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외전(5) 살구 수확 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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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외전(5) 살구 수확 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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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외전(5) 살구 수확 날 (完)
2023.08.23.
6월. 초여름의 시작을 알려온 것은 정원에 심었던 살구나무였다.
심은 지 세 해째, 마침내 살구나무는 우주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채운 가의 첫 살구 수확 날이 찾아왔다.
“안 들어가십니까? 벌써 30분째 서 계시는데요.”
“나도 알아.”
등 뒤로 쏟아지는 재촉에, 허영주가 움찔거렸다.
얼마 만에 밟아보는 아들 집 땅인지, 감회가 새로운 걸 넘어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중이었다.
망설임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우리 회장님 오면 같이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회장님께서는 무려 두, 시, 간! 뒤에 도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모님.”
“아…… 그랬지, 참.”
“그렇게 죄인처럼 우물쭈물할 거 없잖습니까? 사모님의 차고 넘치는 잘못은 이제 반쯤은 용서받았을 거라고요.”
굳이 ‘차고 넘치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윤 실장을 향해 허영주가 눈알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한번은 참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윤 실장이 채하 내외와 화해할 수 있게끔 이런저런 다리를 놓아주었던 바였기에.
게다가 그녀 자신도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으니,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언성을 높였다간 지난날의 수행이 무색해질 터였다.
“자자, 얼른 들어가세요. 비록 병풍이지만, 저도 함께 있지 않습니까.”
“……알았어.”
평소엔 얄밉기만 하던 윤 실장이 왜인지 듬직해 보여, 허영주는 결국 용기를 내 걸음을 내디뎠다.
철옹성 같던 대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왼쪽! 조금만 더 왼쪽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정원에 해맑은 음성이 메아리쳤다.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니, 그 끝에선 채하의 목말을 탄 우주가 손을 쭉 뻗어 살구를 따고 있었다.
“두 개 또 땄어요. 아빠!”
오랜만에 보는 방글거리는 그 웃음에, 허영주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아가…….”
“으응?”
살구 수확 중 불쑥 등장한 그들을 감지한 우주가 작은 얼굴을 휙 돌렸다.
채하 역시 간만에 집을 찾은 제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말 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출입을 허락한 건 채하가 아니었기에, 아직은 앙금이 다 가시진 않은 참이었다.
하지만 우주는 살짝 반가운 기색이었다.
“예쁜…… 아니, 할머니 왔어요?”
‘미운’이라는 단어만 빠졌음에도, 허영주는 무척이나 감격해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평상에 앉아 살구를 고르고 있던 설원이 일어서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살가운 인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망의 기색은 많이 가신 말투였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영주는 윤 실장과 함께 가져온 선물을 평상으로 날랐다.
대부분이 아이들의 것이었다.
적어도 아이들 선물은 설원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걸 안 덕분이었다.
곁눈질하며 정원을 보니 거기에선 여름의 생명력이 물씬 풍겼다.
잘 자란 살구나무는 물론, 이름 모를 꽃들이 우거진 녹음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허영주의 눈길이 여름을 맞아 피어난 노란 수선화에 닿았다.
“…….”
자연스럽게 그 발견은, 옛날 일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명색이 채하의 결혼선물이었던 작은 정원을, 제가 짓밟아버렸던 일.
특히 저 노란 수선화가 왠지 소박한 며느리를 닮아 보기 싫다며 다 뽑아버렸더랬다.
“여기 앉으세요.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녀를 향해, 설원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제 행동이 더욱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털썩!
평상에 앉기도 전에 허영주는 털썩 무릎을 꿇어버렸다.
비록 잔디가 깔려있었으나, 흙바닥이었다.
“미안…… 내가 정말 미안하다. 설원아.”
“……어머님?”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설원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윤 실장도 아연실색해 입을 크게 벌렸다.
무심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채하뿐이었다.
명실상부한 채운 가의 안주인, 허영주의 꼿꼿한 고자세는 어디로 가고 그녀는 설원에게 고개를 푹 숙이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
“너한테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어디부터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용서해달라는 말도 안 하마. 그냥…… 내가 다 잘못했다. 내가 너무 못나서…….”
“…….”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설원이 멀뚱히 서 있던 찰나, 윤 실장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어딘가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자그마한 벨벳 소재의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열어보세요. 사모님께서 며느님 주신다고 가져오신 겁니다.”
“저를요?”
설원이 조심스레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알이 커다란 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동그란 알에 유색 보석들이 주위를 둘러싸 꼭 꽃잎을 연상케 하는 반지였다.
“……그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주신 거야.”
“네?”
깜짝 놀란 설원이 반지와 허영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른 보석은 이번에 재단 설립하면서 거의 다 팔았는데, 그건 너 주려고 남겨 놨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아껴서 나 시집갈 때 사준 거였어. 촌스러운 모양에다,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처박아뒀었지.”
허영주의 목소리에 회한 어린 울먹거림이 섞여 들었다.
그녀가 눈시울을 한번 문질러 닦더니 말을 이었다.
“그 반지야말로 가장 값진 거였는데…… 내가 그 가치를 몰랐다. 이제야…… 이제야 좀 알 것 같구나. 돈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
물끄러미, 설원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허영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신중한 손길로 그 반지를 빼서 손가락에 꼈다.
반지는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우와~ 엄마! 대왕 꽃반지 엄청 엄청 예뻐요~.”
언제 왔는지, 우주가 옆에서 설원의 손가락을 붙들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긋 웃으며 허영주를 붙잡아 일으켰다.
“예쁜 할머니. 잘했어요~. 우주가 가르쳐준 대로 사과하니까 좋죠?”
“……아가.”
울컥,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치솟자 우주가 제 소매로 문질러 닦아주더니 사랑스럽게 재잘거렸다.
“우주가 상으로 제일 큰 살구, 할머니 줄게요~. 옥상에 만든 놀이터에 시소도 있으니까, 우주랑 같이 시소도 타요~.”
우주가 건넨 살구를 받아 든 허영주는, 결국 또 오열하고 말았다.
그 살구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손에 쥐고서.
왜인지 그 체통 없는 모습이 더 인간미 있어 보여, 윤 실장은 간만에 웃음을 지었다.
우주와 채하, 그리고 윤 실장이 셋이 한 조로 살구를 수확하는 동안 허영주는 설원과 함께 쌍둥이 손녀들을 만나러 갔다.
출산할 때 잠깐 가서 본 뒤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쌍둥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던지, 허영주는 지금도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우주만 해도 사랑스러움이 극에 치닫는데, 그런 존재가 둘이나 더 생긴 것이다.
곧 그 사랑둥이들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둘이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설원이 아기 체육관에 나란히 엎드려 있는 쌍둥이를 가리키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허영주는 신비한 광경이라도 보듯 손녀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백일을 앞둔 쌍둥이는 열심히 배밀이를 하는 중이었다.
“목을 금방 가눈 편인데, 뒤집기도 빨랐어요.”
그간 보지 못한 서운함을 헤아린 설원이 쌍둥이의 성장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눈에 박아 넣기라도 할 것처럼 허영주는 손녀들을 빤히 응시했다.
밤톨만 한 작은 머리에 보송보송 까만 머리카락이 제법 자라 있었다.
엄마를 닮아 흰 피부에 눈은 무척 커다랬고, 높은 코와 또렷한 입술은 채하를 닮은 듯했다.
정말이지 아기 천사, 그 자체였다.
“우오옹~. 오옹~.”
알아들을 수 없는 귀여운 옹알이를 하며, 쌍둥이는 앞뒤로 배를 밀며 움직여댔다.
조그마한 손가락이 꼬물거렸다가, 이내 펼치며 바닥을 짚을 때는 허영주도 탄성을 질렀다.
단순한 움직임이 어찌나 경이로운지 감동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얘가…… 하늘이, 얘가 구름이라는 거지?”
“네. 바로 알아보셨네요.”
“구름이가, 이름처럼 얼굴이 더 몽실몽실하잖아.”
허영주의 관찰력에 설원이 웃음을 짓자, 둘 사이의 긴장감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앞으론 종종 들러서 손주들 보고 가세요. 저희도 자주 찾아뵐게요.”
“그래도…… 그래도 될까?”
“네. 우주도 그새 키가 많이 자랐어요.”
“고맙다, 고마워. 설원아. 내가 정말…… 정말 평생이 걸리더라도 죗값을 다 갚으마.”
설원의 손을 부둥켜 잡고 허영주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확실히 그녀는 이전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처음으로 잡아본 시어머니의 손이, 생각보단 따스해 설원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살구나무는, 정확히 세 바구니의 살구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마침 딱 맞게 권강호도 회의를 마치고 도착했다.
“오, 우리 우주가 할아버지 주려고 골라놨다고?”
“네! 대왕 할아버지니까 대왕 살구들만 골라놨어요~. 그런데~ 사실 제일 큰 건 예쁜 할머니한테 줬어요.”
“그래?”
의미심장한 눈으로 권강호가 허영주를 보았다.
보아하니 이 정겨운 정원에서 무언가 좋은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머쓱한 듯 허영주가 눈을 내리깔았다.
“엄청 엄청 맛있어요~. 얼른 드셔보세요. 아~.”
깜찍하게도 우주가 살구를 직접 먹여주자, 권강호가 웃으며 입을 벌렸다.
“어때요? 우주네 살구, 맛있죠?”
“정말 그렇구나. 내년에는 더 많이 열리겠는걸.”
“네. 내년에는 우주가 이~따만큼 더 커서 직접 살구를 딸 거예요. 올해까지만 아빠가 목말 태워주기로 했어요.”
“흐음~ 그렇구나.”
권강호가 보니 내년에도 우주의 키가 닿기엔 무리였지만, 그저 사랑스러워 그는 첫 손주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우주가 더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우주가 딴 살구, 내년에는 동생들도 줄 거예요.”
“하늘이랑 구름이한테?”
“네~ 오빠가 딴 거라고 자랑할 거예요.”
“오냐. 그러고 보니 우리 쌍둥이 손녀들 얼마나 컸는지 봐야지. 채하한테 듣자 하니 벌써 배밀이를 한다면서. 금방 기어 다니겠구나. 허허.”
“살구 드시고 모두 안으로 들어오세요. 같이 저녁 드시면서 봐요.”
특별한 날인지라 오늘은 설원이 직접 음식을 준비했다.
채하가 만류했지만, 오늘은 그녀에게도 무언가의 수확 날이기도 했으니까.
이를테면 오롯한 진심의 알맹이라든가.
그때였다. 채하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우리 아들, 아빠한테도 살구 줘야지. 아빠도 따느라 고생했는데, 제일 큰 건 할아버지 할머니만 주고. 이 아빠 서운하다~.”
“으응~?”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주가 놀라자, 모두의 입에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다급한 손길로 우주가 건네준 살구를, 채하와 설원이 눈을 마주 보며 베어 물었다.
초여름의 바람에 실린 잔잔한 웃음이 씨앗처럼 정원에 퍼져나갔다.
저마다의 마음에 푸르게 돋아난 사랑은, 앞으로도 거름이 되어 많은 것을 자라게 할 터였다.
입 안 가득히 설원은 행복을 음미했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맺은 열매는 참으로 달았다.
이 달콤하고도 탐스러운 살구 열매처럼.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