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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외전(3) 어느 겨울날의 풍경 (109/111)


109. 외전(3) 어느 겨울날의 풍경
2023.08.16.


눈이 내리는 소리가 났다.

들릴 리 없는 소리임에도, 눈송이가 떨어져 쌓이는 소리가 선명히 귓가에 내려앉았다.

문득 발끝이 시린 것 같은 기분에 설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겨울날의 아침이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함박눈이 예쁘게 내려 완연한 겨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에 쌓인 흰 눈 위로는 이미 콕콕 찍힌 앙증맞은 발자국이 가득했다.

옆에는 물론 듬직한 발자국이 세트였다.

발자국의 주인공은 당연히 설원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었다.


“어? 엄마다!”

2층의 커튼 너머로 설원의 모습을 발견한 우주가 반갑게 손을 휘휘 흔들었다.

눈밭에서 벌써 얼만큼이나 구른 건지, 우주는 작은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곧 우주를 따라 채하의 시선도 설원을 향했다.

그는 다른 의미로 눈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아마 우주와의 눈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당해준 것 같았다.

동화 같은 그 장면에 설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그녀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채하가 손짓했다.


“당신도 거실로 내려와서 구경해. 이제 2탄을 시작할 거거든.”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응! 엄마. 우주랑 아빠랑 쌍둥이 눈사람 만들 거예요~.”

활짝 웃는 우주의 뺨은 홍조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홍조 속에는 머지않아 태어날 쌍둥이 동생들을 향한 기대로 가득했다.

설원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이젠 제법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져 보았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도 흘러, 어느덧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채하의 태몽은 딱 들어맞았다.

그의 품으로 뛰어든 황금 살구 두 개는 쌍둥이 딸의 탄생 예고였다.

설원의 배 속에 있는 동생이 둘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우주는 두 배로 눈을 빛내며 엄마의 배를 주시했다.

그건 아빠인 채하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끈질기게 눈길이 들러붙는 통에, 설원은 매번 부자의 관심을 돌리느라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안 봐도 동생 바보, 딸 바보는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어난 직후라 그런지 조금 추워, 설원은 두 손을 호호 불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넓은 거실 통창 너머로 꼭 액자처럼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겨울이 시작되고 몇 번인가 눈이 내리긴 했지만, 이렇게 함박눈이 펑펑 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정원은 말 그대로 설원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설원은 조심스레 채하가 세팅해 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요즘 그는 아침마다 우렁각시처럼 먼저 일어나 그녀가 다니는 동선을 일일이 체크했다.

모든 것이 늘 찾기도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마실 물, 앉을 의자, 입을 옷…….

이러다간 화장실까지 따라오겠다 싶을 찰나에, 설원은 그를 만류하는 데 겨우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싫지는 않아, 설원은 따스하게 데워진 잔을 만족스레 후후 불었다.

그러면서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아빠! 우주 거보다 너무 크잖아요~.”

“그런가?”

“쌍둥이는 똑같이 생겼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쌍둥이 눈사람도 키가 똑같아야 돼요!”

“흐음. 좋아. 좀 줄여볼게.”

지극정성으로 눈사람 제작 중인 부자를 보니 어느새 발끝에 온기가 돌았다.

둘의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설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뜨개 도구를 집어 들었다.

얼마 후면 태어날 쌍둥이 딸들을 위해 서툰 솜씨로나마 덧신을 뜨는 중이었다.

딸이라는 소식에 채하도 무척이나 기뻐했지만, 설원 또한 은근히 들떴다.

우주에게 여동생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명도 우주가 신이 나서는 직접 지었다. 튼튼이와 쑥쑥이.

매일 돌보는 정원의 식물들처럼, 튼튼하게 쑥쑥 자라라는 오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동생 눈사람 다 만들었어요!”

뜨개질 삼매경에 빠져 있자니, 우주가 거실 통창을 통통 두드렸다.

어느새 귀여운 눈사람 두 개가 나란히 그곳에 서 있었다.


“이쪽이 튼튼이, 이쪽이 쑥쑥이에요~ 똑같이 생겼죠?”

“그러네. 정말 잘 만들었네.”

설원의 칭찬에 우주가 기뻐하며 작은 어깨를 들썩였다.

코가 빨간 것이 꼭 아기 루돌프처럼 귀여웠지만, 추위가 걱정되는지라 그녀는 채하에게 이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춥긴 추웠는지, 순순히 부자가 눈을 털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한기를 달고 왔음에도 순식간에 주변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들, 눈사람 만드는 솜씨를 보니까 보통이 아니야. 예사롭지 않은 예술 감각 하며……. 나중에 훌륭한 조각가가 되는 게 아닐까?”

“당신도 참…….”

질리지도 않고 반복하는 팔불출 멘트를 웃어넘기며, 설원은 우주의 이마에 붙은 눈을 마저 털어주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둔 코코아를 건넸다.

코코아를 홀짝이며 우주는 설원의 옆에 딱 붙어 그녀가 뜨고 있는 것을 구경했다.

마침 한 짝은 거의 다 완성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으응? 엄마, 동생 발이 이렇게 쪼그매요?”

우주가 갸웃하며 실뭉치와 이어진 덧신을 유심히 살폈다.

그 눈빛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설원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우주 발도 이렇게 작았어.”

“으응~? 우주는 발 엄청 엄청 큰데!”

“우주도 아가일 때는 요만했어. 봐, 귀엽지?”

설원이 덧신을 우주의 손바닥에 대어주자 우주의 눈이 똥그래졌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그 크기에 놀랍고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여보. 추울 텐데 맨발로 있으면 어떡해. 자, 여기 수면양말 신어.”

“괜찮아요. 바닥이 뜨끈뜨끈한 걸요.”

“안 돼. 산모는 언제나 몸이 따뜻해야 한다고.”

부산스레 움직이며 채하가 소위 ‘출산 준비’ 세트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설원의 어깨에 두툼한 담요가 덮이고, 테이블의 실뭉치 옆에는 몸에 좋은 간식 세트가 준비되었으며, 은은한 태교용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나다니는 바닥의 기울기와 조명의 강도까지 신중히 재고 있는 채하를 보며, 설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채하 씨가 낳는 줄 알겠어요.”

놀리려고 던진 말인데, 채하가 한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설원을 응시했다.


“차라리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네?”

“당신 그런 연약한 몸으로 한꺼번에 둘이나 낳을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잠이 안 와.”

“채하 씨…….”

그의 깊은 마음과 사랑에, 설원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털어놓으니 차라리 속 시원하다는 듯 채하가 하, 하고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미안해. 당신한테 이런 약한 소리 하면 안 되는데, 너무 걱정이 되어서…….”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우주도 쑥 하고 금방 낳았는 걸요.”

“응! 그래서 섬마을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우주, 효자라고 했어요~.”

깜찍한 위로를 건네며 우주가 채하의 허벅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럼에도 채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사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군. 우리 우주가 태어날 때,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채하 씨. 우주랑 나는 하나도 탓하지 않아요.”

“맞아요! 우주는 혼자서도 쑤욱~ 잘 태어났어요! 동생들도 튼튼하게 쑥쑥 태어날 거예요!”

순간 왠지 채하의 눈이 글썽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가 스스로 다짐하듯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우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뺨을 비볐다.


“그래. 우리 아들 크는 건 이제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 딸들 태어날 때는 우주랑 아빠가 같이 있어 주자. 어때?”

“응! 엄청 엄청 좋아요~.”

부자가 나누는 약속을 지켜보며 설원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채하가 다시 우주를 내려주자, 우주는 늘 하던 대로 엄마의 배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울였다.

예전과 다르게 임신 7개월 차의 배는 아이에겐 무척이나 신비로운 것이었다.

제법 느껴지는 태동은,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우주는 이 순간을 참으로 좋아했다.

채하의 감동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 태동이 느껴졌던 날, 그는 설원 앞에서 어린애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그가 배에 손을 대고 있을 때 발차기를 당한 날에는, 심지어 눈물까지 보였다.

바쁜 와중에 자기도 뜨개질을 하겠다길래, 말리느라 진땀을 뺐던 설원이었다.

예전에 우주에게 만들어준 곰돌이 도시락의 완성도를 알기에, 수제는 가급적 만류하기로 마음먹은 바 있었다.

소중한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실감 덕분일까.

채하 역시 조금은 너그러워져, 허영주가 하루가 멀다고 보내는 출산 준비물들을 단칼에 돌려보내지는 않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제법 쓸만한 게 있다면서.

그날 밤, 함박눈은 소복 눈으로 바뀌었다.

창문 너머 주황색 가로등 아래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설원은 평화를 만끽했다.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발이 퉁퉁 부었다며 마사지를 한 차례 끝난 채하가 그녀의 곁으로 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문득 그의 이런 애처가 모습에, 설원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채하 씨, 그때 생각나요? 옛날에 우리 첫날밤도 이렇게 눈이 왔었는데.”

“당연히 생각나지. 어떻게 첫날밤을 잊겠어, 내가.”

가로등처럼 따스하게 눈을 빛내며 채하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사실 몇 번이나 생각했었어요. 그날, 당신이 방을 착각한 게 아니라, 알면서 내 방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맞아.”

“네?”

단박에 돌아온 긍정에, 설원이 눈을 크게 떴다.

형의 기일에 술에 취해 실수한 줄만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봤었지. 민설원, 당신이 이 침대에 있겠구나 하고. 그랬더니 나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이 방에 들어오고 싶어졌어.”

“……채하 씨.”

“함께 눕고, 함께 자고 싶었어.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말했잖아, 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고.”

이러려던 게 아닌데, 고백을 유도한 기분에 설원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런 못난 나에게, 당신이 먼저 손을 잡아주었지. 나를 위로하면서.”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 채하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새삼 진한 마음의 고백 덕분일까.

단순한 스킨십에도 수줍어져 버린 설원이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채하가 열띤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당신을, 내가 그만큼이나 참았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야.”

“채하 씨도 참.”

“진심이야. 하지만 민설원, 당신한테 무너지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였겠지.”

대꾸할 말을 잃은 설원의 이마 위로 잔잔한 웃음과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설원아.”

“…….”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채하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포개왔다.

짧고도 다정한 키스를 건넨 그가 이번에는 더욱이 조심스레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언제나 밤에 잠들기 전이면 하는 인사였다.

그녀의 배에 입을 맞추며 채하가 인사를 건넸다.


“너희들도 사랑한다. 건강하게 태어나주렴. 아빠가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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