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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외갓집 (100/111)


100. 외갓집
2023.07.16.



 

<백영 그룹의 차녀이자 사라 코스메틱의 대표인 백사라 씨가 지난 주말, 음주 상태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백영 측에서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나 구속 영장이 발부된 것과 관련해 신변에 비관을 느낀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흘러나오고 있는데요.

한편 장남인 백재영 씨 또한 유치장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등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실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는 예측입니다. 더불어 백영 및 계열사의 주가는 나날이 추락 중이며…….>

틱.

보고 있던 뉴스 화면이 갑작스럽게 꺼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채하가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채하 씨…….”

“당신은 저런 거 볼 필요 없어.”

“…….”

설원이 잠시 침묵했다. 뉴스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백사라의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

물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사라에게 있어선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될 터였다.

그녀는 급격한 커브 길을 돌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았고,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삽시간에 차에 불이 붙는 바람에 얼굴을 비롯한 피부에 큰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내부에서는 철저히 입막음하려 하고 있지만, 코스메틱의 대표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흉측한 꼴이 되었다고 했다.

특히나 손은 반쯤 뭉그러지다시피 했다고.

병원 VIP실에서 짐승 같은 절규가 내내 흘러나오는지라, 암암리에 비밀이 퍼지는 모양이었다.

참 묘한 운명이었다.

설원의 차를 방파제 아래로 밀었던 백사라 자신이, 똑같이 차와 함께 추락했으니.

게다가 우주를 불이 난 건물에 밀어 넣기까지 했는데, 정작 불이 붙은 건 그녀였다.

설원을 속이려고 어머니의 병원 앞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5년 뒤 또다시 협박하러 불러냈을 때.

화려한 큐빅이 붙어 있던 백사라의 손톱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이제 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손톱을 가질 수 없으리라.


“설마 동정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설원이 단호하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인과응보란 것에 대해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을 뿐, 동정심 따윈 추호도 들지 않았다.

백사라가 저와 제 소중한 사람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저 정도의 대가는 오히려 별거 아니었다.

설원의 대답에 담긴 진솔함이 느껴졌는지, 채하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로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빗어 넘겨주었다.


“민설원. 당신은 이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면 돼. 내가 그렇게 해줄 거야.”

“……채하 씨.”

휙, 하고 채하가 설원의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게 했다.

방금 뉴스 화면을 볼 때의 차가운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따사로운 시선이 설원의 뺨 위로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 보고 싶은 게 있지 않아?”

“보고 싶은 거요?”

“그래. 이를테면 당신이 살았던 섬 풍경이라든지.”

“아…….”

설원이 커다랗고 맑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안 그래도 이제 우주와 함께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했으니,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혹여 채하가 재윤 때문에 거리끼지 않을까 괜한 노파심에 차일피일 말을 꺼내는 것을 미루고 있었을 뿐.

한데 먼저 흔쾌히 제안해주다니, 새삼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요즘 날씨도 좋은데, 주말에 우주랑 다 같이 가서 최재윤 씨의 부모님께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할까.”

“……고마워요.”

“흠. 그 표정은 꼭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섬엔 안 갈 거라고 의심했던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피식, 채하의 입가에서 다정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농담이야. 당연히 백 번을 인사드려도 모자란 분들이지. 오히려 너무 늦어서 당신한테 면목이 없어. 당신한테는 외가나 마찬가지인데.”

“외가…….”

새삼스레 설원은 채하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외가. 신기하리만치 가슴이 따스해지는 단어였다.

*



“할머니~ 할아버지!”

“오냐. 오냐. 우리 아가 왔구나!”

“어서 와. 설원아. 그리고 권채하 씨도.”

오랜만에 돌아온 섬의 풍경은 여전했다.

정말로 외갓집처럼 재윤의 부모님은 그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설원이 온다는 소식에, 재윤 또한 주말을 이용해 섬에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죄송해요. 진작 왔어야 했는데…….”

이미 우주를 목말 태우고 어화둥둥 하고 있는 재윤의 부모님을 향해, 설원이 말끝을 흐렸다.

결국은 이 섬을 떠난다는 결론을 가지고 방문했기에,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반면 그들의 표정은 되레 홀가분해 보였다.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죄송할 게 뭐 있니. 자자, 얼른 가자. 마침 서해안 꽃게가 제철일 때 잘 왔다!”

“으응~? 꽃게요?”

“그래. 우리 우주, 이 할머니가 꽃게 잔뜩 삶아놨단다.”

“우주 꽃게 먹을래요~.”

“오냐. 자, 가자!”

잠시 후, 그들은 재윤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 뒤편의 평상에 둘러앉았다.

뜻밖에도 거기엔 이미 다른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이야~ 우리 설원 씨 부잣집 사모님이라더니 때깔이 달라졌네!”

“남편분이 아주 훤칠한 게~ 꼭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같구만! 세상에, 너무 잘생겼네.”

“그럼 우리 우주가 재벌가 도련님인 거여~?”

어찌 된 일인지 동네 사람들이 반은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채운 그룹의 부사장이 섬에 온다는 소식이 섬에 다 퍼진 모양이었다.

5년이나 늘 봐왔던 설원과 우주를, 새삼스레 구경하는 섬사람들의 눈동자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거, 저번에 김 씨네 놈팡이 아들놈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면서?”

“아…….”

너튜버 사건은 채하가 뒤에서 미리 손을 써 무마되었는데, 섬사람들은 이미 돌아가는 사정을 다 파악한 모양새였다.

그 경위는 재윤 아버지의 입으로 밝혀졌다.


“그놈이 술 먹고 술술 불어서 알게 됐다. 이중으로 돈을 받아먹었다고 자랑을 떠벌리더구나. 지금은 제 부모가 섬 밖으로 내쫓았으니, 행여나 마주칠까 봐 걱정할 필요 없어.”

“자자, 쓸모도 없는 놈 얘긴 그만하고 앉아서 꽃게나 듭시다! 아주 올해 꽃게가 풍년이에요.”

그 말대로 거대한 찜통을 열자 희고 뽀얀 꽃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통하고 알이 꽉 찬 것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와! 꽃게가 엄청 엄청 커요~.”

“우리 우주가 왕 집게 들고 먹자.”

앞다투어 우주에게 꽃게 다리를 내밀며 섬사람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어느새 우주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자리가 만들어졌다.


“서울 가더니 서울 도련님이 되어서 왔네, 우리 우주!”

“우주 키도 많이 큰 것 같은데?”

“우리 우주,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

우주의 인기가 폭발하는 와중, 파지직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제야 우주에게 꽃게 살을 발라주고 있던 청년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기류의 근원지는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있는 채하였다.


“제 아들을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없이 정중한 말투였지만, 꽃게 다리를 든 청년들의 손이 주춤거리며 아래로 떨궈지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랬다. 우주의 옆을 둘러싼 청년들의 정체는 바로 우주가 채하에게 6호 아빠 자리를 제안하며 이야기했던 2호, 3호, 4호, 5호 아빠였다.


“아, 아닙니다. 하하. 당연히 돌봐야죠. 우리 섬의…… 얼마 안 되는 꼬마인데요.”

우주와 마찬가지로 섬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설원이 제게 눈치를 주는 게 느껴졌지만, 채하는 굴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지만 참 붙임성이 좋지 않습니까?”

“아, 네에…….”

왜인지 그 말에 2호에서 5호 아빠들은 직감했다.

오늘이 바로 우주에게 얻은 이 귀여운 호칭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라는 걸.

채하가 무어라 더 유치한 발언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한 손에는 통통한 꽃게 다리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우주가 채하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빠예요! 엄청 엄청 멋지죠?”

그 깜찍한 자랑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재윤이 운을 띄웠다.


“자, 그럼 이참에 호칭을 좀 정리해볼까? 우주야. 이제 여기 이쪽 아빠들은 아빠 아니고 삼촌들이라고 부르는 거야.”

“삼촌? 좋아요! 전부 우주 삼촌 해요!”

“음. 그런데 내가 좀 헷갈리긴 하네.”

재윤이 또다시 숫자를 매겨야 하나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채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최재윤 씨는 외삼촌으로 하죠.”

“외삼촌……이요?”

“예. 우주한테 최재윤 씨 부모님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최재윤 씨도 외삼촌으로 하는 게 마땅하죠.”

뜻밖의 후한 대우에 재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여세를 몰아 채하가 갑자기 평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

꽃게를 먹다 말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어진 채하의 행동에 그 자리의 모두가 그만 말을 잃었다.

놀랍게도, 그가 재윤의 부모님을 향해 큰절을 올린 것이었다.


“어머나, 일어나요. 어서.”

“제 아내를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주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신 것도, 정말이지 백 번을 절해도 부족할 만큼 감사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뭘 했다고. 오히려 우리가 설원이한테 은혜를 입은 건데.”

“염치없게 지금에야 남편이랍시고 나타났지만, 앞으로 제가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재윤의 부모님이 서로를 응시하더니, 이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치 사위를 대하듯 채하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설원의 눈꼬리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잠시 후, 다시 자리에 앉은 채하에게 재윤이 살이 꽉 찬 꽃게 한 마리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채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그 꽃게와 재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 형님이 주는 꽃게니까 받으라고요.”

“형님?”

“흠흠. 외갓집이면 내가 설원이 오빠인 셈이니까, 권채하 씨는 처남이 되는 셈이죠. 이거, 앞으로 내 눈치 좀 봐야겠는데?”

둘 사이에 옅은 침묵이 깔리는 걸 목격한 설원이, 무어라 만류하려 했다.

한데 오늘은 정말이지 놀라운 날인 모양이었다.

채하가 순순히 그 꽃게를 받아 들더니, 대뜸 재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곧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채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내를 구해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재윤 씨. 앞으로 잘 지내보죠. 우리 우주의 외삼촌으로서.”

제가 뱉은 농담에 되레 제가 민망해진 재윤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꽃게 살만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호되게 부모님께 등짝을 맞고서야 그만두었다.

모두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참 이상했다.

익숙한 바다 내음도, 낮게 날고 있는 갈매기도, 떠 가는 조각배들도, 섬의 풍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풍경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재윤의 가족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채하를, 설원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바로 그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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