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뭐야? 이 상처는2021.09.30.
렘브란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서 경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줄리어스 후작 영애께서는 일절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시기로 유명하십니다. 그분을 볼 수 있는 곳은 사원뿐이죠.”
아서는 재미있다는 듯 반문했다.
“사원이요?”
“예. 그토록 뵙기 어려운 분인데, 언제나 사원의 승전 기원 미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셨습니다. 사교계 최고의 미인이라는 그분을 보기 위해 사원에 찾아오는 신도가 세 배로 늘었다는 이야기는 근방에서 꽤 유명한 무용담입니다.”
“흠.”
뒤이어 아서의 승리를 위해 오 년 동안 기도한 크리스티나의 정성에 대한 공치사가 이어졌다.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자숙하고 사교계의 모임을 자제하라는 황명을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킨 크리스티나의 남다른 절개에 대한 의례적 칭찬도. 줄리어스 후작 부인은 렘브란트의 말에 조마조마해 하며 아서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종교 행사에 참여한 건 금지된 사교 행사를 대신해 크리스티나의 빼어난 용모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절 교류를 하지 않은 건 천사 같지는 못한 그녀의 성격을 숨기기 위함이었고. 사교 모임을 하지 말고 자숙하라는 황명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킨 건 크리스티나의 혼인에 대해 들어오는 질문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전쟁에 나간 약혼자를 위한 절개로 둔갑한 것까진 계산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아름답고 고고한, 베일에 싸인 크리스티나는 지난 오 년간 사교 모임 없는 사교계의 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손이 귀한 줄리어스 일가의 외동딸로서 막대한 지참금과 유산까지 약속되어 있으니 가히 세기의 신부라 할 만했다.
‘아서가 죽으면 좋은 혼처에 다시 보내려고 관리한 평판이었는데…….’
이젠 다 소용없어졌지만. 크리스티나를 최고의 레이디라 치켜세워 주는 말들 사이에서 렘브란트는 아서의 표정을 살폈다. 아서는 예의상 물었을 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저들을 쩔쩔매게 만들어 놓고, 이런 재미있는 상황 앞에서 우쭐댈 법도 한데……. 렘브란트는 자신의 판단을 내색하지 않은 채 시원스레 물었다.
“제가 부인께 인사드릴 영광이 있을까요?”
렘브란트는 현 ‘크리스티나’의 정체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천진하게 덧붙였다.
“사실 후작님께서 두 분의 재회를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고 부탁하셔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거든요. 저는 오늘도 한가합니다.”
후작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반쯤 자리에서 일어날 듯이 몸을 들썩였다. 후작 부인은 자존심도 잊고 눈을 부릅뜬 채 간절한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아서! 거절해!’
아서는 부드럽게 답했다.
“물론이죠. 아내도 기뻐할 겁니다.”
후작과 후작 부인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후작이 급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 하. 내가 크리스티나를 준비시켜야겠군!”
“제가 할게요!”
후작 부인도 다급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아서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아내가 어제 밤새도록 고생을 해서요. 몸이 안 좋을 겁니다. 조만간 기회를 만들어 보지요.”
제 발 저린 나머지 벌떡 일어난 후작 내외의 표정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 *
레이나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 애들한테라도 지금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내가 왜 이 방에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한참이나 불편한 침묵 속에 치장을 당하고 있던 레이나는 어색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저기……. 나는 레이나야.”
레이나의 머리에 향유를 발라 빗겨 주던 검은 머리 하녀가 힐끔 거울 너머로 레이나를 보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 알아. 우리 중에 널 모르는 애가 있을 것 같아?”
레이나는 동료 하녀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밖의 말에 지은 죄라도 있는 듯 흠칫했다.
“날 안다고?”
그야 레이나는 눈에 띄니까. 재수 없어. 검은 머리 하녀는 대놓고 코웃음 쳤지만 통성명 정도는 해 주었다.
“넌 나 모르지? 난 마리나야. 쟤는 브로디.”
반대편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억울한 인상의 하녀, 브로디도 거울 너머로 레이나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레이나로선 혹시라도 바깥에 가짜 신부 건이 알려진 걸까 걱정한 거였지만, 레이나는 원래 은근히 하녀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처음 이 저택에 들어오는 하인 하녀들은 열에 아홉은 레이나를 발견하자마자 ‘쟤는 누구야?’를 묻는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하인 하녀들이 그녀의 이름 다음으로 듣게 되는 말은, ‘걔랑은 못 친해져. 벽 치는 성격이거든.’이었다. 이번엔 웬일로 통성명씩이나 시도한담? 마리나는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주물럭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아가씨 아프다는 거 진짜야?”
“…….”
“너 왜 아가씨 대신 나간 거야?”
“…….”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 하나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들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거짓말에 그리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전혀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질문을 받는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려 적당히 둘러대는 요령과 순발력이 부족했다. 레이나에겐 할머니의 안위가 걸려 있는 문제였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될까 봐 레이나는 하녀 애들에게 벽을 세워 왔던 것인데……. 레이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리나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비웃고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애써 통성명을 시도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들 사이엔 처음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어제 너 갑자기 쓰러졌잖아.”
갑자기 다시 마리나가 입을 열었다. 레이나는 흠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니까 아서 경이 좀 놀란 거 같더니, 갑자기 이렇게 검을 들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한마디로 개선식을 끝냈어. 그리고 널 안고 이리로 바로 올라온 거고.”
레이나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짐작한 것처럼 해 주는 말에 레이나의 얼굴은 미안함과 민망함으로 붉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했는데……. 레이나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 아무도 안 말렸어?”
마리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말려도 되는 거였어?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고.”
“…….”
“아가씨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지.”
“…….”
“우리 무사할 수 있는 거야?”
“…….”
레이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대답하면 너희 더 위험해질걸. 덜컹. 문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놀라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 아서 경!”
깜짝 놀란 두 하녀가 얼른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레이나는 거울 너머로 아서를 발견하고 화장대 앞에 앉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레이나를 발견한 아서가 눈짓했다.
“방해했나?”
“아닙니다, 다 되었습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하녀 애들은 후다닥 손을 움직여 그녀의 치장을 마무리하고는 진짜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대하듯이 레이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필요하시면 여기 종 줄 당겨서 부르세요.”
하녀들은 뒷걸음으로 몸을 물려 사라졌다. 레이나는 뒤늦게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 굉장히 어색하게 그를 마주하고 섰다. 시선 둘 데를 모르고 눈동자가 여기에서 저기로 오락가락했다.
“…….”
“몸은 괜찮소?”
“예? 예…….”
레이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눈을 아주 짧게만 마주했다가 소스라치며 다시 시선을 내려 눈을 피했다.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갑자기 쓰러져서 어디 아픈 줄 알았어.”
레이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아픈 데 없어요. 어젠 그냥…… 그냥 피로가 쌓였나 봐요.”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 상태였다. 아서는 가만히 서서 레이나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빗기며 말했다.
“속옷은…… 미안하오.”
“괘, 괜찮…… 네?”
아서가 찌푸리며 옆을 향해 말했다.
“그게 가끔 아가씨 잡는다는 소리를 도시 괴담처럼 듣긴 했는데. 진짜인 줄은 몰랐소. 그 속옷,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네?”
레이나는 연거푸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서가 입을 다물고 스스로의 머리를 헤집으며 약간의 틈을 두고 말했다.
“안아 들고 올 땐 그나마 괜찮았는데, 눕히니 숨을 안 쉬던데. 그대로 두면 질식사할 것 같았소.”
“…….”
“……드레스를 벗겨도 소용이 없길래 좀 급하게 뜯어냈는데. 그랬더니 망가져서 다시 입힐 수도 없더군.”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아. 그 얘기구나. 그래서 코르셋이 없었구나. 아서 경이…… 그런 거구나.
“…….”
“다른 뜻으로 벗겨 놓은 건 아니오.”
왠지 그가 무척 곤란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망해하는 건가? 레이나가 떠듬떠듬 딴 데를 보며 답했다.
“그, 그러셨어요. 괘,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뭐지……. 겨우 옷을 좀 벗긴 걸 가지고……. 벗겨진 건 난데 그가 민망해한다는 게 이상했다. 설령 다른 뜻으로 벗겨 놓았대도 누가 뭐라고 할까. 이미 결혼도 했겠다, 우리는 처음도 아니고. 나는 어쨌든 그런 일까지 포함해 대역을 맡은 그의 아내다. 그는 가문을 위해 사지로 갔다가 훌륭한 성과를 내고 돌아와 그간의 고생에 보상을 받는 장군이고……. 그런데 다른 뜻으로 그랬다고 오해받기라도 할까 봐 변명을 한다니 그게 더 이상했다. 그가 겨우 그런 걸로 어려워하니 괜히 그게 더 민망해서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
갑자기 아서가 손으로 레이나의 머리통을 잡더니 제 쪽으로 향하도록 고정했다. 피하던 눈이 정면으로 그를 맞닥뜨렸다.
“그것 때문에 눈을 안 마주치는 건가?”
“!”
당황한 레이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그때, 아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
아서가 그녀의 머리를 잡은 손을 이마 쪽으로 조금 움직여 레이나의 앞머리에 감추어진 이마 옆 부분을 만졌다.
“아.”
둔탁한 통증이 스쳤다. 레이나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이 상처는.”
그가 말하는 게 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틀 전, 크리스티나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찢어진 상처였다. 레이나는 살짝 뒤로 몸을 빼 그에게서 물러나며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앞머리를 매만졌다.
“며칠 전에 좀 다쳤어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니. 얼굴인데. 어쩌다 그런 거지?”
“앞머리에 가려지는 위치라 괜찮아요.”
“어쩌다.”
아서는 넘어가지 않고 반복해 물었다. 레이나는 간단히 거짓 핑계를 꾸며대었다.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어요. 밑에 떨어진 빗을 고개 숙여서 줍다가요.”
다행히 적절한 이유가 떠올라 자연스러운 거짓말이 되었다. 아서가 찌푸렸다.
“의사한테 보였소?”
레이나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으며 반문했다.
“네에? 겨우 이런 걸로 의사를…….”
까지 말하다가 레이나는 입을 멈추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였다면 무조건 의사를 불렀을 거다. 귀족 아가씨의 얼굴이니까. 레이나는 얼른 고쳐 말했다.
“불러야죠. 불렀어요. 의사가 이미 한 번 봐 준 거예요.”
아서가 과연 그러하냐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서가 성큼 침대 쪽으로 가더니 종 줄을 당겼다. 잠시 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찾으셨어요?”
“저택에 주치의가 있나?”
“네.”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어……. 의사……?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레이나의 얼굴이 하얘졌다. 잠깐. 주치의 선생님은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알고 올 텐데. 그럼 주치의 선생님까지 알게 되잖아! 레이나는 다급하게 아서의 팔을 잡았다.
“아서, 아서 경. 아니에요, 괜찮아요, 부르지 마세요.”
아서는 자신을 붙든 레이나의 손을 감싸 그대로 소파 쪽으로 인도해 데려가며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
“이마 상처도 보이고 건강에 문제없는지도 다시 한번 체크하지. 피로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떡하지? 의사를 부르지 말아야 하는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태연하게 거짓말해낼 수 있는 한계는 이마를 다친 이유 정도란 말이야.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이유를 댈 수 없으면 내 거짓말은 급격히 어색해진다고. 레이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두,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아서가 우뚝 멈춰 섰다. 아악. 소설에선 이렇게들 하던데. 하지만 너무 어색해. 어떻게 봐도 거짓말 같잖아. 짧게 침묵하던 아서가 피식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한데.”
응? 통했어? 레이나가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였다.
“의사한테 상처 먼저 보이고 나서 그럽시다, 부인.”
아악. 망했다. 역시 핑계가 안 되잖아. 의사가 계속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잠깐 보고 갈 뿐일 텐데 헛소리만 해 버렸다. 아서가 웃음을 참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툭 뱉었다.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 돌아온 것 같네.”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