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외전(1) 우주의 일기
(107/111)
107. 외전(1) 우주의 일기
(107/111)
107. 외전(1) 우주의 일기
2023.08.09.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권우주예요. 다섯 살이고, 우리 엄마 아빠 아들이에요~.
우주는 지금 대왕 할아버지 집에 와 있어요.
엄마랑 아빠가 신혼여행이라는 걸 떠났거든요.
결혼식을 하면 그 여행을 꼭 가야 하는 거래요.
원래는 옛날에 우주가 태어나기 전에 갔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늦게 가게 되었대요.
신혼여행이라는 건 엄청 엄청 특별한 거라서, 어린이는 따라오면 안 된대요.
둘이서 바쁜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주도 비행기 타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요.
대신에 아빠가 나중에 우주한테 더 크고 멋진 비행기를 태워 준다고 약속했어요.
아빠는 약속을 꼭 지키니까, 우주 착하게 기다릴 거예요.
대왕 할아버지는 우주의 진짜 할아버지예요.
다들 회장님이라고 불러요. 엄청 엄청 큰 회사의 회장님이래요.
진짜로 대왕처럼 멋져서, 그냥 대왕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대왕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할아버지가 좋아하면서 우주를 안고 빙글빙글 돌아요.
우주가 아빠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셨어요.
우주도 아빠 앨범에서 통통한 아가 아빠를 봤다고 말해줬더니, 아빠는 대왕 할아버지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대요.
우주가 보기에는 대왕 할아버지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말이에요.
대왕 할아버지한테도 동그랗고 통통한 아가 시절이 있었을까요?
나중에 앨범을 보여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리고 음~ 우주한테 사실은 할머니도 있었대요.
예쁜 할머니가 우주의 친할머니였대요.
그래서 그동안 우주를 보러 어린이집에 찾아왔었나 봐요.
우주가 집에 온 날부터 계속 뒤에서 몰래몰래 쳐다보고 있어요.
어린이집에 갈 때는 우주 가방에 몰래 과자를 잔뜩 넣어놔요.
아무래도 잎새 어린이집에 따라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대왕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어린이집 시소가 아주 재미있다고 했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어요.
할머니도 시소를 타고 싶은가 봐요.
아마 나쁜 사람이라서 시소를 같이 탈 친구가 없나 봐요.
우주도 몰래 할머니를 한번 살펴봤어요.
얼굴도 예쁘고, 옷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뻐요.
다 예쁜데 우리 엄마한테 못되게 굴었대요.
엄마랑 아빠가 오랫동안 못 만난 게 할머니 때문이라고 했어요.
우주도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빠를 못 만났고요.
그래서 우주, 예쁜 할머니라고 안 불러주기로 했어요. 미운 할머니예요.
마음이 예뻐야 진짜로 예쁜 사람이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섬에서 혼자 우주를 낳고 키우느라 엄청 엄청 고생했대요.
재윤 외삼촌이랑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가끔 우주가 밤에 자는 줄 알고 어른들끼리 얘기하거든요.
엄마가 섬에서 꽃집을 할 때도, 바다를 보면서 몰래 우는 것도 봤어요.
아주 슬픈 표정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우주 마음이 많이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우주한테 우는 얼굴 안 보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주, 모른 척하고 엄마한테 가서 꼬옥 안아줬어요.
우리 엄마 품은 엄청 엄청 따뜻하고, 아주 좋은 꽃향기가 나요.
엄마는 우주가 안기면 항상 머리카락을 만져주는데, 기분이 참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예요.
우주가 새끼손가락 걸고 엄마한테 잘해줄 거라고 하니까, 엄마가 효자라고 했어요.
효자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우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어요.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조금 더 크면 알 거라고 했어요.
우주, 효자가 뭔지 모르지만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기로 약속했어요.
이제는 아빠가 생겨서 엄마는 옛날보다 자주 웃어요.
별똥별님한테 빈 소원대로 여기서 다 같이 살게 되었어요.
절대로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다고 했어요.
그치만 할머니 때문에 엄마가 섬에서 울었던 걸 아니까 우주, 예쁜 할머니라고는 안 불러줄 거예요.
엄마를 못살게 구는 사람은 다 우주가 혼내줄 거예요.
*
우주는 잎새 어린이집에 다녀요~.
파란 지붕에 귀여운 앵무새 모양 시계가 달린 곳이에요.
오늘은 세쌍둥이 누나네 아저씨가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줬어요.
그런데 시계를 잘못 봤다고, 너무 빨리 잎새 어린이집에 도착해 버렸어요.
다행히 먼저 와서 마당에서 놀고 있는 친구가 있었어요.
우주를 보더니 그네에서 깡충 뛰어내리면서 반가워했어요.
“어? 우주다!”
“안녕, 별아.”
“너희 엄마 아빠 신혼여행 갔다며?”
“응! 비행기 타고 갔어. 이따만~큼 큰 비행기.”
별이는 사자반 친구예요. 우주보다 몇 달 더 일찍 태어났다고 했어요.
눈이 별처럼 크고, 키도 우주보다 더 커요.
목소리도 우주보다 큰 것 같아요.
커다랗고 반짝이는 리본을 양쪽 머리에 달고 다녀서, 다들 반짝반짝 별이라고 불러요.
우주가 토끼반에 들어온 날, 오늘처럼 마당에서 만났어요.
신비로운 섬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자기는 신비로운 우주에서 왔다고 그랬어요.
별이는 우주를 좋아해요.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어린이집에서는 우주랑 별이를 천생연분이라고 불러요.
천생연분이 뭔지 엄마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이것도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도 좋은 거 같아요.
왜냐하면 엄마하고 아빠가 천생연분이라고 다들 그랬거든요.
“우주네 부모님은 왜 신혼여행을 지금 가?”
“으응~?”
“우리 엄마 아빠는 신혼여행 옛~날에 갔다 왔다고 하던데.”
“바쁜 일을 하러 간다고 했어. 우리 엄마랑 아빠는 사이가 엄청 엄청 좋거든.”
“우리 부모님도 사이 엄청 좋은데! 다들 잉꼬부부라고 불러. 잉꼬.”
“진짜? 그런데 우리 엄마랑 아빠가 더 좋을 걸?”
“흐응~.”
별이가 갑자기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우주한테 가까이 다가왔어요.
그러더니 손을 쭉 펴고 팔랑팔랑 흔들었어요.
“어딜 가든 손도 맨날맨날 잡고 다니는데, 너네도 그래?”
“당연하지. 손도 맨날 잡고 팔짱도 끼고 사이 엄청 엄청 좋아!”
“으으응~.”
우주가 큰 소리로 대답하니까, 별이가 이번에는 입술을 쭈욱 내밀었어요.
“우리 엄마하고 아빠는 아침마다 꼭 서로 뽀뽀해 줘. 한 번도 안 빼먹고.”
“우주 엄마랑 아빠도 해! 뽀뽀. 이렇게~.”
우주도 입술을 쭉 내밀어서 아빠 흉내를 냈더니, 별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어요.
눈이 아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요.
별이는 지기 싫어하는 친구 같아요.
하지만 우주도 지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사이좋은 건 우주 엄마 아빠니까요.
“그래도 한 번은 빼먹을걸?”
별이가 심통 맞은 목소리로 말하니까, 우주도 조금 심통이 났어요.
그래서 우주, 사실대로 얘기해줬어요.
“아니야! 뽀뽀는 절대 안 빼먹어. 우주 엄마랑 아빠는 매일 뽀뽀 백 번씩 해!”
“뭐? 백 번이나?”
“그래. 백 번, 아니. 이백 번, 삼백 번…….”
“크, 흠흠!”
우주가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시소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어요.
돌아보니 담벼락 쪽에서 재윤 외삼촌하고 토끼반 선생님이 나왔어요.
“재윤 외삼촌. 왜 기침해요? 감기 걸렸어요?”
“아, 아니야. 너희들이 이상한 얘기를 하길래, 그만…….”
“네? 뽀뽀가 왜 이상해요?”
“호호호. 아무것도 아니야. 우주야.”
갑자기 토끼반 선생님이 이상하게 웃으면서 재윤 외삼촌을 찌르는 것 같았어요.
아야, 하고 외삼촌이 아픈 시늉을 했거든요.
그때 별이가 힘차게 외쳤어요.
“어어! 왜 재윤 쌤하고 토끼 쌤하고 손잡고 있어요?”
“으응~?”
정말이었어요. 둘이서 손을 꼭 붙잡고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입술도 좀 빨간 것 같았어요. 꼭 방금 뽀뽀한 것처럼요.
우주도 힘차게 외치려고 했는데, 외삼촌이 달려와서 우주를 번쩍 안았어요.
“하하하. 우리 우주, 얼른 들어가자.”
“왜 토끼 선생님하고 손을…….”
“풀! 손바닥에 풀이 묻었어. 자, 들어가야지?”
“으응…….”
우주를 안은 외삼촌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지만, 우주 모른 척하기로 했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토끼반 선생님 얼굴이 토끼가 먹는 당근처럼 빨개져 있었거든요.
꼭 우리 엄마가 처음에 여기로 와서 웨딩사진을 찍으러 갔던 날처럼요.
아빠가 공주님 엄마한테 뽀뽀했을 때, 엄마 표정도 딱 지금 토끼반 선생님 같았어요.
어쨌든 우주 엄마 아빠는 별이네 부모님보다 사이가 좋아요!
손도 항상 꼭 잡고, 뽀뽀도 매일 하니까요!
엄마는 이제 행복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우주도 엄청 엄청 행복해요.
-우주의 일기, 끝-
*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설원과 채하는 품에 달려드는 우주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겨우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아이의 얼굴엔 반가움이 그득했다.
마찬가지로 반가움을 주체 못 하는 채하가 우주를 번쩍 들었다 한참 후에야 내려놓았다.
“자, 이거 우리 우주 선물.”
채하가 예쁘게 리본을 묶은 커다란 상자를 우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우주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급격히 밝아졌다.
“아빠! 상자 속에 우주 동생 들어 있어요~?”
“우리 아들, 아쉽지만 동생은 상자가 아니라 여기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는 거야.”
“으응~.”
살짝 시무룩해진 우주가 설원의 배를 바라보았다.
납작하기만 한 배에서 어떻게 동생이 나올 수 있는지 아리송하다는 눈빛이었다.
실망 반, 호기심 반으로 멀뚱히 서 있는 우주를 향해 채하가 다시금 선물을 내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열심히 동생을 만들고 왔으니까,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진짜요? 우주 동생 만들고 왔어요?”
“그럼. 그러니까 바쁜 여행이라고 했잖아.”
“채하 씨도 참, 그만 해요. 애한테 정말. 자, 우주야. 얼른 선물부터 열어봐야지?”
설원이 채하를 콕콕 찌르며 얼른 ‘동생 탄생’에서 화제를 돌려버렸다.
조그마한 손으로 야무지게 리본을 푸는 우주를, 두 사람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와~! 선물이 엄청 엄청 많아요!”
우주의 말대로 상자 속에는 귀여운 동물 인형과 맛있는 초콜릿, 처음 보는 과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여행 중 들른 곳마다 우주 생각에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나 수북해진 것이었다.
한데 우주는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바로 그것들을 까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의아해진 설원이 무릎을 낮추고 앉아 우주에게 물었다.
“우주야, 왜 안 먹어?”
“응~ 우주 혼자 먹기엔 많은 것 같아요. 나중에 동생이 나오면 동생하고 나눠 먹을 거예요!”
깜찍한 그 대답에 설원과 채하는 웃음을 머금고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멀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담아서.
그날 밤, 멋진 형아가 되어야 한다면서 우주는 기특하게도 혼자서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피곤했는지 책상에 엎드린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어?”
잠든 우주를 안아 침대로 옮기려던 설원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색색깔의 크레파스로 그려진 우주의 그림일기였다.
한 장, 한 장 설원이 소중하게 그 일기를 넘겨보았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 그녀의 손이 멈췄다.
아마 오늘 그린 것이 틀림없는 그 그림 속에는, 설원과 채하, 우주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하루빨리 동생과 과자를 나눠 먹고 싶다는 삐뚤삐뚤 귀여운 글씨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