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 하녀2021.09.12.
리에나였나 리에타였나. 꽤 어릴 때부터 저택에서 일한 낯익은 하녀가 아가씨의 드레스를 입고 선 꼴을 보고 집사장은 기가 막힌 얼굴로 반문했다.
“뭐……?”
“몇 번을 되물어! 한 번에 못 알아들어요?”
허스트 부인이 작게 소리를 낮추어 윽박질렀다.
“얘가 오 년 전 아가씨 대신 결혼했다고! 아서 경이 찾는 게 얘라고요! 상황 파악 안 돼요?”
집사장이라고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다만 이 사태에 대한 적절한 소회를 밝힐 말을 차마 찾지 못했을 뿐.
“허…….”
그는 이마를 짚고 연거푸 몇 번을 더 탄식했다.
“허.”
집사장은 세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반 바퀴쯤 몸을 돌리다 돌연 미친 듯이 주먹을 흔들며 낮게 소리쳤다.
“알아들었소, 알아들었다 말이오! 내 말은……! 그걸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이 지경이 되어서야 알려 주느냐 말이오!”
분노인지 패닉인지 모를 감정으로 허공에 주먹을 흔드는 집사장의 턱이 마구 떨렸다.
‘그 말이었구나! 내 부인이 아니라는 말이! 이를 어째. 그분이 이걸 문제 삼는다면……!’
황실 기만. 황실 모독. 사기 결혼. 거짓 맹세……. 죄목을 헤아리는 머릿속이 아찔해 집사장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 미친 집구석이 기어코 일을 쳐서 우릴 죄다 죽이는구나!’
집사장은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안경을 추어올리며 하녀장에게 물었다.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소?”
허스트 부인이 답했다.
“당신, 나, 크리스티나 아가씨, 후작님 내외.”
그리고 아마도, 아서 경. 뒤이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질문 몇 개가 더 오갔다. 사제 앞에서의 혼인 서약을 이 아이가 한 것이냐. 초야도 이 아이가 치른 것이냐. 그날 아서 경이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눈치챈 낌새가 있었느냐, 솔직하게 말해라. 대부분을 허스트 부인이, 몇 가지는 레이나가 떠듬떠듬 답했다. 입을 다문 채 레이나를 직시하던 집사장은 부들부들 떨며 다시 주먹을 흔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이 애한테 드레스를 입혀서…… 뭘 어쩌자고요!”
레이나는 황망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울리자 하녀장과 집사장과 레이나는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을 쳐다보았다. 집사장은 당장이라도 문이 열릴까 조마조마한지 레이나를 감추듯 등 뒤에 두고 문을 향해 서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바깥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장님? 렘브란트 경께서 오늘 말씀하신 가족 초상화 일정에 대해 여쭈시는데요.”
집사장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마를 짚었다. ……렘브란트 경! 예기치 못한 난리통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작님께서 아서 경이 돌아오시는 당일 저녁에 첫 스케치를 하길 원하셨다고 하셔서요. 사실 이미 세 시간째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라 할까요?”
집사장은 황망히 회중시계를 한 번 살피고 도로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찌 될지도 모르는 일정은 왜 잡아서!’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 이 주 전부터 후작 저택에 머물고 있는 귀빈의 이름이었다. 그는 황제의 처조카이자 황태자와는 외사촌 관계로, 현 황실보다도 황궁에 들어앉은 역사가 길다는 명문가 ‘클라인’의 후계자였다. 본래 같으면 궁정화가나 할 법한 일을 할 사람도 아니지만, 어쨌든 촉망받는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 예외적으로 줄리어스의 영지에 파견을 내려와 후작을 위한 초상화를 그려 주고 있었다. 황실의 호의에 따라 ‘선제후 줄리어스’의 초상을 그려 주라는 황제의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위해 친히 내려와 그 저택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황실은 이 일을 두고 ‘오랫동안 제국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최근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은 ― 즉, 이제서야 간신히 선제후가 된 ― 후작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고 포장했지만, 그 어떤 선제후도 자신의 개인 초상화를 위해 ‘클라인’의 후계자를, 그것도 황제의 처조카를 초빙하지 못했었으니 상당한 파격이었고 특혜였다. 황실에서는 후작에게 ‘렘브란트 경’을 보내 주는 것으로써 줄리어스 후작의 위상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점을 주변 귀족들에게 보여 준 것이었다. 줄리어스 후작은 그걸 자랑하고 싶어 일부러 일정을 겹치게 잡아 놓고, ‘화가님이랑 선약이 있어서 어쩌구, 제가 마음대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영 어려우니 저쩌구’ 우는소리를 해대며 주변 귀족들에게 황실이 보내 준 렘브란트 경의 존재를 과시하곤 했다. 렘브란트 경은 사실상 황실의 호의를 표하는 사절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후작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자랑하며 우쭐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게다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엔 으레 상대를 추켜올려 주는 그런 종류의 수다가 곁들여지게 마련이었고. 렘브란트 경은 적당한 사교술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진흙 속의 진주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건 아니지요.」
「어떤 귀족이 감히 황제의 아들을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겠습니까.」
「조만간 역사적 재회가 성사되겠군요.」
「저도 자랑할 만한 추억을 가져갈 수 있게 되어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렘브란트 경의 인사치레에 한껏 들뜬 후작은 흔쾌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하하. 아, 뭐 그렇게 역사적인 장면씩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가족끼리의 평범한 만남일 텐데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할 법한 역사적 장면이라고 생각하여 주신다면, 렘브란트 경께 한 폭 부탁드려도 실례가 아닐는지…….」
……하여 후작은 오늘의 일을, 그러니까 아서와 크리스티나, 후작 내외의 재회를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겨 두기 위해 ‘렘브란트 경’의 일정을 잡아 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렘브란트 경은 약속된 장소에서 우두커니 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집사장은 그만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마님과 주인어른께서는?”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길거리 만찬을 대접하고 계십니다. 기자들도 몰려들기 시작했고,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이라 두 분 다 경황이 없으셔서…….”
집사장은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금 기자들이 문제야!’
렘브란트 경은 사실상 황실의 사절. 즉, 후작가의 상황을 황실에 긴밀히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 아내가 아닌데’라는 소리에 발칵 뒤집힌 후작 저택 한가운데서, 오지 않는 아서 경과 후작 가족을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던 그가 황실에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겠느냐 말이다! 집사장은 허겁지겁 대답했다.
“오늘 통 정신이 없어서 죄송하다고 전해드리고…… 아니,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집사장은 황급히 나가기 직전 멈칫하고 서서는 레이나를 몇 초쯤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자네는 드레스 입고 대기하게.”
레이나는 멀어져가는 집사장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았다.
* * *
“……하.”
하인을 미행해 온 ‘렘브란트 경’은 문틈에 가져다 댄 조그만 조각 거울을 통해 방에 남겨진 여자와 하녀장의 모습을 확인하고 기가 막혀 웃어 버렸다. 드레스를 입고 세상 무너진 얼굴로 선 아가씨. 구불구불한 밀빛 블론드에, 눈이 깊은 아름다운 얼굴. 드레스를 입히고 꾸며 놓으니 놀랍도록 ‘크리스티나’를 닮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화가의 눈썰미를 가진 그를 속일 순 없었다. 미묘하게 느낌이 다른 인상. 다른 색깔의 눈동자. 무엇보다도 그녀는 렘브란트가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 · ·
「저…… 그 소식지, 다 보시면 버리실 건가요?」
며칠 전, 정원 벤치에서 황실 소식지를 보고 있던 그를 한참이나 곁눈질하던 하녀.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불편해 자리를 옮기려 하자, 어렵사리 말을 걸더니 하는 말이라는 게…….
「……저한테 버리시면 안 될까요?」
당황해서 굳은 채 보고 있으니 하녀는 얼굴이 벌게져서 덧붙였다.
「도, 돈을 드려야 될까요? 역시 그렇죠……? 많이는 어렵지만…….」
그러더니 메이드복의 앞치마 뒤에 감추었던 손을 슬그머니 꺼내었다. 하녀가 꼭 쥔 주먹을 펼쳐 동전 세 개를 내밀었다.
「…….」
이미 그에게 다가오기 한참 전부터 쥐고 있었던 듯, 동전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 · · 렘브란트는 팔짱을 낀 채 푹 고개를 숙이고 실소했다.
‘내 아내가 아닌데.’
그리고 갑자기 끌려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 어렴풋이 알 만한 그림이 그려졌다. 줄리어스. 이거 아주 골 때리는군. * *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보좌관 트리스탄의 물음에 아서는 접시 위의 포도를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글쎄? 줄리어스 후작 하는 것 보고.”
트리스탄이 냉랭하게 말했다.
“대답은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제야 ‘진짜 크리스티나’를 내놓는 꼴 보셨잖습니까. 사과 한마디 없이. 시치미 뚝 떼고.”
아서는 힐긋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말하는 친구가 아닌데. 트리스탄은 당사자인 아서보다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아서에게야 많은 시간이 지나 그 일에 대한 유감스러운 감정들이 희미해진 상태지만, 트리스탄은 줄리어스 영지를 코앞에 둔 겨우 며칠 전에야 사건의 전말을 들은 상태였다. 아서는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알아나 둬라’라면서 담담하게 말했지만, 충성스러운 보좌관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줄리어스 영지의 징집병인 그들이 지난 오 년간 얼마나 지독한 고생을 했던가. 전쟁이야 원래 고생스러운 것이라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남다른 울분이 쌓인 것은 ‘줄리어스’가 전쟁에 나간 그들을 외면하고 제대로 된 보급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서가 줄리어스의 데릴사위이며 후계자이니 그 앞에선 줄리어스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으려 참고 또 참아 왔던 것인데. 사기 결혼? 트리스탄은 화가 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들을 외면한 줄리어스를 대신해 아서는 오 년 동안 병사들을 먹여 살렸다. 지금이야 병사들이 아서를 존경해 마지않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랫동안 아서는 ‘줄리어스’의 대표로서 보급에 대해 쏟아지는 병사들의 항의와 원성을 감내해야 했다. 군대가 유지되는 게 기적이었고, 탈영에 하극상에 반란에, 정말로 위험한 상황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가장 위험한 싸움의 첨단에 서는 그를 향해, ‘저 사람은 돌아가면 약속받은 부귀영화라도 있으니까’, ‘사교계 최고의 미녀라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가졌으니까’라며 모두가 아서의 책임감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사기 결혼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분통이 터졌다. 그렇다면 아서는 사실상 이 군대를 책임질 이유가 없었던 것인데, 다 알고도 아서는 줄리어스를 대신해 욕을 먹어 가며, 가장 위험한 자리를 지켜 가며 그들을 먹여 살린 거였다. 아서는 웃었다.
“뭐, 이번엔 진짜 딸을 줄 생각이 있나 보지. 화해의 제스처라 볼 수도 있잖아?”
트리스탄이 발끈했다.
“그게 어떻게 화해의 제스처입니까? 솔직히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각하는 과분합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요.”
“……고마워?”
웃음 반 떨떠름 반. 아서가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는 듯 애매하게 대답하자 트리스탄은 더 흥분해 아서를 채근했다.
“바보 취급하는 거라구요! 오 년 전 가짜를 넣은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아서는 웃는 얼굴 그대로 트리스탄을 달래었다.
“그래서 내 부인 아니라고 얘기했잖아. 표정 볼 만하지 않았어?”
볼 만하긴 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씨근거렸다.
“그래 봤자……! 에이씨. 겨우 그 정도로 성에 차십니까?”
충직한 부하라는 건 귀엽다고 생각하며 아서는 손가락 끝으로 과일을 굴렸다.
“마음 안 풀렸어? 더 혼내줄까?”
트리스탄이 울컥하며 아서를 향해 목소릴 높였다.
“지금 제 마음이 문젭니까?”
아서가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