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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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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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죄와 벌
2023.07.23.
“으응~?”
앙증맞은 목소리가 설원의 무릎 위에서 들리더니, 곧 우주가 무언가를 바닥에서 주워들었다.
아마도 유서가 들어 있던 봉투에서 떨어진 듯했다.
우주가 보란 듯 그것을 흔들며 설원에게 내밀었다.
“엄마, 아빠! 이거 봐요~ 여기에 엄마의 아빠가 있어요! 맞죠? 우주 외할아버지요~.”
“응. 맞아. 우주야.”
그것은 사진이었다.
꽤 빛이 바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
그 안에는 설원의 부모님이 다정하게 어깨를 붙이고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어루만지고 있는 불룩한 배 속에 있는 건, 당연히 설원일 터였다.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기념으로 찍은 듯했다.
배경이 꽃으로 가득한 들판인 것을 보면.
조심스럽게 설원이 그 사진을 우주의 손에서 받아 들었다.
낡은 종이 한 장에서 느껴지는 행복의 무게감이 묵직하게도 느껴졌다.
“엄마, 엄마. 옆에 있는 분이 그럼 외할머니예요?”
“응. 예쁘지?”
“응! 외할머니가 엄마를 닮았어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우주가 김선화 여사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금 말을 고쳤다.
“아니지! 엄마가 외할머니를 닮은 거예요. 우주 말이 맞죠~?”
깜찍한 우주의 말에 설원과 채하의 입가에 동시에 웃음이 번졌다.
얼마 전 채하의 앨범을 보면서도 ‘대왕 아빠가 우주를 닮았다’는 놀라운 발견을 했던 바였다.
그때 우주가 대왕 아빠를 닮은 거라고 정정해주었던 것을, 똑똑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원이 권유했다.
“우주야. 외할머니가 우주 이름을 알고 싶으시대. 직접 말씀드려 볼까?”
“으응~! 좋아요. 우주, 외할머니한테도 인사할 거예요.”
힘차게 외치더니 우주가 설원의 무릎 속을 쏘옥 빠져나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우주는 설원이 들고 있는 사진을 향해 손을 공손히 모으고는, 배꼽 인사를 건넸다.
한없이 마음이 찡해지는,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인사를.
“외할머니 손자, 권우주예요. 우주는 외할머니를 엄청 엄청 사랑해요~.”
왜인지 그 순간, 사진 속 두 분이 활짝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한편 그런 채하네 가족의 소식을 속속들이 들으며, 나날이 피가 말라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미치겠네. 윤 실장은 왜 이럴 때 휴가를 내서!”
정신 사납게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허영주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제가 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통에, 윤 실장이 도망치듯 휴가를 냈다는 사실은 그녀의 짐작 밖이었다.
화재 사건이 있은 뒤로 수명이 반절은 줄은 기분이었다.
아들과 손자 먼저 저승으로 보낼 뻔한 충격에 시달렸건만, 아무도 그녀를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병원에 누워 있을 땐 찾아가서 볼 수라도 있었지, 퇴원한 뒤로는 채하는 물론 우주 역시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권채하, 이 매정한 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제 어미인데, 내가 우주 할머니인데!”
분에 겨워 허영주는 가슴팍을 팡팡 쳐댔다.
깨어난 우주가 채하가 친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감격과 함께 기대를 품었던 그녀였다.
우주의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대왕 할아버지인 권강호가 친할아버지라는 사실로 이어졌다.
그러니 그 뒤에는 응당 자신이 친할머니라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했다.
원 없이 이름을 부르고 껴안아 주려 별렀건만, 접근 금지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윤 실장을 닦달해서 알아보니 채하가 설원과 우주를 데리고 섬에 방문해, 최재윤인지 뭔지 하는 남자의 부모를 친정처럼 대우해줬다는 게 아닌가.
한사코 사양하는 그들의 낡은 배를 새것으로 바꿔주고, 설원을 도와준 섬사람들에게도 아쉽지 않은 보답을 했다고.
남에게는 그리 후하게 대우해 놓고, 제게만 이런 수모를 주다니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 나만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마침내 결심한 허영주가 눈을 번뜩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일전에 꺼내두었던 보석을 다시 바리바리 싸 들고, 채하의 집으로 향했다.
평일 낮이니 채하는 회사에 있을 터였다.
*
“다 왔습니다. 사모님.”
“그래. 여기서 기다려.”
설마 문을 안 열어주진 않겠지, 허영주는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아들 집에 오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새삼 기가 찼다.
그러나 그 분함과 억울함은 한 발짝 한 발짝 대문으로 다가갈 때마다 급격하게 작아졌다.
대신 그 자리를 밀고 들어온 것은 윤 실장의 얄미우리만치 정확했던 지적이었다.
‘진짜로 작은 사모님께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냐고요.’
문 앞에 드디어 섰건만, 한 번 떠오른 그 말은 허영주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벨을 누르려던 손을 기어이 아래로 떨구게 할 만큼.
가치를 매기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가의 보석들을 죄다 싸 들고 왔건만, 이것이 별 소용없으리라는 직감이 그녀를 스쳤다.
몰랐다고 잡아떼기엔 사실 지은 죄가 너무도 명백했다.
아무리 백사라에게 속았다고 해도 결국 원인을 제공한 건 설원을 향한 ‘미움’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니까.
역시 사과밖에 답이 없을 테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늘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대했던 며느리에게, 이제 와 차마 고개를 숙일 용기가.
“아휴, 미치겠네!”
역시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허영주가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길 저편에서부터 들려왔다.
“어? 예쁜 할머니다!”
“……!”
흠칫 놀란 허영주가 황급히 문 앞에서 몸을 뗐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완전히 회복해 말간 얼굴을 한 우주가 방글거리며 서 있었다.
옆에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서.
“아, 아가…….”
눈을 끔벅이며 허영주가 설원 쪽을 바라보았다.
설원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스레 민망해진 허영주가 일단 우주를 최대한 눈에 담고선, 쭈뼛거리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때였다.
“들어오세요. 여기까지 찾아오셨으니.”
“…….”
설원이 그렇게 말하곤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들어가던 우주가 뒤를 돌아보며 허영주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늘 마시는 홍차가 아닌 낯설게 향긋한 꽃차가 나왔다.
설원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다만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따뜻한 우유를 앞에 놓은 채 연신 방글거리고 있는 우주를 보며, 허영주는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오래전 설원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제가 했던 모진 말을.
차마 되새기기도 죄스러운 그 말을 떠올리자 허영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를 보며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니 더더욱.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고저 없이 차분한 말투에서는 시어머니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만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허영주는 아예 오늘 얽힌 매듭을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넙죽 엎드리면 아무렴 외면이야 하겠는가.
어찌 됐거나 제가 채하의 어머니이고, 우주의 할머니인데.
그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터였다.
용기를 얻은 허영주가 꽃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아가가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직접 보려고 들렀다.”
“……심 원장님께서 잘 설명해주셨을 텐데요. 아무 문제도 없다고요.”
“그래도 내 눈으로 보는 거랑 같니?”
하마터면 언성이 높아질 뻔해, 허영주는 얼른 다시 꽃차를 진정제처럼 들이부었다.
그러고는 똘망똘망하게 저를 보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며 다시금 용기를 쥐어짰다.
“그…… 옛날 일 말인데.”
설원이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 눈빛에 용기가 사그라들 것만 같아, 허영주는 냅다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다오.”
“…….”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힘겹게 꺼낸 사과가 무안해지는 고요함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정적을 우주가 깨주었다.
“으응~? 예쁜 할머니, 우리 엄마한테 뭐 잘못했어요?”
“그, 그래. 그래서 할머니가 사과하러 온 거란다.”
아이의 중재에 내심 감사하며, 허영주는 은근히 ‘할머니’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대로 용서를 받은 뒤 우주에게 자신이 할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하면…….
“어머님. 용서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된다고 생각하세요?”
“어? 뭐, 뭐라고……?”
예상과 다른 설원의 반응에 허영주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물론 단번에 ‘네.’라는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설원의 태도는 한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용서는커녕 당장이라도 철퇴를 맞을 것만 같았다.
설원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다시금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백재영이나 백사라는 법의 심판이라도 받지만, 어머님께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셨나요?”
“…….”
“용서해달라고 말씀하시는 분치곤, 어머님은 아무것도 하신 게 없으세요.”
“……나, 나는……!”
정확한 지적이었으나, 그 지적을 받는 허영주의 심정은 부들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항변하듯이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왜 한 게 없어? 이렇게…… 내가 사과하러 왔잖아! 그리고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리 아가한테 잘해줬는데, 또…….”
“마침 잘 말씀하셨어요. 어머님.”
말허리를 단호하게 잘라내는 설원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차가웠다.
이어 설원이 허영주에게 선고를 내렸다.
“앞으로는 우주도 만나러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허영주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충격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예쁜 할머니, 우주 못 만나요?”
어리둥절해하며 우주가 끼어들자, 설원은 더더욱 가혹한 선고를 허영주에게 내렸다.
“잘 들어. 우주야. 이 할머니는 옛날에 엄마를 쫓아내고 아빠와 헤어지게 만든 사람이야.”
“으응?”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5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고, 우주도 아빠하고 만나지 못했던 거야.”
거듭되는 충격으로 허영주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너, 너…… 아이 앞에서 지금 무슨……!”
“정말이에요? 예쁜 할머니?”
우주가 허영주를 향해 고개를 들고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답을 알았다는 아이의 눈빛에 커다란 실망감이 스쳤다.
“아, 아니야. 아가! 나는…… 이 할미는…….”
다급한 나머지 허영주는 우주의 손을 냅다 붙들었다.
그러나 작고 따스했던 아이의 손은 더 이상 제게 다정하지 않았다.
손을 뿌리치며 우주가 허영주를 향해 외쳤다.
“우주는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 싫어요! 그러니까 예쁜 할머니 아니에요. 이제 미운 할머니예요!”
우주가 허영주의 팔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해버리자, 망연자실한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설원이 냉랭하게 마지막 운을 떼었다.
“차 다 드셨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더 할 얘기는 없을 것 같아요.”
기적이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허영주가 우주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주는 그녀의 시선을 아예 회피하며 엄마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이 순간, 허영주는 그야말로 가장 큰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