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 아내를 어쨌어?2021.09.16.
“각하의 명예가 달린 문제잖습니까. 각하께서 뭐가 아쉽단 말입니까? 이번에야말로 줄리어스 따위 이쪽에서 사양이라고 차 버리면 안 됩니까?”
트리스탄은 분하다는 듯 내뱉었다.
“이용 가치가 있잖아.”
아서가 여상히 말을 이었다.
“나한텐 기반이 필요해. 여긴 좋은 거점이 될 거야.”
줄리어스를 향한 아니꼬운 고평가에 트리스탄의 얼굴이 구겨졌다.
“황실도 있고 ‘로아스*’도 있잖습니까? 차라리 그쪽이 믿을 만하지, 사기 결혼이나 시킨 줄리어스 따위를 뭘 믿고 좋은 거점이 될 거라고…….”
“그야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고향이니까.”
이어지려던 잔소리가 뚝 멎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 아서는 과일 바구니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명예는 그대들에게 있지, 줄리어스에 있지 않다. 그대들과 함께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내 가장 큰 명예고 자부심이야. 줄리어스 따위가 그 명예를 훼손할 순 없어.”
잠자코 있던 트리스탄은 끝내 고개를 돌리며 짜증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총사령관은 이따금씩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곤 했다. 황실이라는 뒷배까지 있으면서, 너희들의 고향이기에 이곳이 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고향이라고. 다른 귀족이 말했다면 퍽이나 잘 돌아가는 혓바닥이라 생각했겠지만, 그와 지난 오 년을 함께한 트리스탄은 아서의 말을 폄하할 수 없었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언제나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줄리어스의 병사들을 꼽는 것은 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모쪼록 각하의 망신이 되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네요.”
아서는 피식 웃으며 “별. 하던 대로 해.” 말해 주었지만, 트리스탄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이곳은 더 이상 그들이 정복한 전장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의 앞엔 새로운 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떨쳤던 용맹과 무위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전장이겠지. 분하지만 아서에게 줄리어스가 필요하다는 말이 뭔지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사과 괜찮다. 먹어 봐.”
트리스탄은 아서가 던져준 사과를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트리스탄의 물음에 아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글쎄. 일단 ‘진짜 부인’을 만나보고 생각할까.”
트리스탄이 사과를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작게 투덜댔다.
“진짜 부인은요, 무슨. 어차피 돈 받고 들어온 여자일 텐데요.”
아서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어깨만 으쓱했다.
* * *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어떻게 선제후가 되었는데. 어떻게 이 자릴 손에 넣었는데.’
줄리어스 후작은 분노로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황제와 법황청이 그를 선제후로 인정하는 서류에 찍은 도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줄리어스 후작의 가슴 아래 멋들어지게 Princeps Elector Imperii(선제후)의 영광스러운 칭호를 적어 넣은, 초상화는 채 완성조차 되지 못한 상태였다. * * * 줄리어스는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귀족이다.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의 주인이고, 황실을 능가하는 부를 호령하는 금권의 후작가였다. 상인 가문을 무시하는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고전한 적도 있었지만, 자타공인 제국 제일의 거상이자 대귀족의 반열에까지 오른 후에는 그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륙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금권의 줄리어스에게도 오랫동안 갈망했지만 갖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선제후’라는 이름이었다. 선제후란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제후를 뜻하는 말이다. 대개는 황제가 자식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을 황태자로 내세우고 제후들은 그의 정통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황위 승계가 이루어지지만, 황제가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나, 후계자가 있음에도 황위 승계가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선제후들은 회의와 투표를 통해 그들 사이에서 다음 황제를 선출했다. 즉, 선제후는 황제의 바로 아래. 가장 명예롭고 고귀한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는 권력의 이름인 것이었다. 선제후에겐 언제나 백성들이 동의할 만한 명분과 명예가 수준 높게 요구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선제후는 여차하면 다음 대 황제를 배출할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40여 년 전, 이전의 황가가 후사 없이 끝났던 순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선제후에서 새로운 황제로 발돋움한 것이 현 황태자의 조부인 알렉산더 루사익 2세였다. 그는 제국인들이 사랑하는 명예로운 기사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제국을 구한 고귀한 영웅이었다. 모든 제국민들이 이 젊은 영웅의 황위 승계를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했고, 루사익과 명예로운 선제후들은 제국민들의 부름에 응했다. 선제후들은 이 결정을 통해 제국민들의 지지와 자신들의 명예를 더욱 드높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제국 제일의 거부로서 자신의 길을 가던 당대의 줄리어스 후작, 크리스티나의 조부 로날드 줄리어스가 처음으로 ‘남부러움’이라는 감정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런 완벽한 소외감이라니. 귀족 가문에 남성이 한 명뿐일 경우 징집의 의무에서 면제시킨다는 법을 금권 로비로 통과시키고, 전쟁통에 얌체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는데, 저만 쏙 빼고 승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나도 한 다리 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시샘이 났다. 그래도 그때까진 금권을 희생하면서까지 명예를 추구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다. 전쟁 따위에서 이름 날려 봐야 돈만 새어 나가고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게 그의 신조였으니까. 물론 그 정도로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으면 후작이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이 후작에게 관심이 있을 법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문제가 일어난 건 그다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제 잇속만 챙기는 줄리어스’가 꽤나 모양 빠졌던 것. 제국 제일의 갑부인 로날드 줄리어스가 내심 마음에 품었던 귀족가의 레이디들을 상대로 줄줄이 거절을 당하는 충격적인 수모를 당했던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야 대부분의 편지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 혹은 ‘추구하시는 뜻과 우리의 가풍이 다를 것 같아 정중히 사양’ 등으로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어 쓰여 있었지만, 로날드 줄리어스로서는 나를 거절할 리 없다 생각했던 ‘한 급 낮은’ 가문들마저도 자신을 거절해 버리자 분노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를 꽤 여러 가지로 했고, 이후로는 ‘자존심을 팔 정도로 돈이 아쉽지는 않아 거절’, ‘나는 그런 속물이 아니라 거절’, ‘당신에게 청혼을 당하다니 수치’까지, 온갖 모욕을 당하고 그것이 소식지에까지 실려 버리는 창피를 당해 버렸던 것. 그쯤 되자 그에게 받은 청혼을 얼마나 통쾌하게 거절해 주느냐가 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스포츠가 되어 버렸고, 그 뻔뻔한 로날드 줄리어스마저도 이 정도 망신에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박수갈채 속에서 황좌에 오른 기사, 알렉산더 루사익 2세는 줄리어스를 능가하는 권력을 갖게 되고, 언제나 금전 문제로 허덕이던 변경백 딜로아는 줄리어스가 내내 눈독 들이던 거대 광산 사업을 차지했다. 하지만 로날드 줄리어스는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결혼도 못 하고 줄줄이 망신에, 자기가 훨씬 잘 굴릴 자신이 있었던 탐나는 사업까지 빼앗겼다. 그제서야 줄리어스는 비로소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제국의 최상위 대귀족 중 선제후가 되지 못한 것은 줄리어스뿐이었다. 그건 바로 줄리어스가 지독한 수전노로서 ‘가진 놈이 더 하다’라는 격언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친, 아름답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인들의 대다수가 ‘줄리어스’는 돈뿐이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예롭지 못한 이름은 ‘선제후’가 될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생각한 줄리어스 자신은, 해당 방면에서는 아주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날드 줄리어스는 이 사실을 인지한 이후 자신의 불명예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태생이 구두쇠인 줄리어스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명예로워지는 일에는 돈이 많이 들었을뿐더러, 모양 빠지지 않으려면 해야 하는 의무도 많았다. 별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뭐가 또 그리 많은지.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많은 것은 더욱 쉽지 않았다. 과거에 저질러둔 업보인 온갖 ‘망언 리스트’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쌓아둔 흑역사가 많은 당대의 줄리어스 후작 로날드 줄리어스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비로소 그 아들 안토니오 줄리어스와 손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오랜 노력이 결실을 보았으니. 그마저도 ‘줄리어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타고난 금전욕과 학습된 명예욕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하나뿐인 딸을 황제의 사생아에게 팔아 치운 결혼 장사에서 잭팟이 터지며 마침내 줄리어스는 멀게만 느껴졌던 ‘선제후’의 리스트에 막 자신의 이름을 올린 참이었던 것이다. * * *
“햐,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구먼. 후작가가 베푸는 승전 기념 자선 축제라니!”
“여기, 이것도 좀 드셔 보시구려. 세상에 이런 걸 다 먹어보네.”
“이야, 후작님네는 매일 이런 걸 먹고 사는 거야?”
후작령의 백성들이 거리와 광장 곳곳에 놓인 통돼지 바비큐를 뜯으며 떠들썩하게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크으으! 맥주가 기가 막힌다.”
“오, 또 온다!”
어느새 뼈만 남은 돼지고기가 치워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칠면조 고기가 대령 되었다. 수레에 끝없이 고기 요리가 실려 나오고, 테이블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술이며 고기를 받아갔다. 사람들은 붓고 마시고, 거리의 화가들은 한가로이 고기를 뜯으며 그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아서 경은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만났대?”
“그러고 보니 당신 개선 광장에 갔었다며. 뭐 좀 들은 거 없어?”
고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정신을 차리고 드문드문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어어, 그럼, 두 분 만났지! 근데 소리는 잘 안 들리더라고. 잘못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소식지에 나지 않을까? 어, 술 왔다, 술! 빨리 줄 서! 저거 와인 같은데!”
사람들은 수레에 오크 술통들을 가득 싣고 오는 후작가의 하인들을 보며 얼른 줄을 서기 위해 달려갔다. 전쟁 영웅의 개선식도, 세기의 커플의 재회도 물론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그딴 것보단 언제 끝날지 모를 눈앞의 음식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사원의 기록관과 소식지의 기자들은 중요한 장면을 놓친 데에 안타까워하며 저마다 흥겨운 분위기를 기록하기 바빴다. 【 예상보다 이르게 도착한 아서 경. 줄리어스 후작 영애와 재회…… 】 【 줄리어스는 온 거리에 성대한 승전 연회를 베풀고…… 】 * * * 줄리어스 영지 앞에 마련된 귀환군 주둔지. 때아닌 축제가 벌어진 영지를 한 바퀴 순회하고 온 줄리어스 후작 내외가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총사령관 아서의 막사로 향했다. 군 주둔지에도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날라져 오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거리와 사뭇 달랐다. 병사들도 드문드문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지만 어딘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기사의 안내를 받아 아서의 막사로 향하고 있는 후작 내외를 발견한 병사들은 하나같이 싸늘한 눈으로 후작 내외를 바라보거나 비웃었다. 짧게 본 뒤 무시하고 제 병장기나 닦는 병사들도 있었고, 더러는 그들을 노려보며 퉤, 침을 뱉기까지 했다. 단 한 사람도 그들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건 그 누구도 그런 분위기를 제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후작의 얼굴이 분노로 벌게져 가는 것과 반대로 후작 부인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제발 남편이 이 위험 신호를 알아채야 할 텐데……!’
마침내 도착한 총사령관의 막사 앞.
“총사령관 각하. 후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막사 앞에 자기들을 세워두고 아서에게 입실의 허락을 구하는 기사의 작태를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뻗친 후작이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후작을 잡고 귓속말을 하려다 실패한 후작 부인은 황망히 그의 뒤를 따랐다. 막사 안에 있던 트리스탄이 창검으로 후작을 제지하는 순간, 아서가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하지 마라, 트리스탄.”
가차 없이 후작의 가슴을 밀치려던 무기가 후작의 몸에 닿기 직전, 절도 있게 멈추며 뒤로 물려졌다. 죽일 듯이 트리스탄을 노려본 후작은 간신히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이를 악문 채 아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아서 경.”
후작의 부름에 한발 늦게 일어선 아서가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후작 각하.”
후작은 웃는 것인지 이를 드러내는 것인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서가 고갯짓으로 트리스탄을 뒤로 물러서게 하자마자 후작은 입을 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아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웃는 낯 그대로 한쪽 눈썹만 으쓱 치켜들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말씀인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서의 태도에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제 아내가 그 사이에 없어지기라도 했습니까? 제 아내는 어쩌고 다른 아가씨를 내놓는 겁니까?”
“……!”
말문이 막힌 후작이 입을 벌렸다. 후작은 내심 아서가 이런 식으로 대놓고 이 일을 문제 삼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충 피차 알더라도, 원래대로 은근슬쩍 돌려놓으면 그냥 쓴웃음 한 번 짓고 넘어갈 정도의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경솔하게 지껄인 거겠지, 그리해 놓고 저도 후회하고 있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 너.”
본인도 줄리어스의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 같이 망하자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후작 부인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서 경.”
아서의 시선이 후작 부인에게로 향했다. 후작 부인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 애는 당신 아내, 크리스티나가 맞습니다.”
아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었다.
“후작 부인께선 따님도 못 알아보십니까? 나랑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니까.”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반발하듯 높아졌다.
“그 아이가 크리스티나입니다! 사교계 최고의 레이디죠!”
――――― *로아스: 자작 가문. 아서를 입양해 길러 주었다고 알려진 한미한 귀족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