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그 남자의 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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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 남자의 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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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 남자의 태몽
2023.08.02.
“으응~ 우주는 비행기 못 타요?”
눈물이 글썽글썽한 커다란 눈을 마주하자, 설원은 숨이 턱 막혔다.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있는 작은 손이 오늘따라 더욱 연약해 보였다.
마음이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 채하가 허리를 숙이고 앉아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우리 아들, 설마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에 따라올 셈이야?”
“우주는……. 우주도 여행 좋아하는데…….”
“신혼여행은 엄마랑 아빠가 엄청 엄청 바빠지는 여행이야. 저번에 아빠가 뭐랬지? 뭐 때문에 바쁘다고 했어?”
“으응~?”
잠시 눈물을 삼키며 우주가 기억을 되살리듯 자그마한 미간을 집중했다.
그러더니만 손뼉을 짝! 마주쳤다.
“우주가 형아가 되게 해준댔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엄마랑 아빠가 다녀올 동안, 할아버지하고 잘 놀고 있어야겠지?”
채하가 우주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자, 우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주, 할아버지네 가서 기다릴 거예요!”
그 묘하게 논리적인 설득을 지켜보며 설원은 굳이 끼어들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미 부자간의 그 약속 아닌 약속은 너무도 굳건해졌기에.
“와~ 바다 색깔 좀 봐요!”
“…….”
에메랄드빛 해변을 앞에 두고 감탄사를 내뱉은 설원이, 호응이 돌아오지 않자 어리둥절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높이도 뜬 태양 아래로, 채하의 눈빛이 그윽하게 번져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당신 좋아하는 걸 보니 좋아서. 꼭 우주처럼 신나 하는군.”
머쓱해진 설원이 괜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신혼여행을 왔다는 것 자체가 감회가 새로워, 자신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게다가 당신 그 차림새, 안 좋아할 수가 없지.”
“……!”
당황한 설원이 서둘러 두 팔로 몸을 가려보려 애썼다.
채하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보고 있는 게 바다가 아니라 저였음을 겨우 깨달은 탓이었다.
가장 무난한 걸로 골랐음에도 수영복은 수영복이었다.
몸매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의상은, 확실히 갓 결혼한 신랑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설원이 어색하게 퍼덕거리고 있는 사이, 채하가 성큼 다가와선 그녀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한없이 유혹적인 손길이었다.
“당신이 바다를 골라줘서 정말 기뻐. 덕분에 이런 차림의 아내를 볼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채하는 뽀얗게 드러난 설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순식간에 열기가 훅 오르게 하는 입맞춤이었다.
“채, 채하 씨. 바다, 바다를 보라니까요. 저렇게 예쁜 색깔인데……!”
설원이 살포시 발을 모래사장 쪽으로 빼냈다.
그러자 채하가 능청스레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바다보다 당신이 훨씬 예쁘지만, 지금은 아직 낮이니까 참아줄게.”
훅 붉어지는 뺨이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안 되겠다 싶어 설원은 선베드를 향해 도망치듯 총총걸음을 옮겼다.
미리 준비된 음료를 마시면서 시선을 돌릴 작정이었다.
막상 선베드에 누우니 채하의 시선이 더 뜨겁게 쏟아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일 발라줄까?”
“아, 아니에요.”
“하긴, 당신은 이렇게 새하얀 피부가 매력인데 타면 아쉽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에서는 이미 기름이 뚝뚝 떨어져 설원의 살결에 닿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들기는 글렀다 싶었다.
그때였다.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채하가 진중하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바다에 오자고 할 줄은 몰랐어.”
문득 그의 옆모습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 이유를 잘 알기에, 설원은 숨김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바다에 대한 나쁜 기억을 함께 없애고 싶었어요. 예전에 정 실장님네랑 캠핑 갔을 때, 당신이 내가 물에 빠진 줄 알고 놀란 걸 보고……. 사실 내가 더 놀랐었거든요.”
“나도 최재윤 씨하고 우주한테 들었어. 섬에 살 때 늘 바다를 쓸쓸하게 바라봤다고.”
“……맞아요. 채하 씨하고의 사이가 꼭 망망대해 같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수줍게, 선베드 너머로 설원이 채하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당신하고 비행기를 타고, 이렇게 함께 해변을 웃으며 걷고…… 나는 지금 행복해요.”
“민설원…….”
“앞으로는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을 거예요. 이제 채하 씨랑 같이 있으니까.”
설원의 작은 손등 위에 다시 채하의 손이 뜨겁게 겹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무언의 맹세는 설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날 밤.
열어둔 테라스 너머로 별이 무수히도 쏟아졌다.
양쪽으로 묶어둔 커튼이 바람결에 실려 꼭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어?”
흰색 침대 위에 웬 작은 방울 같은 게 놓인 것을 발견한 설원이, 그것을 얼른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답을 구하듯 뒤따라 들어온 채하를 향했다.
“아까 우리 아들이 준 거야. 엄마 아빠의 행복을 바라는 기특한 마음이 담겨 있지.”
과연 그러했다.
화동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은방울꽃 한 줄기는, 예전 채하의 별채에 있던 다 부스러진 것과 달리 무척이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감동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생명력이 꽃에서 느껴졌다.
설원은 그 꽃을 조심스레 들고는 유리병에 물을 채워 꽂아 두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주의 귀여운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맞댄 채 앉아 있었다.
신혼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특별한 것일까.
매일 밤 이미 한 침대에서 자는 사이임에도, 마치 꼭 처음 보는 것처럼 서로의 모습이 새로웠다.
그건 아마도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봐요?”
은은한 조명 아래, 제 입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채하를 향해 설원이 수줍게 물었다.
온종일 열띤 눈빛으로 저를 보기에 긴장하고 있었건만, 그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꼭 그만큼, 설레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냥, 당신 어머님이 하셨던 말처럼 설원 위에 꽃이 피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서.”
“네?”
“예뻐. 많이.”
“…….”
단순한 감상임에도 심장이 덜컹거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채하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설원의 입술 한가운데에 닿았다.
말캉한 감촉을 음미하듯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부는 바람, 쏟아지는 별빛, 그 안에서 채하의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꼭 나비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 나비가 그녀에게 날아와 앉았다.
마치 꽃 위의 이슬을 머금듯, 그녀의 입술이 온전히 머금어졌다.
가볍게 턱을 붙든 손은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감각. 사랑받는다는 감각.
온몸을 충만하게 채우는 그 느낌 속에서, 나비는 날갯짓하고 꽃은 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채하는 꿈을 꾸었다.
*
“흐음~. 그러니까 신혼여행 때, 부사장님께서 꿈을 꾸셨다는 말이죠?”
“네.”
“바로 저 살구나무에 꼭 주먹만 한 황금 살구가 두 개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정 실장이 아내와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어느새 설원과 채하의 결혼식이 있었던 뒤로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 실장 부부는 오랜만에 아이들을 우주와 놀게 하겠다며, 세쌍둥이를 데리고 찾아온 참이었다.
정원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세쌍둥이의 태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덕분에 채하는 자신이 꾸었던 꿈을 상기시키게 되었다.
“그거, 태몽입니다! 확실해요!”
“……태몽?”
얼떨떨한 얼굴로 채하가 정 실장을 바라보았다.
“예. 사모님 혹시 요즘 뭐 달라진 거 없으세요?”
정 실장 부인이 산부인과 의사라도 된 듯 설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것도 없다면서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설원이 흠칫 손을 멈췄다.
왜인지 그녀의 뺨은 급격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에…… 설마?”
정 실장 부부가 놀란 눈을 크게 뜨자, 채하의 입도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이어 설원이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폭탄선언을 했다.
“사실…… 요 며칠 몸 상태가 이상해서 확인해 봤는데, 아이를 가진 것 같기도 해요.”
“그게…… 무슨?”
채하의 눈빛이 미친 듯 흔들렸다.
“확실하게는 병원에 가 봐야 알겠지만, 일단 테스트해 보니…….”
“여보! 민설원!”
설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원을 안아 올렸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팔불출의 표정이었다.
“채, 채하 씨. 내려줘요. 정 실장님네도 계시는데…… 아이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지금 그게 대수야? 당신이…… 당신이 아이를 가졌다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
“아니. 확실해! 지금 생각해보니, 나무에 달려 있던 황금 살구가 내 품 안으로 날아들 듯이 떨어졌어.”
“오오! 역시! 어라, 그런데 살구가 왜 두 개지?”
“어머나! 혹시……?”
정 실장 부부가 입을 모아 탄성을 내질렀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우주를 비롯한 세쌍둥이가 어른들이 있는 쪽으로 쪼르르 모여들었다.
“으응~? 아빠, 엄마를 왜 번쩍 들고 있어요?”
“우리 아들, 드디어 동생이 생겼다!”
“동생……?”
잠시 그 단어를 옹알대듯 되뇌더니, 우주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채하가 설원을 내려놓자마자 이번엔 우주가 다다다 엄마에게로 달려왔다.
그러더니만 그녀의 납작한 배에 두 손을 살포시 대곤, 귀를 가져다 붙였다.
“동생아, 형아야. 들리니?”
그 깜찍한 모습에 모두의 웃음이 동시에 터져버렸다.
“우주야. 형아인지, 오빠인지 아직 모르잖아.”
“으응? 그런 거예요?”
정 실장의 말에 우주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주는 형아가 되고 싶어, 오빠가 되고 싶어?”
정 실장의 질문에 채하와 설원 또한 궁금해져 함께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계속 형아, 형아 했으니 남동생을 원하려나 싶기도 했다.
한데 우주의 입에서는 예상 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주는 형아도 되고 싶고, 오빠도 되고 싶어요! 동생을 많이 많이 갖고 싶어요~.”
아이의 말에 채하의 입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아들을 위해 당신과 나는 부단히 더 노력해야겠어. 일단은 이 기쁜 소식을 다 알리고…….”
“정말, 아직 병원도 안 가봤는걸요.”
투덕대면서도 설원은 발그레 뺨을 빛냈다.
옛날에는 기뻐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혼자만의 임신이었다.
외롭고, 불안하고, 또 슬펐던.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복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이미 정 실장 부부는 아버지께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제 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우주를, 설원이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이런 기쁜 순간에도 아이에게 미안해 마음이 복잡했다.
그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우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 위에 채하의 듬직한 손이 얹어졌다.
“우주한테는 앞으로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거야.”
“……고마워요. 채하 씨.”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보다, 앞으로 올 날에 대한 기대가 두 사람에겐 더 어울리리라.
어느새 녹음이 푸릇푸릇해진 정원을 바라보며 설원과 채하는 손을 꼬옥 붙잡았다.
물론 우주의 손도 함께였다.
이제 이 사이에는 작은 손 한 쌍이 더 추가되겠지.
사랑으로 틔운 새로운 싹이 그들의 소중한 정원에 돋아나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온다 해도, 굳건할 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