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외전(4) 육아에 진심인 남자 (110/111)


110. 외전(4) 육아에 진심인 남자
2023.08.20.



 
3월, 봄의 전령처럼 두 쌍둥이 딸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채하와 설원을 반반씩 닮은 딸의 이름은 ‘하늘’과 ‘구름’이었다.

딸들이 태어나는 날, 채운 가의 일원은 전부 울보가 되었다.

그 엄하기로 소문난 호랑이 권강호마저도 아내의 손수건을 빼앗았을 정도니.

우주, 하늘, 구름.

이름마저 사랑스러운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채하의 콧대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정 비서는 부사장 승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품 안에 한꺼번에 안고서, 채하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이 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태도는 예상대로 지독한 팔불출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자~ 옥상에 놀이터가 완성됐다!”

“……벌써요?”

아침부터 얼마나 부지런히 작업했는지, 목장갑을 낀 채하의 옷은 먼지로 가득했다.

이건 거의 목공이라도 된 모양새였다.

그를 뒤따라 우주가 나무판자를 들고 해맑게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가 된 모습을 하고서.


“엄마. 아빠랑 엄청 엄청 멋진 놀이터를 만들었어요! 미끄럼틀이랑~ 그네랑~ 우주가 좋아하는 시소랑~ 잎새 어린이집 놀이터보다 훨씬 좋아요!”

자본력이 아낌없이 투입되었으니 그럴 만도 할 터였다.

하나 갓 태어난 딸들이 그 놀이터에서 놀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들뜬 게 채하뿐이라면 어떻게든 자중시키려 해보겠으나, 눈에 초롱초롱 생기가 도는 우주를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판에 만들었던 그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야. 이따가 당신도 올라가서 같이 타보자고. 아주 잘 만들어졌거든.”

“응! 아빠가 만든 그네, 엄청 엄청 재밌어요~.”

“예전에 어린이집 임시 소풍 때처럼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돔 형태로 천장도 제작했어. 정 실장이 배달해 줄 거야.”

“와~! 우주, 엄청 기대돼요!”

이런 대화의 핑퐁 속에서 설원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방 인테리어를 시작해볼까.”

“응! 동생들 방도 우주가 꾸밀 거예요~.”

“그만, 그만. 이제 그만 해요.”

당당하게 목장갑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 이 못 말리는 부자를, 설원이 결국 막아 세웠다.

이러다간 기껏 재워둔 쌍둥이가 깨고 말 터였다.

한없이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둘을 향해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놀지도 못할 놀이터까지야, 우주가 있으니까 그렇다 쳐요. 하지만 아기들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우리 방에서 자야 해요. 한마디로 벌써부터 방을 꾸밀 필요는 없단 뜻이에요.”

이미 산더미처럼 사들인 육아용품만 해도 난감한데, 본격적으로 방을 꾸몄다간 분명 또 이게 부족하니 저게 부족하니 할 게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넘치는 육아용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 늘어날 테고.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부자의 과다한 의욕을 저지해야 했다.


“흠. 벌써부터라…….”

설원의 논리적인 지적에, 채하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나 그 생각의 결론은 설원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주 자신만만한 어조로, 그가 반격을 해왔다.


“뭐든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 법이야. 사업도, 육아도.”

“채하 씨 일은 안 해요? 어제도 오늘도 집 꾸민다고 휴가 냈잖아요.”

“이거보다 중요한 일이 더 있나?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여보. 다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결국, 또 설원이 졌다.

그는 육아에 진심인 남자였다. 준비에도 진심인 남자였고.

*

슬금슬금, 설원이 은밀하게 발소리를 줄이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깊이 잠든 쌍둥이들 덕분에 이 잠복을 할 여유가 생겨났다.


‘화상 회의라고 했지…….’

행여 그림자라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설원은 살짝 열린 서재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뒤로 채하는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물론 그가 뛰어난 부사장이라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일에 소홀해지진 않을지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해서 설원은 제 눈으로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채운 그룹이 여전히 잘 자리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회의에 임하고 있는 채하를 본 순간, 그런 우려는 순식간에 불식되었다.

배경이 서재가 아니라 그냥 채운의 회의실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는 완벽했다.

채운의 황태자는 역시 황태자인 모양이었다.


“휴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안도의 한숨을, 막기도 전에 채하가 이쪽을 휙 바라보았다.

설원이 놀라 도망가려는 찰나에 문이 열렸다.


“어딜 도망가.”

“채하 씨. 회의…….”

“지금 마침 딱 끝났어. 정확한 타이밍에 등장해 줬네.”

“아…….”

그의 말대로 모니터는 어느새 꺼져 있었다.

고요가 감도는 서재의 공기 속에, 문득 그의 싱그러운 체취가 퍼지는 것 같았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채하가 그녀를 서재 안으로 냉큼 끌어들이곤, 단단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우리 아이들이 전부 낮잠을 자는 틈을 노려서, 날 유혹하러 온 거야?”

아니라고 할 새도 없이, 설원의 입술은 순식간에 그에게 머금어졌다.

서재에서의 은밀한 시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힘겹게 몸을 떼어낸 설원이 자리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던 참이었다.

마침 열심히 일하고 있는 채하의 모습에, 잊고 있다가 떠오른 것.


“내년 봄꽃 축제?”

“네. 작년에 했던 작업이 마음에 들었다고, 주최 측에서 제안해 왔어요. 제임스랑 로라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엄청 크게 한대요.”

“역시 우리 여보,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서, 한다고 했어?”

“아직요. 당신하고 얘기해보겠다고 했어요.”

물론 일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아무리 내년 봄 축제라고 해도 쌍둥이들이 돌도 되기 전이었다.

그런 만큼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제임스와 로라는 예전처럼 지방에 오갈 필요 없이, 올해는 미팅과 구상만 하면 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육아할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해 주겠다는 말과 함께.

지난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인 데다, 무려 국제 페스티벌이었다.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설득에, 그녀로서도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워도 꽃을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흐음. 안 하기엔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하더니 채하는 빠르게 결론을 냈다.

아주 뜻밖의, 그러나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듯한 결론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아예 육아휴직을 내지, 뭐. 당신 가장 바빠질 시즌에 맞춰서 말야.”

“……네? 부사장이 육아휴직을요?”

설원의 눈동자가 똥그래지자 채하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뭐 어때. 내가 팔불출에 애처가인 거 모르는 사람, 이제 채운에 아무도 없어.”

“하지만…….”

“아내가 얼마든지 꿈을 펼칠 수 있게, 남편인 내가 외조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수상한 꿍꿍이가 느껴졌다.


“……당신이 아이들한테 점수 더 많이 따려고 그러는 거죠?”

올라가 있던 채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는가 싶더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들켰네. 몰랐는데 의외로 난 육아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그건 맞는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문득 서재 옆 침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귀여운 딸들이 깬 모양이군. 그럼 다시 육아에 애쓰러 가볼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설원의 허리를 다정하게 휘감았다.

정말이지 거절하기 힘든 남자였다. 권채하는.

*



“으응~ 으음~?”

바닥에 몸을 딱 붙인 채 아까부터 심오한 눈빛을 하고 있는 우주를, 설원이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우주의 시선 끝에는 두 쌍둥이가 누운 채 열심히 팔다리를 버둥대고 있었다.


“우주야. 그만 쳐다보고 일어나야지. 팔꿈치가 빨갛게 됐잖아.”

“으응~ 조금만 더 볼래요.”

정말 끈기마저도 아빠를 똑 닮았다.

채하와 우주, 두 사람이 지난 열 달 동안 내내 쳐다보던 목표물은 이제 설원의 배에서 아기들의 통통한 두 다리로 옮겨가 있었다.

그 시선의 이유는 명확했다.

쌍둥이들이 언제 걸을 수 있나, 궁금함 반, 기대 반.

분유를 타서 들고나오던 채하도 우주의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우주야. 아쉽지만, 동생들이 걸으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해. 아직 기지도 못하는걸.”

“어, 오오옹~.”

우주 대신 쌍둥이들이 옹알이로 대답을 했다.

그러자 우주는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구름이가 방금 오빠라고 불렀어요!”

“아쉽지만, 방금은 하늘이란다. 우리 아들. 그리고 아마 동생들은 아빠라고 제일 먼저 말할 걸?”

유치한 채하의 말에, 우주가 작은 무릎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아니에요. 동생들은 오빠라고 제일 먼저 해줄 거예요~.”

정말이지, 못 말리는 부자의 모습에 설원은 결국 또 실없이 웃고 말았다.


“자, 우주. 이제 일어나자. 동생들은 이제 분유 먹을 시간이야.”

“네~ 우주, 동생들 분유 다 먹으면 자장가 불러줄래요~.”

“그러자. 오빠가 자장가 불러주면 쌍둥이들이 더 잘 자는 것 같아.”

설원이 칭찬하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우주가 강아지처럼 얼굴을 비벼댔다.

오빠 노릇을 하려고 열심이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어린 아기였다.

쑥쑥 크는 게 흐뭇하면서도 조금만 천천히 자라줬으면 싶을 만큼.

아이들이 쌍둥이라는 점은 자연스레 사이좋은 장면을 연출했다.

독점욕에 불타는 채하로서도, 동시에 아기 둘을 안고 분유를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런 만큼 이 시간의 행복 또한 배가 되었다.

설원과 채하가 나란히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이는 동안, 우주가 옆에서 지켜보며 연신 방글거리는 장면.

이보다 행복한 그림은 없을 터였다.


 


“우리 쌍둥이들 얼른 커서 우주 오빠랑 놀아야지~.”

우쭈쭈 하며 제법 능숙하게 아기를 다루는 채하를, 설원이 곁눈질하며 쳐다보았다.

약속했던 대로 우주를 가졌을 때, 키울 때 하지 못했던 몫을 그는 몇 배로 해내고 있었다.

우주 또한 오빠 노릇에 열심인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설원이 지나가다 보면 우주가 맑은 목소리로 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아마 좋은 아빠인 채하처럼, 우주 역시 둘도 없이 좋은 오빠가 되어줄 것이었다.

나른한 오후의 공기가 그들 가족을 부드럽게 감쌌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곗바늘에, 몸이 점차 노곤해져 왔다.

잠시 후, 곤히 잠든 쌍둥이들을 설원이 곱게 안아 아기 침대에 옮겼다.

채하와 우주는 아침부터 요란한 작업으로 피곤했는지,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우주의 말간 얼굴과 천진하게 잠든 채하의 얼굴이 정말이지 쏙 빼닮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채운의 황태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잠든다는 건, 아마 세상에서 저만 알 터였다.


“누가 아기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속삭이곤, 설원은 조심스레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남편, 육아에 진심인 권채하에게.

오늘도 평화로운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