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외전(2) 재롱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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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외전(2) 재롱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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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외전(2) 재롱잔치
2023.08.13.
“……이게 다 뭐예요?”
아침에 일어난 설원은 창고로 변모해 있는 거실 풍경을 목도하곤 기함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사가 결정된 건가 싶을 만큼, 거기엔 산더미만 한 짐이 쌓여 있었다.
“아. 당신 일어났어?”
짐 더미 속에서 채하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왜인지 싱글벙글 즐거워 보이는 표정에, 설원은 거듭 어리둥절해졌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오늘. 오늘…….
“아!”
그제야 설원은 빨간 동그라미를 쳐둔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
그랬다. 오늘은 잎새 어린이집의 재롱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짐들은 재롱잔치 준비물이 분명했다.
물론 규모는 그렇지 않았지만.
“채하 씨. 설마 이걸 다 어린이집에 가져가려는 건 아니죠?”
“가져갈 건데. 그리고 이게 전부는 아니야. 마당에 더 있거든.”
“채하 씨. 어린이집 재롱잔치는 사업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 행사예요.”
“엄청 엄청 중요한 행사지. 우리 소중한 우주를 위한.”
아무리 그래도 상자가 벌써 스무 개 이상에다, 언뜻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블록버스터급 재롱잔치를 열기엔 잎새 어린이집은 그만큼 넓지 않았다.
설원이 말을 더 얹으려던 찰나였다.
“부사장님! 바깥은 다 준비됐습니다. 이대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서두르죠. 오프닝 이벤트를 해야 하니까.”
“오프닝 이벤트…….”
바깥에서 들려온 정 실장의 목소리에, 설원의 목소리는 결국 묻히고 말았다.
제가 아무리 말려도 채하의 재롱잔치 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
“우와~! 코끼리 풍선이다!”
“나는 푸들이야, 푸들! 우리 집 아롱이랑 똑같이 생겼어~.”
까르르, 웃음소리가 잎새 어린이집 정문에서 가득 흘러나왔다.
거기엔 곰돌이 분장을 한 채 야무진 손으로 풍선 아트 중인 사람이 서 있었다.
설원이 힐끔 안으로 들어가며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이 무척 빨라 풍선 만드는 솜씨와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당신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할까?”
“네?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쳐다봤어요.”
“그렇지? 내가 특별히 초빙했어. 저 남자. 그때 그 남자야. 카지노.”
“……아!”
퍼뜩 설원은 깨달았다.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 그는 ‘빠른 손’이었다.
놀라 입이 벌어진 그녀를 향해 채하가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정 실장이 예전에 일하던 행사업체에서 일하게 됐어. 손이 워낙 빨라서 저런 일에 최고더라고. 당신도 보다시피.”
“그러네요. 어……?”
불쑥, 설원의 앞에 풍선이 들이밀어졌다.
의아한 눈으로 설원이 위를 올려다보자, 곰돌이가 꽃송이 모양의 풍선을 내밀고 있었다.
채하와 대화하는 그 찰나에 만든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멋쩍게 설원이 그 꽃 풍선을 받아 들었다.
왜인지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곰돌이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예상한 것보다 더 엄청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린이들이 앙증맞게 노래하고 춤추는 곳이 틀림없는 무대는, 웬만한 콘서트 무대 못지않은 음향 장비로 빼곡했다.
그 뒤로는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거의 아이돌 직캠처럼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리 역시 특별했다.
가족 모두가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자리마다 안마의자 버금가는 고급 의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벽을 따라 늘어선 뷔페 음식들…….
이건 이미 재롱잔치의 수준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선 수준이었다.
“어때? 우주가 이 정도면 흡족해하겠지? 들어올 땐 풍선을 주고, 나갈 때는 선물 박스를 하나씩 제공할 예정이야. 아이들 말고 가족들한테도 우리 채운의 상품을…….”
“어휴. 그만 해요. 채하 씨. 팔불출 소리 또 듣겠어요.”
“서운하군. 능력 있는 아빠라고 해줘.”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빠르게 관객들이 채워졌다.
설원과 채하도 일찍 온 보람을 누리며 앞자리에 착석했다.
잠시 후, 불이 꺼지는가 싶더니 귀여운 병아리들이 짧은 날개를 퍼덕이며 등장했다.
가운데에 우주가 있는 것을 보자 둘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연스럽게 설원과 채하는 손을 꼭 잡고, 잎새 어린이집 아이들의 재롱 향연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부모에게 있어서는 ‘잔치’ 그 자체였다.
반별로 두어 개 정도의 공통 노래와 율동이 지나간 뒤, 특별한 뽐내기 시간이 돌아왔다.
두 사람이 가장 고대하던 순서였다.
재롱잔치 순서 안내장에 우주와 별이가 함께하는 동요가 있었는데, 바로 ‘작은 별’이었다.
한사코 우주가 비밀로 하려 하기에 캐묻지 않았지만, 듀엣으로 노래를 한다고 하니 보기도 전에 깜찍해서 깨물어주고 싶은 정도였다.
이윽고 무대에 반짝이는 별 조명들이 떠오르더니, 동심 가득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목소리가 크고 예쁘다던 우주의 말대로, 별이라는 아이의 목소리는 순수하면서도 밝아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도 밝아지게 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 커다란 리본으로 양 갈래를 한 별이라는 아이뿐이었다.
왜 우주는 보이지 않는 건지 설원이 갸웃하는 찰나, 채하가 그녀의 손등을 톡톡 치며 신호를 보냈다.
“……!”
마침내 우주를 찾아낸 설원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노래 가사에 따라 무대 좌우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별.
바로 우주였다.
아이가 맡은 것이 노래가 아니라, 반짝이는 ‘별’ 그 자체였다니.
그야말로 아름답게 비치는 우주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채하와 설원은 손을 꼭 맞잡은 채 눈에 부지런히 담았다.
부모라는 이름이 주는 행복을 새삼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 흐뭇함과 기쁨에, 설원은 허영주가 윤 실장을 대동하고 몰래 뒤에서 재롱잔치를 보고 갔다는 사실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좋은 날엔, 마음을 넓게 써야 마땅했으니까.
*
그날 밤, 우주는 재롱잔치의 피로로 일찍 잠들었다.
우주처럼 빛나는 천장의 야광별과 함께.
정작 기분이 들떠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설원과 채하였다.
처음으로 함께 참가한 아이의 ‘재롱잔치’라는 이벤트는 그 힘이 꽤나 컸다.
둘은 침대 헤드에 나란히 몸을 붙이고 앉아, 우주의 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성장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원이 풀어놓는 이야기에, 채하는 들어도 들어도 부족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없었던 시간에 대해 그가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잘 알기에, 설원은 우주의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화제는 옛날, 섬의 청년들이 각각 2호부터 5호까지의 아빠 호칭을 획득했던 데에까지 이르렀다.
채하로서는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화제였다.
“흠. 생각해보면 그 섬에 은근히 젊고 건실한 총각들이 많았던 것 같아. 저번에 꽃게 먹으면서 보니 다들 인물도 훤하더군.”
“맞아요. 다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채하의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질투인 줄도 모르고, 설원은 해맑게 대꾸했다.
한데 말이 끝나자마자 설원의 시야가 뒤집혀버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이 보였는데, 지금은 눈앞에 채하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있었다.
“……?”
삽시간에 침대에 눕혀져, 채하의 아래에 깔린 자세가 되자 설원은 눈만 애꿎게 끔벅였다.
꼭 열심히 풀을 뜯다가 갓 잡힌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설원이 입술을 열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그 입술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며 채하가 대답했다.
“당신, 기억 안 나? 나는 당신이 심던 꽃까지 질투하던 사람이야. 그런 내 앞에서 다른 청년들을 칭찬하니, 질투가 안 나겠어?”
“칭찬은 채하 씨가 먼저…….”
꾸욱, 입술을 누르는 손가락 탓에 설원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분명 입을 막고 있는 건 손가락인데, 이상하리만치 야릇하게 느껴졌다.
이어 그의 손이 슬며시 내려오더니, 설원의 손가락에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의도적인 손놀림이었다.
그 바람에 설원의 두 뺨이 순식간에 홧홧해졌다.
낮은 목소리가 어느새 달아오른 두 뺨을 간지럽혔다.
“그때 이 여린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마나 나를 자극했는지 모르지?”
“……채하 씨.”
“이렇게, 꽃줄기 대신 내 손을 휘감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정말.”
“진짜야. 당신이 털어내고 있던 흙이라도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니까? 딱 미쳐버리는 줄 알았지.”
채하의 능글거림을 더는 견디기 힘들어, 설원이 그를 밀어냈다.
당연하게도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낮은 음성은 그녀에게 더욱 바짝 가까워졌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말하고 나니까 잊고 있던 게 떠오르는군.”
“……?”
“나를 미쳐버리게 한다는 제임스와 로라의 생일선물.”
“아…….”
금단의 존재와도 같은 그 물건이 입에 오르자, 설원이 다시금 눈을 끔벅였다.
원래 신혼여행을 갔을 때 들고 가긴 했으나, 도무지 세상에 내놓을 물건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빛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도 안 돼?”
“안…… 돼요.”
점점 몸을 밀착해오는 채하 때문에 설원은 숨이 버거워졌다.
그의 입술은 이제 설원의 입술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제는 우주의 재롱잔치를 핑계로 일찍 잠들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듯했다.
이윽고 덮쳐올 폭풍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아까 우주가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반짝이는 별이 되어 총총 뛰어다니고 있던 것처럼.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자, 설원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채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도 해보려고.”
“그러니까 뭘…….”
“아무래도 당신이 그 선물을 열게 하려면, 보통 정성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그 옷을……?”
“그래. 입을 거야.”
파르르, 설원의 눈썹이 떨렸다.
어느새 폴짝 침대에서 뛰어 내려간 채하가 들고 있는 것은, 설원의 생일에 우주와 세트로 맞춰 입었던 소위 ‘아기 호랑이’ 옷이었다.
“오늘 밤은 내가 재롱 좀 부려볼까 하는데, 어때?”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설원은 그저 멍하니 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유혹으로 가득한 눈빛을 던졌다.
“물론 난 어른의 재롱잔치니까. 지퍼는 잠그지 않을 거야. 그래야 당신도 힘들게 벗길 필요 없을 거고…….”
“채, 채하 씨! 그만 말해요.”
“하하하. 민설원. 언제까지 쑥스러워할 거야.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설원이 좋아하는 채하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여전히 타오르는 욕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곧 채하가 설원을 향해 다시 다가왔다.
“자, 오늘 섹시한 어른 호랑이의 재롱을 맘껏 보여주지.”
아뿔싸, 재롱잔치는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어른의 재롱잔치는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