 얼굴이 아닌 것 같은…….
“!!!!!”
로렌슨 선생은 순간 숨을 헉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이 애는……! 로렌슨 선생은 경악했다. ‘아가씨’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오 년 전. 후작님에게 재떨이를 잘못 맞아서 그가 상처를 돌봐 준 적이 있는 하녀.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주치의 로렌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잖아!’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싶었지만. 아서가 보아 달라고 짚은 새로운 상처 옆엔, 오 년 전, 그가 직접 꿰매어 준 초승달 모양의 흉터가 선명했다. * * * 얼굴이 시뻘게진 앨빈 로렌슨은 쿵쿵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로렌슨 선생님,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하인 하녀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란 토끼 눈을 했다. 평소 온화하고 다정하여 저택 사용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너그러운 주치의인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앨빈 로렌슨은 다짜고짜 후작 내외가 있는 집무실 문을 쾅 하고 열어젖혔다.
“주인마님!”
집무실에는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은 후작님과 부채 끝으로 미간을 꾹 누르고 있는 후작 부인. 그리고 언제나처럼 뚱한 얼굴로 선 하녀장 허스트 부인과 이틀 못 본 새 10년은 늙은 듯한 집사장 짐 등이 보였다. 그들의 앞에는 두 하녀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아까 그를 부르러 왔던 하녀였다. 주치의 로렌슨은 다채롭게 개판인 그들의 표정에서 단박에 사태를 파악했다. 다 아는군. 나만 몰랐어!
“앨빈…….”
로렌슨 선생은 집무실 문을 콱 틀어막고는 뒤로 돌아서며 목소리를 낮추어 윽박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가씨는 어디 있어요!”
“…….”
그림처럼 의자에 처박혀 있던 후작이 그대로 입술만 움직여 중얼거렸다.
“제발 아무 말도 말게. 내가 가장 미치겠으니.”
* * *
‘…….’
레이나는 거울을 보며 어색하게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예전에 후작님이 던진 재떨이에 맞았을 때……. 그때도 로렌슨 선생님은 하녀 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친절하셨지만. 아무래도 귀족 아가씨가 받는 처치와 하녀 애가 받는 처치는 다르긴 달랐다. 확실히 훨씬 좋은 약을 꼼꼼히 써주셨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시로 상처에 발라 주라며 바르는 약까지 따로 주고 가셨고. 로렌슨 선생님도 흉터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겠다며, 매일 오시겠다 하셨다. 마치 그것이 대단한 문제라도 된다는 듯이. 잘만 관리하면 흉터가 남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신기했다. 오 년 전 다쳤을 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었으니까. 잘 보이지 않는 자리긴 했지만, 오 년 전에 맞은 상처는 레이나의 이마에 작은 흉터로 남아 있었다.
“…….”
괜찮겠지? 로렌슨 선생님은 입이 무거우시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후작가의 명예는 진작 황천길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
레이나는 분명히 느꼈다. 틀림없이 주치의가 그녀를 알아본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로렌슨 선생은 재빨리 평정을 되찾고 자신을 ‘크리스티나 아가씨’로 정중하게 대하며 단 한 번의 말실수도 하지 않는 침착함과 순발력을 보여 주었다. 아마 지금쯤은 후작님 내외를 찾아가셨을 거고…… 어쩌면 하녀 애들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되셨을 것이다.
“…….”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초조하게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되뇌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할머니한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아서가 이마를 만지던 레이나의 손을 살짝 잡아떼어냈다. 흠칫한 레이나는 손가락에 닿은 달팽이 눈처럼 그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찌글찌글 움츠렸다.
“…….”
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손안에 레이나의 한 손이 남아 있었다. 레이나는 차마 그것도 쳐다볼 엄두가 안 난다는 듯 눈을 옮겨 애매하게 딴 데를 여기저기 쳐다보았다.
“…….”
가만히 그녀를 보던 아서가 피식하더니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둘만 있고 싶다더니.”
잡은 손을 보란 듯이 깍지꼈다.
“……!”
레이나는 거의 반쯤 튀어 올랐다.
“정작 그대 뜻대로 되니 피하는군.”
아서가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겼다. 레이나는 속절없이 그쪽으로 끌려가선 아서의 품에 넘어지듯 떨어졌다.
탄탄한 팔과 넓은 가슴. 훅 코에 스치는 옅은 향기가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