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엄마랑 아빠는 바빠
(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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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엄마랑 아빠는 바빠
2023.07.12.
“그…… 그만. 그만 해요.”
“왜? 아내 뺨에 뽀뽀도 못 하나?”
귓가를 간지럽히는 태연자약한 목소리에, 설원이 바둥거리며 채하를 밀어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다급하게 머리맡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가리켰다.
“아침이잖아요. 채하 씨. 해 뜬 거 안 보여요?”
“보여.”
“그러니까 이제 그만…….”
“어쩌지? 난 그만하기 싫은데.”
두 손이 탄탄한 그의 가슴팍을 부질없이 밀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되레 설원의 손목을 가볍게 붙들었다.
벌써 몇 번째 이런 상황의 반복인지, 설원이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마 위로 잔잔하고 기분 좋은 그의 웃음이 내려앉았다.
다만 여전히 유혹의 기미가 희석되지 않은 웃음이었다.
애쓴 보람도 없이 설원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채하가 야릇하게 속삭였다.
“아직 남은 게 있지 않아?”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설원이 채하의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유혹에 더해 장난기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가 이미 설원의 몸을 떠나버린 슬립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내가 알기론 이 슬립은 결혼 기념 선물이었던 것 같은데.”
“맞……는데. 그게 왜요?”
“흠. 로라랑 제임스가 이번 당신 생일에도 놀라운 선물을 주지 않았나?”
“……!”
허를 찔린 설원이 입술을 살포시 벌렸다.
과연 그런 게 있었더랬다.
하지만 나름 시도해볼 만하다고 여겨진 이 슬립에 비해, 그 생일 선물은 세상의 빛을 보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남사스러운 것이었다.
선명한 빨간빛의, 몸에 걸칠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운 천 조각.
여기저기 뻥 뚫려 있어 공기가 슝슝 통할 것 같은 그 선물을 떠올리자 설원의 뺨에서부터 홍조가 퍼져나갔다.
가을 단풍처럼 또 붉게 물드는 그녀의 모습을, 채하는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결코 이 밤이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다.
설원은 허둥지둥 이불이며 베개며 부산스럽게 정리하는 척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역시나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어딜 도망가.”
“…….”
천천히 그가 설원을 다시 끌어당겨 제 가슴팍 위로 겹쳐 올렸다.
뭐라도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설원은 눈을 슬며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 나중에 신혼여행이라든지, 그런 곳에서…….”
아주 잠시 침묵이 깔렸다. 정말로 잠시.
이어 채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불 위로 뭉게구름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더니만 순식간에 낮게 잠겨 그녀를 잠식했다.
“민설원, 당신은 정말이지 나를 애태우는 법을 잘 알아.”
무어라 항변하기도 전에, 갑자기 쪽쪽 소리가 마구 쏟아졌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채하가 그녀의 이마, 콧날, 뺨에다 대고 자잘한 버드 키스를 쏟아붓고 있었다.
넘치게 사랑받는 감각이 못내 다정해, 이번에는 그를 밀어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입맞춤의 비를 맞고 있기를 얼마 동안이었을까.
문득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설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이불을 끌어 올리곤 문 쪽을 보자, 거기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주가 서 있었다.
“으응~?”
“우, 우주야. 벌써 일어났어?”
“네. 우주 화장실 가는데 이 방에서 쪽쪽 소리가 났어요.”
“…….”
무어라 둘러대야 할지 설원이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우주가 살랑살랑 발꿈치를 들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다람쥐와 도토리가 그려진 귀여운 가을 잠옷을 보면 혹시 집 나간 채하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설원은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우주로 인해 금세 깨져버렸다.
우주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쭈욱 내밀며 침대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우주도 엄마랑 아빠랑 쪽쪽~ 뽀뽀할래요.”
평소라면 당연히 넘치도록 뽀뽀해주겠지만, 아직 매무새를 정돈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모습을 다섯 살 아이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원이 당황하고 있던 그때였다.
웬일로 채하가 엄격한 어조로 우주에게 훈계를 했다.
“우리 아들. 엄마 아빠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해야지.”
“으응? 노크……?”
“그래. 엄마랑 아빠는 바빠. 그러니까 꼭 노크하고 들어와야 돼.”
“엄마랑 아빠, 바빠요?”
“아주 바쁘지.”
순수한 동심의 궁금증이 우주의 머리 위로 동동 떠올랐다.
이윽고 해맑기 그지없는 질문이 뽀뽀를 시도하던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왜요? 왜 바빠요?”
“둘째를 만들어야 하거든.”
“둘째~?”
우주의 동그란 눈이 더욱더 땡그래졌다.
채하의 입꼬리도 그에 비례해 쭈욱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 우주 동생 둘째. 우리 우주가 첫째니까, 둘째 동생이 생기면 우주는 형아가 되는 거야.”
“……형아?”
새롭고 신비한 단어를 들은 듯 우주의 두 뺨이 흥분으로 발그레해졌다.
“우주 형아 될 수 있어요?”
“물론이지. 엄마랑 아빠가 바쁘게 노력하면.”
“정말……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황한 설원이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한데 우주는 채하의 말에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건네더니, 냉큼 문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주 갈게요. 엄마, 아빠! 우주 동생 열심히 만들어주세요~.”
“…….”
이럴 때 배꼽 인사를 하는 게 아닌데.
망연자실한 설원이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자, 뒤에서 채하가 또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석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들었지? 이리 와.”
기껏 돌돌 말린 이불이 도로 헤쳐지더니, 간지러운 손길이 살결을 스쳤다.
솜털이 곤두서는 아찔한 감각에 찾아오려던 졸음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말로 밤을 지새우고 말다니.
“출근 안 해요, 채하 씨?”
마지막 수를 던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저를 휘감는 커다란 손이었다.
이어질 열띤 아침을 예고하는 대답과 함께.
“휴가 냈어.”
*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은 백사라에게 있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부와 명예. 지위와 자존심.
처음부터 다 갖고 태어나 잃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것들이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손바닥 안의 모래알처럼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백사라는 텅 빈 눈으로 제집을 둘러보았다.
부족한 거라곤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성 같은 집은 그녀의 완벽한 삶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공주 같은 인생을 영위하며 살았건만, 자칫하면 유치장 신세를 지게 생긴 판이었다.
배신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이어진 폭로와 자백.
그로 인해 낱낱이 드러난 죄상들은 예상보다도 훨씬 수위가 셌다.
이미 백재영은 먼저 잡혀갔고, 이번에는 제 차례였다.
백 회장과 진 관장은 차라리 자진 출석을 하라며 그녀를 회유했다.
물밑 작업에 힘쓸 테니 일단은 잠시만 참고 있으라는 어머니 진 관장의 권유에도, 백사라는 희망을 찾지 못했다.
구속 영장이 기각되기를 바라기에는, 그녀 자신도 저지른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유치장이 아니라 감옥에 처박히게 되리라.
장식장 안에만 진열되어 있던 고가의 와인을 들이붓다시피 마신 후,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짐승처럼 꺽꺽댔다.
울고, 고함을 지르고, 또 분노하면서 민설원과 권채하를 저주했다.
그들 사이의 아들도, 허영주도, 권강호도, 이미 세상을 떠난 민설원의 부모까지도 전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분노의 감정은 배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타올라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날 채운 가에서 개망신을 당한 뒤로, 잠을 이룰 수 없어 실핏줄이 다 터진 그녀의 몰골은 거울을 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짙은 화장도, 빛나는 보석도, 썩어가는 내면을 가려줄 수는 없었다.
“제기랄!”
들고 있던 와인 병을 기어이 집어던지며 백사라는 거친 절규를 토해냈다.
백재영이 끌려 나가며 제게 날린 비웃음이 잊히질 않았다.
그러게 방파제에서 진짜로 떠밀었어야 했다며, 미친놈처럼 키득댔던 백재영.
한심하게 제 밑의 인간들 하나 관리 못 해서 뒤통수를 맞은 백재영.
그놈에게 모든 죄상을 다 뒤집어씌울 수 있었는데, 비실비실한 끄나풀 자식이 설마하니 이중 첩자였을 줄이야.
하기야, 자신 또한 강 비서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지 않았던가.
“아아악! 짜증 나!”
사방팔방에 아군이 아닌 적만 모여 있던 셈이었다.
정말이지 한데 모아놓고 떠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민설원이라는 여자를 잡초처럼 하찮게만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을 ‘채운 가의 며느리’니 ‘채운 가의 유일한 손주’니 치켜세우며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해댔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제가 갖고 싶었던 전부가, 민설원. 결국 그 여자의 손에 들어가다니.
“하하하……. 하하! 하하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자, 와인 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벌써 몇 병을 마신 건지, 바닥에는 이미 빈 병들이 뒹굴고 있었다.
자신은 이런 꼴이 되었는데, 민설원은 채운의 사모님 대우를 받으며 권채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 정도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동시에 이대로, 여기에 무력하게 앉아서 감옥에 끌려가는 신세는 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그녀를 거세게 덮쳤다.
이성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백사라는 주차장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얼마 만의 바깥 공기인지, 아직 가을이건만 얼굴에 닿는 바람이 몹시 아렸다.
거칠게 운전석에 앉으며 그녀는 자신의 애마에 시동을 걸었다.
“어디, 잡을 테면 잡아보라지!”
난폭하게 액셀을 밟으며 백사라가 핸들을 휙 꺾었다.
어둠 속에서 선명한 빛깔의 외제 차가 공주님의 성을 빠져나갔다.
밤의 가로등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도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시속을 높이며 그녀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깔깔거렸다.
“둘이 행복하게 놔둘 줄 알아?”
취한 와중에도 백사라는 외곽 도로까지 제법 오랜 시간을 운전했다.
시속계에는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찍히기 시작했고, 점차 취기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시야를 흐렸다.
가슴 속을 맴도는 회한과 분노.
민설원을 방파제 아래로 떠밀었다면, 그랬다면.
그 방파제. 후에 몰래 권채하를 뒤따라 한 번인가 갔었던 강원도의 그 방파제.
“……어?”
이상했다.
분명 산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눈앞에 그때의 그 방파제가 나타났다.
놀란 백사라가 과격하게 핸들을 옆으로 꺾었지만, 차체는 이미 붕 떠오른 후였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방파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바다 내음이 난 듯한 착각도 들었다.
곧이어 귓가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더니, 퀴퀴한 연기와 함께 눈꺼풀이 닫혀갔다.
그 와중에 며칠 동안 손톱을 관리하지 않아 엉망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이런 거지 같은 모습은 용납할 수 없는데.
애써 손끝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그렇게 시야가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