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가장 아름다운 열매
(10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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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가장 아름다운 열매
2023.07.26.
“서, 설원아! 얘!”
체통도 자존심도 전부 잃은 채 허영주는 설원의 옷자락을 붙들다시피 잡고 늘어졌다.
“어, 어떤 벌이든 다 받으마! 우주만 만나게 해다오. 제발!”
“…….”
설원의 등 뒤에 숨은 우주가 허영주의 이상하리만치 간절한 애원에 고개를 쏙 빼고는 쳐다보았다.
그 맑고 커다란 눈과 마주치자 허영주는 더욱더 다급해졌다.
“우주야. 내가…… 내가 네 할머니야. 친할머니!”
“으응?”
“대왕 할아버지…… 대왕 할아버지 알지? 우주 할아버지잖아!”
아리송한 눈길로 우주가 허영주를 빤히 보자, 그녀는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일렀다.
“할머니가 대왕 할아버지 부인이야. 그러니까…… 내가 우주 네 할머…….”
“그만 하세요.”
애석하게도 매달린 보람 따윈 없었다.
아이의 마음을 붙들기도 전에, 설원에게서 먼저 내쳐지고 말았다.
망연자실함에 허영주는 설원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렇게 서릿발처럼 차디찬 눈빛으로 저를 볼 줄도 알았던가.
옛날엔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을 시켜도 고분고분했던 아이였다.
죽은 듯 있으라면 죽은 듯 있고, 늘 다소곳했던 며느리였는데…….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냉랭한 설원의 눈빛에서 허영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대로 이 집에서 나가고 나면 절대 아이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걸.
“제발 부탁이다. 응? 이렇게 예쁜 내 손자가 커 가는 모습을 못 본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니! 내가 앞으로 잘할 테니…… 아, 그래. 여기 내가 설원이 너 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영주가 황급히 가방을 열었다.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잔뜩 집어넣고 왔던 보석들이 잡혔다.
그것들을 한주먹에 몽땅 끄집어내려던 찰나였다.
“가혹하다고 하셨나요, 어머님?”
“…….”
가방에 두었던 시선을 올려 허영주가 설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차디찬데, 거기에 담긴 감정만큼은 타 버릴 듯 뜨거웠다.
“저는 제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켰어요.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죠. 그런데 어머님께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으세요?”
변명과 애원에 능한 허영주라도, 이 순간만큼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가방 속에서 손이 툭 하고 떨어지며 쥐고 있던 보석들도 가방 안으로 우수수 떨궈졌다.
이깟 것들로 설원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허영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짓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벌을 받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깜깜한데 불도 켜놓지 않고선.”
“……켜지 마요.”
“목소리는 또 왜 그러고?”
탁, 하고 불이 켜지자 거대한 이불 뭉치가 움찔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권강호가 혀를 끌끌 찼다.
“한밤중에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건가? 피곤한데 얼른 자게 이불 이리 줘.”
“당신은…… 당신은 하여간 나한텐 다정하게 말하는 법이 없죠!”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야?”
허영주의 목소리에 섞인 울음기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권강호가 이불 뭉치에 다가가 손을 댔다.
“들추지 마요! 얼굴이 아주 엉망이니까!”
그런다고 들을 권강호던가.
단호하게 그가 이불을 휙 열어젖히자, 눈이 팅팅 부어 눈꺼풀이 서로 붙다시피 한 허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불 속에 얼마나 꼭꼭 숨어 있었는지 머리카락은 얼굴에 죄다 붙고 헝클어져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권강호는 아내를 잘 알고 있었다.
여배우 출신인 허영주가 늘 내세우는 건 미모뿐이었기에, 얼마나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그런지라 지금 이런 상태라는 것은 아주 큰 일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유추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요 며칠 통 안절부절못하며 우주의 사진만 내내 들여다보는 것을 알기에.
“설원이한테 다녀왔나?”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허영주는 난데없이 으앙~ 하면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권강호는 조용히 침대 끝에 앉아 아내가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허영주가 딸꾹거리며 겨우 울음을 멈췄다.
목 끝까지 차오른 설움 탓인지 허영주는 해묵은 속내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못난 인간이에요. 못나서…… 잘난 남편한테 멸시나 당하고, 아들들한테 미움만 받고…… 이젠 며느리하고 손주한테도…….”
‘손주’라는 단어에서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허영주가 끅끅거리자, 권강호는 대강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챘다.
마냥 살가운 성정은 아니었으나, 사업의 세계로 뛰어들면서 더욱 냉정해지긴 한 그였다.
장남인 태하와 차남인 채하는 그의 성격을 딱 반씩 쪼개놓은 것과 같았으니.
거기다 이른 사별 뒤의 재혼은 솔직히 말해 다소 충동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허영주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완벽한 애정에는 부족했을 터였다.
몸을 이불 가까이 붙이며 권강호가 아내를 토닥였다.
“내가 무심한 게 많았네. 미안해.”
“……?”
“자네한테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가정을 돌보는 데는 소홀했어. 당신 잘못만은 아니야. 너무 서러워하지 말게.”
권강호의 위로에 허영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오랜 세월 쌓여온 앙금은 눈물로 쏟아내 녹여도 녹여도 끝이 없었다.
펄럭, 이불을 단번에 걷어낸 허영주가 권강호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설움을 다시 토해냈다.
“나는…… 나라고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요. 다들 날 무시하고…… 수군대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래. 알아. 알지.”
“그냥 아들이 잘되길 바란 것뿐인데…… 흑흑…….”
이불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권강호를 내리치던 허영주의 두 팔도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방법이 잘못되었나 봐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원이가 용서해 줄 거 같지 않아요. 내 아들, 손주, 며느리…… 다 어떡해요. 흐으윽!”
또다시 엉엉 흐느끼며 허영주가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 손을 빼앗아 당기면서 권강호가 아내를 품에 안고 도닥였다.
“시간이 필요할 걸세. 우리 며느리는 반드시 용서해 줄 거야.”
“흐윽…… 흐윽! 오래…… 오래 걸리면 어떡해요. 그동안 내가 다 늙어버리면……!”
“오래 걸리면 좀 어떻나. 나랑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구경 다니면서 기다리세.”
“흐흐흑…….”
어깨를 들썩이며 허영주는 남편에게 기대 원 없이 울었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기댈 곳을, 설원에게서 전부 빼앗은 게 자신이라는 죄책감이 가시질 않았다.
어쩐지 필요한 것은 시간뿐만이 아닐 것 같았다.
*
“이거, 우주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많이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홍시를 야무지게 들고 먹고 있는 우주를 보며 정 비서 부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감나무에 올해 감이 주렁주렁 탐스럽게도 열렸다면서, 함께 먹자며 찾아온 그들이었다.
도란도란 간이 평상을 펴둔 정원은 꼭 시골 마당처럼 정겨웠다.
“그래, 결혼식 날짜를 잡으셨다면서요? 역시 그날입니까?”
“예.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이미 결혼한 사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통창 너머 집 안에 있는 설원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실 음료를 내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꽃 피는 봄날…… 참 좋군요. 우주도 여섯 살이 될 테고요. 서류 정리도 다 하셨다면서요.”
“네. 너무 늦었죠. 이런저런 일이 많다 보니. 이젠 누가 뭐래도 권우주입니다.”
“으응~? 우주 원래 권우주인데~?”
“이제 정식으로 권우주가 되었다는 뜻이야. 아빠의 아들로 모두가 인정한다는 뜻이지.”
“와! 우주 엄청 엄청 신나요!”
채하의 말에 우주가 들고 있는 감처럼 발그레한 뺨을 빛냈다.
문득 정 비서가 목소리를 진중하게 낮췄다.
“저도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사장님 덕분에 이 늙은이의 오랜 염원이 풀렸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 비서님.”
꾸벅 고개를 숙이는 정 비서를 채하가 재빠르게 만류했다.
그러나 기어이 그는 감사를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름진 두 손이 포개진 채 채하를 향했다.
“우리 윤서도 한을 풀었을 겁니다.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쉴 수 있겠지요.”
“……정 비서님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정말로 쉬시고요.”
“그럼요. 이제 부사장님 늘 하던 말씀대로, 귀여운 손주들 재롱이나 봐야지요. 가족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정 비서가 우주를 응시하자, 우주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우주도 가족이 많아서 좋아요~. 정 실장 아저씨도, 멋진 할아버지도 다 좋아요!”
“허허, 멋진 할아버지 시켜주는 거냐?”
“네. 할아버지 스웨터가 엄청 엄청 멋져요~. 잘 어울려요!”
우주의 칭찬에 정 비서는 제법 낡은 티가 나는 갈색 스웨터를 다정히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떠난 딸, 윤서가 손수 떠 준 생일 선물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는지 정 실장도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분위기를 환기하듯 설원이 커다란 쟁반에 음료를 들고 총총 걸어 나왔다.
“어제 마침 수정과를 만들었는데,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작은 사모님.”
넙죽 쟁반을 받으며 정 실장이 수정과에서 풍기는 진한 향에 코를 킁킁거렸다.
“수정과는 오랜만이네요. 명절 때나 가끔 먹곤 했는데.”
“으응~? 엄마. 쓴 냄새가 나요. 이거 약이에요?”
아이의 코에는 수정과의 향이 다르게 다가오는지, 우주가 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모두가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자, 우주. 감 하나 더 먹어라. 이게 달지.”
옆에 앉아 있던 정 비서가 가장 예쁘고 통통한 감을 건네 우주에게 건네주었다.
방글방글 웃으며 감을 받아 든 우주가 두 사람을 향해 깜찍한 약속을 했다.
“할아버지, 아저씨. 우주도 며칠 있다 살구 따면 꼭 줄게요!”
“살구?”
“네! 저기 우주 살구나무 있어요~.”
우주가 짧은 손가락으로 정원 한편을 가리켰다.
거기엔 제법 키가 자란 살구나무가 가을볕을 받으며 소담하게 서 있었다.
다만 우주의 말대로 ‘며칠’ 뒤에 살구를 수확하기엔 한참 더 자라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아가, 기특하기도 하지.”
아이의 마음이 그저 사랑스러워 정 비서가 연신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우리 집에도 살구나무를 키웠었지.”
“오. 맞아요. 아버지! 어릴 때 옥상에 올라가서 살구 땄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컸었는데.”
“살구나무가 그렇게 커요?”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우주가 물어왔다.
아마 아직은 살구를 수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너그러운 손길로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 비서가 흐뭇하게 대답했다.
“살구나무는 우주랑 같이 쑥쑥 자랄 거란다.”
“선인장도요? 저기 예쁜 노란 꽃도요? 다 우주하고 같이 자라요?”
“오냐.”
“우주보다 커지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 우주가 대장이지.”
“멋진 할아버지. 우주가 진짜 대장이에요?”
아이의 순수한 물음에 정 비서가 따사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우주가 이 정원에서, 제일 아름다운 열매란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