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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엄마의 유서 (101/111)


101. 엄마의 유서
2023.07.19.



 
재윤의 부모님이 내어준 큰방에서 하룻밤을 자고서, 다음 날 두 식구는 육지로 가는 배에 올랐다.

지금껏 미뤄온 설원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대규모 이동이 되었지만, 대가족이라면서 우주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현충원의 소방공무원 묘역.

잠시 묵념한 뒤 채하의 가족과 재윤의 가족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설원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과연, 고귀한 생명 앞에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긍지 높은 소방관이 그곳에 있었다.


“우주야. 인사해. 엄마의 아빠야.”

“으응? 엄마의 아빠요?”

“그래. 우주한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이지.”

“외할아버지…….”

조그마한 입으로 그 단어를 중얼거리며 우주가 사진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냉큼 쪼그려 앉아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외할아버지. 우주가 왔어요~.”

“…….”

“우주는 다섯 살이에요. 반가워요. 외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금방이라도 또르르 흘러버릴 것 같은 슬픔을, 설원은 애써 삼켰다.

그녀가 초등학생일 때 떠나셨으니 세월이 정말이지 오래도 지났다.

두고 간 딸이 어엿하게 성장해, 이렇게 아들을 낳아서 데려올 만큼.

어느새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재윤의 어머니가 우주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우리 우주, 외할아버지 보니까 좋지?”

“네! 엄청 엄청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소방관이에요~.”

울컥한 나머지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 속에는 전부 꺼내놓지 못한 마음이 고이 담겨 있었다.

그런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재윤의 아버지가 대신해 맹세했다.


“설원이하고 우주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 저희가 대신 지켜보겠습니다.”

“……살려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민 소방관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채하와 재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인연. 소중히 이어가겠다고.

*

성묘를 마친 뒤, 채하와 설원은 온 김에 별장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현충원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이라서일까.

모처럼 채하는 직접 요리를 해주겠다고 둘에게 제안했다.

안 그래도 별장에 간다니 소풍처럼 좋아하던 우주의 얼굴이, 더욱 해사하게 밝아졌다.


“와~ 우주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아빠!”

“좋아. 우리 아들, 뭐 먹고 싶어? 말만 하면 이 아빠가 다 만들어줄게.”

“응. 우주 곰돌이 도시락 먹고 싶어요!”

“곰돌이…… 도시락?”

순수하기 그지없는 도시락 주문에, 채하가 힐끔 도움의 눈빛을 던졌다.

그게 왠지 귀여워 보여, 설원의 입가에 둥근 미소가 떠올랐다.


“곰돌이 모양으로 만든 귀여운 밥을 말하는 거예요. 볶음밥을 해서 치즈랑 햄으로 귀랑 얼굴을 만들고, 김으로 눈도 그려주고~.”

“응! 예솔이가 엄마가 만들어줬다고 자랑하면서 보여줬어요. 엄청 엄청 귀여웠어요.”

“흐음. 곰돌이 도시락이라…….”

운전대를 쥔 채하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핏줄이 도드라진 그 팔뚝과 유난히 기다란 손가락을 보며, 설원은 저 손으로 아기자기한 곰돌이 도시락을 만들기엔 무리일 거라 결론을 내렸다.


“재료만 사면 내가 만들게요.”

“그럴 수야 있나. 우리 아들한테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우주, 아빠가 만든 곰돌이 도시락 먹고 싶어요~.”

“들었지?”

“…….”

또 이 패턴인가 싶어, 설원은 입을 다물었다.

우주는 요즘 들어 ‘아빠표’ 무언가를 계속해서 졸라댔고, 채하는 그것을 어떻게든 해내 설원에게 과시하는.

이런 상황에서 답은 하나였다. 항복.


“알았어요. 대신 맛있게 해 줘야 돼요.”

“걱정하지 마. 당신 거는 특 곰돌이 도시락으로 만들어줄게.”

“으응~? 우주도 특 곰돌이로 할래요!”

“좋아. 우리 아들은 특특특 곰돌이다!”

유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대화가 그 뒤로도 내내 이어졌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채하는 한 군데를 더 들릴 것을 제안했다.

다름 아닌 설원이 다녔다는 초등학교였다.


“여긴 왜 오자고 했어요? 아무것도 없이 휑한데.”

그 말 그대로였다.

설원이 어릴 때는 제법 학생들이 있었지만, 이젠 젊은 부모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가 아이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그래서인지 놀이터는 낡아 있었고 건물 회벽에서는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만 아이의 눈엔 달리 보이는지, 우주는 신이 나서 운동장을 총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냥, 어릴 때 당신이 다녔던 곳이라니까 궁금해서.”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설원의 손을 다정히 파고들듯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운동장 외곽을 따라 걸음을 이끌었다.

느릿느릿 흐르는 구름처럼 두 사람의 걸음도 한없이 느려졌다.


“생각해보니 난 내 앨범을 전부 보여줬는데, 당신이 어릴 때 모습은 모르잖아. 뭐, 당연히 지금처럼 얌전하고 예쁜 소녀였겠지만.”

“……옛날엔 얌전하지만은 않았어요.”

“우리 우주가 알고 보니 엄마를 닮아서 명랑한 거였나.”

“돌아가면 내 앨범도 보여줄게요. 채하 씨처럼 많지는 않지만요. 사실 초등학교 이후론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거든요.”

순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원의 사진이 많이 없는 이유를, 채하는 빠르게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의 순직, 엄마의 발병.

그런 험난한 현실 속에서 사진으로 남길 추억은 많지 않았다.


“설원아.”

언제 들어도 뺨이 붉어지게 하는 잔잔한 속삭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채하가 그녀를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어느새 그들의 뒤로는 주황빛 은은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노을에 번져가는 운동장 끝의 그 계단 자리였다.

설원이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홀로 앉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내내 노을을 바라봤던 자리.


“그때는 어린 당신을 지켜줄 수 없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

“채하 씨…….”

“하지만 이제부턴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 거야. 당신이 있는 곳에는 늘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당신이 외롭게 혼자 기다리지 않도록.”

채하의 깊은 눈동자에 스며든 노을빛이 더없이 따스하게 설원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 눈빛이 심장에 박혔던 차가운 기억마저 녹여 없애는 듯했다.

이 순간 설원은 정말로 외롭지 않았다.

다정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설원은 환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을이 너무 예뻐요. 채하 씨.”

 

*

그날 밤, 어딘가 귀엽다기보다 험상궂어진 곰돌이 도시락을 배불리 먹은 뒤 우주는 곤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설원과 채하, 두 사람은 어머니가 남긴 유서를 펼쳐보기로 했다.

일부러 아버지를 만나 뵙고 오는 길에 읽어보려 가져왔던 참이었다.

어깨를 맞댄 채 두 사람은 천천히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마침내 유서를 펼친 순간, 엄마의 스웨터 냄새가 났다.

아주아주 정겹고 그리운 냄새.

종이 위에 가지런한 필체로 담은 엄마의 마음을, 설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내 딸, 설원이에게.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전해야겠구나.

우리 예쁜 딸이 좋은 시절에 아픈 엄마의 뒷바라지만 하느라 고생한 것 같아서,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가슴이 아프단다.

소방관인 네 아빠가 항상 불을 가까이해야 하기에, 너의 이름을 일부러 설원이라 지었다.

마냥 좋은 이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는 사실 조금 후회했어.

이름처럼 외롭고 차디찬 인생이 될까 봐.

네 아빠는 괜한 우려라며 예쁘기만 한 이름이라고 좋아했지만, 어미 된 마음엔 정원이나 화원 같은 게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내내 남았단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너는 설원 위에 홀로 핀 꽃 같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였어.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인생에 설원이가 있어서 행복했단다.

비록 오랫동안 병에 시달렸어도, 엄마는 우리 예쁜 딸을 만나고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

우리 딸, 설원아.

너를 남겨두고 가는 마음은 아프지만, 지금 네 곁에 권채하 군이 있을 거라 믿기에 엄마는 든든하단다.

그거 아니? 채하 군이 처음 집에 찾아왔을 때 말이야.

엄마는 채하 군한테서 언뜻 젊은 시절 아빠의 모습을 보았어.

그을음이 가득 묻은 소방복을 그대로 입은 채 무작정 집을 찾아왔었지.

얼마나 서툰 사람인지, 오랫동안 짝사랑했다고 고백하러 오는 길에도 꽃 한 송이 사 올 줄 모르는 남자였단다.

그런데 왜일까. 멀끔히 차려입고 무심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 있던 채하 군에게서, 그때의 아빠와 똑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단다.

두 사람의 빠른 결혼에 무언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야.

하지만 엄마는 알았어.

너를 보는 채하 군의 눈빛에서, 꼭 들판에서 프러포즈할 때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 하던 아빠의 마음과 비슷한 게 읽혔거든.

제대로 표현 못 해도, 투박한 진심이라는 건 단단한 돌처럼 견고하고 변함이 없지.

그 진심은 반드시 설원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엄마는 믿었단다.

그리고 또 생각했지.

우리 딸이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분명 강한 이끌림이 있었을 것이라고.

비록 두 사람이 그걸 잘 몰랐다고 해도, 둘 사이에 어떤 커다란 방해물이 있더라도.

서로가 사랑한다면 결국 다 괜찮을 거라는 걸.

부디 지금쯤은 두 사람이 그 진심을 깨닫고, 나누게 되었기를 바랄 뿐이야.

권채하 군은 아주 멋지고 훌륭한 사위였어.

덕분에 엄마는 편하게 여생을 누리다 가니, 고맙다는 말은 몇 번을 해도 부족하구나.

설원아. 아빠는 일찍 떠났지만, 우리는 늘 그 행복한 기억 속에서 함께였단다.

들판에서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설원이 너를 가졌을 때, 너와 셋이서 그네를 타며 웃었을 때. 그 모든 것이 삶이 준 커다란 축복이었어.

그러니 설원이 너도 내가 떠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나가 떠나면 또 하나 소중한 것이 찾아오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것이니까.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 우리 딸, 설원아.

하늘에서 아빠와 함께 지켜보고 있을게.

설원이와 채하가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나중에 태어날 우리 손주도 말이야.

아기 이름은 뭘까? 새삼 그거 하나만이 아쉽고 궁금하구나.」


마지막 문단을 읽을 때 즈음해서 설원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다만 오롯한 슬픔은 아니었다.

유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눈물도 흘렀지만,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웃음도 지어졌다.

이를테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채하에게서 아버지를 겹쳐 보았던 것 같은.

그때였다.


“으응? 엄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요~.”

“우주야…….”

곤히 잠든 줄만 알았던 우주가, 유서를 읽는 소리에 깨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그러더니 얼른 설원의 무릎 안에 자리를 파고들며 앉았다.

보들보들한 우주의 머리카락이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문득 설원은 깨달았다.

엄마가 늘 입고 있던 베이지색 스웨터의 포근한 감촉.

그것은 우주의 강아지 같은 머리카락과도 똑 닮아 있었다.

사랑은 여전히 이어지며, 곁에 존재한다.

엄마가 제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랑.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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