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녀왔어2021.09.19.
“그 아이가 크리스티나입니다! 사교계 최고의 레이디죠!”
후작 부인은 분노와 당혹감을 참아 내듯 붉어진 얼굴로 식식거리며 숨을 골랐다.
“……보시면 아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불찰이 있었네요. 아무래도 경께서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후작 부인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오랜 세월의 고생과 섭섭함이 경의 눈을 가린 것이겠지요. 서운함이 있을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죠? 다 들어줄 터이니, 일단 성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합시다.”
아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주 가볍게 짓는 표정인데도 보는 이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였다. 후작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움켜쥔 채 애써 턱을 치켜들고 당당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오해가 있다 해도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일 겁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어차피 한배를 탔고, 경께서도 줄리어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릴 건 아니지 않습니까?”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희에게 서운함을 표하기 위해 크리스티나를 곤경에 빠뜨리지 마세요. 결국 그 애가 당신의 방패가 될 겁니다. 경은 지금 자신의 방패에 흠집을 내고 있어요. 그러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이제 평생을 함께할 아내가 아닙니까.”
다시 막사에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습니까.”
비로소 아서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아내를 다시 보지요. 내 눈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
후작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아서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아내가 아니라면 아까처럼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후작 내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아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잘못을 바로잡고 싶다면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만회할 기회’를 원한다면 잘못을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아서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번엔 진짜 내 아내여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일단 그 아가씨가 내 손에 있는 한, 이 일에 대해 침묵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아서는 짧게 뒤편을 향해 턱짓했다.
“대화는 그 후에. 그럼 안녕히.”
간단하기 그지없는 축객령에 후작의 턱이 벌어졌다. * * *
‘틀림없어. 알아챈 거다. 그리고 기분이 상했다고 이 지랄을 하는 거지.’
아서의 주둔지에서 쫓겨난 후작은 이를 갈았다. 뭘 숨기지 말라고? 건방진 놈! 후작 부인이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게 그 애를 진작에 없앴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후작이 퉁명스레 받아쳤다.
“입이 무겁고 무슨 일을 맡겨도 해내니 그만한 인재가 없다며? 그냥 두자던 게 누군데.”
“…….”
후작 부인은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 입을 다물고 눈을 꽉 감았다. 한참을 씨근거리던 후작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없애면?”
후작 부인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걸 시도할 걸 모르겠어요? 진작 없앴다면 모를까, 지금은 오히려 위험해요.”
“…….”
당장 과거 일의 증거를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후작 부인의 마음속에서도 몇 번씩 고개를 쳐들었지만, 이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짓을 시도하다 걸리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끝장이었다. 지금 줄리어스 저택에는 온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기자들도 너무 많이 몰려들어 있었고, 저택 내부에는 황실의 눈인 렘브란트 경까지 있었다. 이런 시기에 집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나 찔리는 거 있소,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위험한 수단으로 일을 해결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
후작 부인은 부채를 쥐어뜯으며 히스테릭하게 뇌까렸다.
“그 애를 내놓으면 침묵하겠다는 건, 일단 증거를 쥐고 있을 테니 사기 결혼 건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하라는 거겠죠? 완전히 우리하고 틀어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
후작 부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돌이킬 수 있을 거예요. 밝혀져 봤자 아서도 이미지에 흠집만 나지 얻을 게 없으니까…….”
“…….”
후작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이번에는 부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놈의 비위를 맞춰 그 입을 막는 것이 급했다. 지금 같은 타이밍에 사기 결혼 따위의 잡소리가 끼어든다면 간신히 얻어낸 선제후 지위는…….
‘그래. 소동이 벌어지느니 차라리 협상을 원하는 쪽이 낫다.’
분노가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큰 잡음 없이,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했다. 후작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부인에게 말했다.
“내보내, 그 하녀. 개선 광장으로.”
후작 부인이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후작이 말을 이었다.
“놈은 우리가 굽혀 주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을 셈이다. 아서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제스처를 보여줘.”
후작 부인은 눈앞이 캄캄해져 눈 밑을 떨었다. 설마 설마 하며 준비를 하긴 했지만. 정말 그 방법뿐인가? 그러면 그 후의 일은?
“……사람들 앞에 그 하녀를 내보내면 크리스티나는 어떡해요!”
후작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왜 이 시간까지 생돈을 써 가며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즉시 집사장과 하녀장을 불러들여 명령했다.
“횃불 최소한으로 밝혀. 어둠 속에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묻는다. 올가, 그 애를. 그리고 입단속 잘 될 만한 하녀들 붙여 수발들게 해.”
“네.”
집사장과 하녀장이 명을 받고 나갔다. 후작은 파이프에 담뱃불을 붙이려다 떨리는 손이 두어 번 헛돌자 신경질을 부리며 그것을 내팽개쳤다. 카펫 위에 엉망으로 담뱃잎이 널브러지며 씩씩대는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후작은 황실의 감시자나 다름없어진 귀빈을 떠올리며 핏발 선 눈에 힘을 주었다.
‘사기 결혼 건이 알려지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렘브란트 경이, 황제의 처조카가 보고 있어.’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최소한 오늘 안에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아서 놈의 기분을 맞춰 주어야 한다.’
후작 부인은 망연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탁자를 짚었다. * * *
「못 해요. 저는 못 해요…….」
「여기서 제가 나가면 뒷일은 어떡하는데요…….」
「혼자 어떻게든 다 뒤집어쓰고 죽을래도 그럴 수도 없잖아요…….」
「이 상황에 무슨 수로 혼자 죽어요…….」
「저 혼자 드레스를 훔쳐 입고 후작가 어르신들을 속이고 아가씨 대역으로 혼인할 수 있었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구요…….」
레이나는 후작 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했지만, 대답은 칼 같았다.
「호들갑 떨지 마라.」
「아서 경은 그저 잠깐 화가 났을 뿐이야.」
「네 역할은 그냥 지금의 난리를 잠재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성실하게 아서의 요구에 응하겠다는 의미로 널 잠시 그 자리에 두는 것뿐이야.」
「겁먹지 마라.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아도 될 테니.」
「아서도 적당히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망정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는 멈출 거다.」
「아서라고 우리와 척을 지고 싶진 않을 거야.」
「지금이야 영웅이라 추앙받지만, 포로가 된 황태자를 구해온 사생아를, 황후가 가만둘까?」
「황태자보다 인기가 더 높은데?」
「황후 마리아의 견제가 시작되면, 아서도 ‘줄리어스’를 뒷배로 얻어야 한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될 거야.」
「그에겐 ‘줄리어스’의 보호가 필요하다.」
「아서도 멍청이가 아니라면 알아채겠지.」
후작 부인이 냉랭하게 미소 지으며 레이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레이나.」
「넌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주제넘게 토 달지 말고.」
레이나는 망연히 주저앉은 채 후작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특별히, 너도 고생한 바가 있으니 설명해 주는 거다.」
「그러니 잘하렴.」
「크리스티나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말고.」
* * * 그리하여 결국 레이나는 그의 앞에 다시 끌려 나가게 된 것이었다. 다시 한번,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라는 이름으로. * * *
「아서 앞에선 철저히 크리스티나로 있어라.」
「무심결에 지껄인 말이 우리 발목을 잡지 않도록, 유도 신문에 넘어가지 마라.」
* * * 레이나의 손에 오 년 만에 결혼반지가 끼워졌다. 귀에는 커다란 물방울 진주가, 목에는 목걸이가 걸렸다.
“…….”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였다. * * *
“……경의 아내가 아니란 말씀에, 부모님께 불려가 몹시 곤욕을 치렀습니다. 혹시라도 아서 경의 심기를 거슬렀느냐고. 어찌했기에 부군께 그런 말씀을 듣느냐고요.”
가만히 그녀를 보던 아서가 작게 웃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졸라맨 채로 수천 명의 사람 앞에 서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멍청이가 된 것처럼 침착해졌다. 고요할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귀밑으로 부는 바람이 내 것이 아닌 듯 풀어놓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뚫린 귀가 화끈거렸다. 귀걸이가 무거웠다. 레이나는 가늘게 떨며 코르셋에 조여진 가슴으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에스코트를 의미한다는 걸, 레이나는 주변 구경꾼들의 탄성을 듣고야 깨달았다. 호흡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비현실적인 기분 속에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아서가 살짝 스친 레이나의 손을 가볍게 쥐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딴 세상의 메아리처럼 울리는 세상. 느릿하게 횃불이 일렁였다. 레이나는 넋을 잃고 아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눈 때문일까. 잊고 있었던 오 년 전의 감정이 떠올랐다. 추호도 원했던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함께한 짧은 순간 다정했던 사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차피 살아 돌아오지 못할 놈이니 하녀가 대신해도 상관없다던 하룻밤 짜리 남편을 보내던 순간의 마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저도 모르게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돌아오지 말라더니?”
레이나가 조금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끝내 레이나를 마지막까지 침묵하지 못하게 했던 그의 한마디.
「……힘들어하는 목소리밖에 못 듣고 가는군요.」
“…….”
그리고 충동적으로 건네었던 말이 떠올랐다. 후작님이 아가씨 대신 하녀인 나를 가짜 신부로 내놓은 줄도 모르고, 줄리어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지로 떠나는 그가 안타까워서……. 안 돌아오셔도 된다고. 라이언 달튼*처럼 사는 삶도 괜찮을 거라고…….
“…….”
어차피 목소리는 들려주고 말았다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레이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잘 되어 오실 줄 몰랐거든요.”
그가 나직이 웃었다.
“그랬습니까.”
……기분 상했을까? 레이나는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숙이고 작게 덧붙였다.
“……잘 돌아오셨어요. 다시 뵈니…… 좋네요.”
그가 웃었다.
“다녀왔어.”
그러자 안심이 되었다. ――――― *라이언 달튼: 왕자의 신분으로 탈영을 하여 신분과 이름을 버리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던 고전 소설 속 인물. 겁쟁이에 어리석은 인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