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에필로그 – 결혼식 후일담
(106/111)
106. 에필로그 – 결혼식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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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에필로그 – 결혼식 후일담
2023.08.06.
“우주 동생 언제 나와요?”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어김없이, 우주가 쪼르르 아래층으로 달려왔다.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던 채하가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하하. 우리 아들, 동생이 그렇게 보고 싶어?”
“응! 우주, 동생 엄청 엄청 만나고 싶어요~. 정말로 동생이 한꺼번에 두 명 생기는 거예요?”
똘망똘망 맑은 눈동자 안에 풍선처럼 잔뜩 부푼 기대감이 어른거렸다.
동생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생긴다는 이야기는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신비한 것이었다.
그랬다. 뜻밖에도 채하가 꾼 태몽은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커다란 황금 살구 두 개가 그의 품 안으로 떨어지는 꿈은 쌍둥이 임신이라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동시에 우주의 깜찍한 기다림 역시 두 배가 되고 있었고.
“동생들 오늘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그럼 내일은요?”
자그마한 손가락을 꼽으며 채하를 채근하고 있는 우주를, 살짝 늦잠을 자고 나오던 설원이 발견하곤 웃음을 지었다.
요즘 그녀가 매일 아침 보곤 하는 일상이었다.
“우주야. 아직 멀었다고 엄마가 알려줬잖아. 가을도 지나고, 겨울도 지나야 동생이 나와.”
“으응~? 그렇게나 멀었어요?”
“그래. 엄마 배가 이만~큼 커져야 하거든.”
“으응…….”
매번 같은 답을 듣고도 우주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게, 설원은 마냥 귀여웠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다정한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가 동시에 내려앉았다.
“여보. 더 자도 되는데 왜 일찍 나왔어. 내가 아침 만들고, 우주 챙겨서 보낸다니까.”
팔불출 채하의 멘트 역시 요즈음 늘 같았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팔불출 지수는 더 치솟을 곳도 없이 급상승했다.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요란을 떠는 통에 부엌에는 접근 금지가 된 지 오래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우려 가득한 눈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두 살짜리 아기도 이보다는 자유로울 터였다.
“아직은 내가 해도 된다니까요.”
“안 돼. 임신 초기엔 각별히 조심하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괜찮아요. 아직 배가 나온 것도 아니고, 입덧도 생각보다 없는 걸요.”
“입덧…….”
그 단어를 되뇌며 채하가 문득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살짝 서운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설원이 물었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그는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 실장한테 들었거든. 부인이 입덧이 심했어서, 꼭 새벽 2시만 되면 먹고 싶은 게 생기곤 했다고.”
“그게 왜요?”
“그때마다 새벽에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오면, 부인이 아주 사랑스럽게 여겨줬다기에.”
“아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쁨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서운하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도 해서 설원은 그가 있는 주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우주의 시선을 피해 살짝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채하 씨는 그렇게 안 해줘도 충분히 사랑스러워요.”
“……!”
삽시간에 입꼬리가 귀에 걸린 남편을 보며 설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새벽엔 구하기 힘든 지방 특산품을 먹고 싶다고 졸라봐야겠다 결심하면서.
*
한편 한 계절 사이, 많은 변화를 맞은 두 사람이 있었다.
잎새 어린이집 정문을 빠져나온 토끼반 선생님이 은밀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담벼락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실루엣이 이윽고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반가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재윤 씨!”
“선생님. 이제 끝났어요?”
“네. 많이 기다리셨어요? 차 안에 계시지, 왜 밖에서…….”
“그냥요. 여기 벤치에 앉아 있으니까 어린이집 마당이 잘 보여서요. 선생님이 아이들 인솔하는 거 보고 있었어요.”
“아…….”
왠지 꼭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려, 토끼반 선생님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모습에 재윤도 어쩐지 뺨이 뜨거워졌다.
머쓱해진 그가 얼른 그녀를 이끌었다.
“여기 서 있지 말고, 식사하러 갈까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네. 좋아요.”
토끼반 선생님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섬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재윤의 결심은 잠시 보류 중이었다.
당찬 토끼반 선생님의 당돌한 고백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3개월여 전, 설원과 채하의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엉겁결에 동시에 부케를 받아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재윤은 선생님에게 그 은방울꽃 부케를 양보했지만, 그녀는 그 꽃을 한사코 사양했다.
‘부케는 연인이 있는 사람이 받는 거랬어요. 저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재윤 씨 가지세요.’
‘어, 저도 없는데요.’
‘그럼…… 재윤 씨가 제 연인 하실래요?’
‘……네?’
‘헉! 제가 지금 무슨 말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거의 눈물이 핑 돌 만큼 당황한 토끼반 선생님은 부케를 낚아채듯 들고 줄행랑을 쳤다.
허둥지둥한 그 뒷모습에서 재윤은, 왠지 몽글몽글 따뜻한 기분을 느꼈다.
예전에 우주를 안고 굴렀을 때, 그녀가 건네주었던 토끼가 그려진 밴드처럼.
“……왜 그렇게 보세요?”
저를 내려다보는 재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토끼반 선생님의 뺨이 다시금 발그레해졌다.
귀여운 토끼 이빨과 깊은 보조개를 가진 그녀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동글동글한 것이 꼭 사과 같기도 했다.
빙그레, 재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당돌했던 그녀를 향해, 그 또한 당돌한 제안을 건넸다.
“우리, 손잡고 걸을까요?”
*
“윤 실장. 말릴 거 아는데, 나 잎새 어린이집에 좀 가보면 안 될까?”
하염없이 쭈굴거리며 허영주가 윤 실장에게 넌지시 허락을 구했다.
제멋대로 달려갈 땐 언제고, 이렇게 저자세인지 윤 실장은 이제 동정심이 들 판이었다.
“아이고. 우리 사모님께서 어쩌다가 이런 꼴…… 아니, 신세가 되셨을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사모님이 언제 못 가는 곳이 있었나요? 아, 있긴 있지.”
채하의 집에는 아직 출입 불가인지라 윤 실장은 잽싸게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영주는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아가 못 본 지가 꽤 됐어. 채하 신혼여행 갔을 때 우리 집에서 맡아줬지만, 미운 할머니라고 날 보려고도 안 하더라고. 우리 양반 옆에만 꼭 붙어 있고, 얼마나 야속했는지…….”
“사모님. 우시는 거 아니죠?”
“……안 울어. 그냥 눈이 따가워서 그래.”
애써 훌쩍임을 감추며 허영주가 눈꼬리를 스윽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측은한 그 모습에 윤 실장의 마음도 약해졌다.
“하긴, 사모님도 많이 달라지셨죠. 그동안 회개…… 아니, 반성도 많이 하셨고요.”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만 덜렁 듣고 여태껏 만나보지도 못했어.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채하 녀석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니…….”
“흠. 그래서 우주를 만나러 가시게요?”
“그래. 일단 우리 아가 마음이라도 돌려야 설원이한테 사과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을 거 아냐.”
“사모님…….”
이번엔 윤 실장이 훌쩍이듯 찡한 표정을 짓자, 허영주가 질색을 하며 손을 퍼덕였다.
“뭐야, 그 표정은? 이해했으면 빨리 앞장서! 과자 챙기고!”
잠시 후, 허영주는 다시금 담벼락 뒤에 숨은 채 잎새 어린이집의 마당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에서 시소를 타고 있는 우주의 웃음소리가 해맑게 들려왔다.
차마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등을, 윤 실장이 떠미는 바람에 허영주는 금세 우주에게 발각되었다.
“어? 예쁜…… 아니, 미운 할머니!”
“우, 우주야. 우리 아가…….”
“할머니, 우주 보러 왔어요? 엄마가 그때 할머니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해맑은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대사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허영주가 결국 참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 아가……. 할머니는 우리 우주를 만나고 싶어. 아빠도, 엄마도 만나고 싶단다.”
“으응? 그치만~.”
“할머니가, 할머니가 진심으로 미안해! 우주한테도, 엄마한테도 다 잘못했어! 사과하려고 온 거야.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아주겠니, 응?”
난데없이 체통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허영주를, 우주가 당황한 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살랑살랑 손짓하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방금 친구가 내린 시소의 건너편이었다.
“……?”
허영주가 의아한 듯 시소를 보자, 우주가 다시금 손가락으로 콕 집어 건너편 자리를 가리켰다.
“이걸 타라고……?”
“네. 시소 타면서 우주가 가르쳐줄게요. 엄마한테 사과하는 방법.”
“아…….”
구세주라도 만난 듯, 허영주는 안고 있던 과자를 내려놓고 냉큼 시소에 올라탔다.
무게 차이 탓에 시소가 단번에 떠오르자 우주가 까르르 순수한 웃음을 퍼트렸다.
그야말로 마음을 녹여버리는 미소였다.
“예쁜 할머니, 엄마하고 화해하고 싶어요?”
다시 ‘예쁜 할머니’라고 우주가 불러주자 허영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감격한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우주가 작은 발을 허공에 구르며 신호를 건넸다.
이윽고 둘이 탄 시소가 사이좋게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우주 할머니랬죠?”
“그, 그래. 할머니가…… 우주 친할머니야. 우주 아빠의 엄마야.”
“으응~.”
콩, 힘차게 우주가 발을 딛었다 떼자 또다시 시소가 위로 가볍게 떠 올랐다.
혹여나 엄마한테 왜 그랬냐고 물을까 봐 허영주는 조마조마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그런 책망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금 우주한테 한 말 그대로 엄마한테 하면 돼요~.”
“응?”
“할머니, 지금 우주한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요.”
“어? 그, 그랬지.”
“우주는 용서했어요~. 이제 미운 할머니 아니고 예쁜 할머니 할 거예요.”
“뭐……?”
놀라 입이 벌어진 나머지 허영주는 어정쩡하게 시소 위에 떠 있었다.
아이니까 어른들의 앙금 같은 것은 모를 만도 했다.
그러나 정말로 설원이 이렇게 사과한다고 해서 받아줄까?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우주가 힘찬 허공 뜀박질로 다시금 용기를 주었다.
“우리 엄마가 우주한테 늘 그랬어요. 잘못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랬어요. 진심은 다 전해진댔어요.”
“…….”
“예쁜 할머니도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그리고 우주하고 한 것처럼 같이 시소 타자고 해요! 그럼 화해할 수 있어요~.”
아이의 순수한 코칭에 허영주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함께 노는 것으로 화해하는 아이의 단순함.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솔직하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활짝 웃으며 우주가 허영주에게 재잘거렸다.
“우주네 집 거실에 엄마랑 아빠랑 우주랑 찍은 사진이 이따만하게 걸려 있어요. 나중에 우주 동생들 태어나면 다시 같이 가족사진 찍을 거라고 했어요. 그때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같이 찍어요!”
결국 허영주는 시소에 앉은 채로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란 우주가 시소에서 내려 작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주자, 그녀는 대뜸 아이를 부둥켜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윤 실장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제 사모님은 오늘, 아주 커다란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출입 금지령이 머지않아 해제될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햇살이 아이의 웃음만큼이나 눈부신 오후였다.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