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은방울꽃 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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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은방울꽃 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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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은방울꽃 화동
2023.07.30.
<채운 그룹은 리조트 사업 계획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바입니다. 리조트 사업에 배분되었던 예산을 할당해 각각 순직 소방관 유족을 위한 후원 재단, 저소득층 희귀질환 환자지원 재단을 설립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사회 환원은 지금의 채운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도 상응하며…….>
오전에 열린 주주 총회에서 내려진 결론이, 뉴스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채하는 무리한 사업 확장이 채운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며, 대신에 그가 이미 맡고 있던 분야에서의 괄목할 만한 성과로 손해가 아님을 증명했다.
있는 것에 집중하되, 나누면서 나아가는 길.
새로운 기업 비전을 제시하며 사회를 위해 힘쓰겠다는 이 젊은 부사장을 향해,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허영주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멀쩡한 소파를 놔두고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이, 쟤는 내 배에서 나왔는데 도무지 내 아들 같지가 않다니까…….”
“그래도 사모님께서 낳으셨으니 닮은 점도 확실히 있겠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옆에 있던 윤 실장이 살가운 위로를 건넸다.
허영주가 요새 거의 몸져눕다시피 한 바람에, 그는 휴가를 예정보다 일찍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고고하신 사모님께서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기에 와보니, 정말이었다.
주렁주렁 달고 있던 보석들도 모두 빼버리고 망연자실하게 명상만 하고 있지 않은가.
보기에 퍽 딱한지라 바른말을 좋아하는 윤 실장으로서도 차마 위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치 구원을 바라는 어린 양처럼 허영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성격보다는 외모를 많이 물려주긴 했으나, 어쨌건 어머니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서 윤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주었다.
“예. 누가 뭐래도 사모님 아들이잖습니까.”
“내 아들…….”
새삼스러운 사실이라도 확인한 것처럼 허영주가 큰 눈을 끔벅거렸다.
통창 너머로 정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녀가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다짐 같은 혼잣말이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정원이나 가꿔볼까.”
계절의 색채가 몇 번인가 바뀌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설원과 채하, 그리고 우주는 엄마가 있는 수목원에 다녀왔다.
그날, 설원은 아주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어머님도 식에 참석하라고 하세요.”
“뭐?”
예상 못한 말이었는지, 채하의 눈썹이 훅 치켜 올라갔다.
설원의 시선이 봄의 정원에서 뛰놀고 있는 우주에게 다정히 머물렀다.
“우주를 위해서예요. 아이의 마음에 상처나 앙금 같은 걸 심어주고 싶지는 않아요.”
동감하는 바이기에 채하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른들의 증오가 아이에게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을 테니까.
“물론 전부 용서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난 반년간…… 나름 진심으로 반성하고 계신다는 건 알았어요.”
그랬다. 허영주는 두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채하의 계획에 더해, 미혼모와 한부모 가정을 위한 지원 재단도 설립했다.
자금의 출처는 자신과 내내 한 몸이었던 그녀의 값비싼 보석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설립한 미혼모 돌봄 시설에서 그녀는 반년째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윤 실장이 은밀하게 와서 전한 바에 따르면, 제가 내쳤던 설원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을 열렬히도 돕고 있다고 했다.
소중한 아이를 가졌음에도 매몰차게 쫓아낸 것에 대한 속죄라면서.
솔직히 처음에는 설원과 우주에게 용서받기 위한 시늉일 거라고만 여겼다.
한평생 떵떵거리며 살았던 재벌가의 사모님이 아니던가.
하루 이틀 하다 그칠 줄 알았는데, 허영주는 정말로 매일 가다시피 하며 봉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솔직한 후기가,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아까 엄마한테 갔을 때, 바람결에 꼭 엄마 목소리가 실려 오는 것 같았어요.”
“……장모님께서 용서해 주라 하시던가?”
“아니요.”
설원이 생긋, 눈가를 접으며 채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냥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라고요. 바람처럼.”
*
봄바람이 요정의 날개처럼 살랑이는 5월 24일.
모두가 고대했던 설원과 채하의 결혼식이 열렸다.
다만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무척이나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비즈니스 관계나 이런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친지 및 지인만을 단출하게 초대한.
장소는 특별히 로라 앤 제임스의 온실 화원을 식장으로 꾸몄다.
내로라하는 실력자인 두 사람이 직접 맡아준 덕분에, 꼭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순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설원은 입구 쪽에 마련된 신부 대기실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채하와 함께 고른 드레스는 지금 막 피어난 꽃송이처럼 화사하면서도 청초했다.
“축하해요, 설원! 너무 예뻐요.”
“세상에, 드레스 입으니까 천사가 내려온 것 같네!”
“제임스, 로라. 고마워요.”
수줍게 뺨을 붉히는 설원의 모습은 아이 엄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싱그러웠다.
제임스와 로라가 한 바퀴 돌며 수선을 떨더니, 이어 그녀에게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결혼선물이에요. 음, 아니지. 결혼은 이미 한 거니까, 결혼식 선물?”
로라가 빙글거리자 설원은 다소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그들 부부가 준 선물들은 언제나 그녀를 놀라게 했기에, 이번에도 역시 바짝 긴장이 되어서였다.
그러자 제임스가 허허 웃으며 수염을 매만지더니, 설원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설원. 이번에는 그런 미치게 하는 선물 아니니까.”
“제임스도 참…….”
“그러지 말고 열어봐요. 우리가 준비한 회심의 선물이니까.”
반신반의하며 설원이 상자를 받아 들곤 조심스레 리본을 풀었다.
곧 그 안에서 은색의 빛나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온실 열쇠예요. 설원은 우리 가게에서 여기를 제일 좋아했잖아요. 앞으로 많은 일이 생길 테고, 바빠질지도 모르지만……. 언제든 편할 때 와도 좋아요. 일하러 와도 좋고, 그냥 놀러 와도 좋고요.”
“제임스, 로라…….”
“어어. 신부가 눈물 글썽이면 안 돼요. 예쁜 얼굴 망가질라. 아직 식 시작도 안 했다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설원은 로라의 넉넉한 품에 얼굴을 기대어 감사를 전했다.
그녀가 직접 만들어준 은방울꽃 부케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당연히 오늘의 꽃은 은방울꽃이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권채하 군과 민설원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정 실장이 말쑥한 차림새로 연단에 서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혼주석에 앉아 있는 권강호와 허영주는 감회가 새로운 듯 아련한 얼굴이었다.
정작 자식의 결혼식은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하게도 설원 쪽 혼주석에는 재윤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또한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결혼식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양가 어머님의 화촉점화를 할 땐, 허영주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재윤의 어머니가 손수건을 건네면서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찾아왔다.
사전에 함께 입장하기로 약속했던지라, 채하와 설원은 이미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며 입장이 시작되었다.
한데 두 사람보다 먼저 버진로드에 나타난 건, 아주 귀엽고 깜찍한 화동이었다.
바로 은방울꽃이 소담하게 담긴 자그마한 꽃바구니를 든 우주였다.
새하얀 어린이용 양복에, 빨간 리본을 달고 나타난 이 화동은 등장과 동시에 환호를 샀다.
그 뒤로, 시원스럽게 걸음을 내딛는 새신랑 채하와 수줍음 어린 새신부 설원이 등장했다.
곧 세 사람이 보폭을 맞추어 버진로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있는 결혼식이 이토록 감동적인 줄은, 이 자리에 있는 하객 모두가 예상 못 했을 터였다.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이미 여럿이었다.
“두 분, 이미 반지는 오래전부터 끼고 계셔서 새삼스럽게 뺐다 꼈다 하지 않겠습니다. 반지가 손가락에 붙다시피 해서 떨어지질 않는다네요.”
넉살 좋은 정 실장의 말에 하객들의 자리에서 웃음이 퍼져나갔다.
그 웃음은 잠시 후, 설원과 채하의 입맞춤에 숙연함으로 바뀌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고난 가득한 세월을 아는 만큼, 감동 또한 컸다.
우주 역시 똘망똘망한 눈으로 부모님의 입맞춤을 지켜보았다.
결혼식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허례허식은 모두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정 비서님께 주례를 부탁했지만, 그는 ‘이 늙은이는 해줄 말이 없다’며 허허 웃었다.
“그럼 부케 던지겠습니다~.”
부케를 받을 사람도 따로 정하지 않았기에 참석한 젊은 남녀가 일시에 숨을 죽였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욕심 나는 부케였다.
우아한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레 끌며 설원이 자리로 나왔다.
수줍게 고개를 숙인, 앙증맞은 종을 닮은 은방울꽃 부케.
이 꽃이 그와 그녀에게 얼마만큼의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부디 이 꽃을 받는 사람에게도 그 행복이 전해지길 바라며, 설원은 힘껏 부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은방울꽃 부케가 곧 누군가의 손에 착지했다.
“……!”
“……!”
부케를 받은 두 손이 잠시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랍게도 은방울꽃 부케를 받은 것은 두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의외의 두 사람, 재윤과 우주의 어린이집 선생님인 토끼반 선생님이었다.
“와~! 축하해요!”
사정을 모르는 하객들이 손뼉을 치는 사이, 두 사람은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재빨리 재윤이 토끼반 선생님의 품에 부케를 양보하자, 왜인지 그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 장면을 보는 설원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가야 할 곳에 아주 잘 떨어져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을 앞둔 때였다.
문득 설원의 눈에 우주가 총총거리며 하객들의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이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가 살펴봤더니, 우주는 바구니에 있는 은방울꽃을 한 송이씩 나누어주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건네는 은방울꽃을 받아 드는 하객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어났다.
이윽고 우주가 돌아오자 채하가 기다렸다는 듯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 역시 우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우주, 꽃은 왜 나눠줬어?”
그러자 우주가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바구니를 흔들었다.
“응~ 우주가 책에서 봤는데 은방울꽃이 말을 한대요.”
“말?”
“네. 꽃말이랬어요~.”
꽃말 얘기였나, 채하와 설원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주가 조잘거리며 나머지 설명을 이었다.
“이 꽃이 하는 말이 반드시 행복해진대요! 그래서 모두 모두 행복하라고 나눠줬어요.”
예상 못 한 대답에 두 사람의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가져다준 기적이, 새삼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우주가 이 꽃 들고 엄마랑 아빠랑 같이 걸었으니까~ 엄마하고 아빠도 엄청 엄청 행복해질 거예요!”
설원이 참지 못하고 채하의 품에 제 몸도 던지다시피 안겼다.
세 사람이 서로 껴안듯 뺨을 비비자,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이 순간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축복을 받은 신랑과 신부였다.
채하가 우주를 꼬옥 안으며 이마를 맞대곤 비밀스레 속삭였다.
“우리는 이미 엄청 엄청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