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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선물의 정체 (98/111)


98. 선물의 정체
2023.07.09.



 


“손.”

어김없이 저를 붙드는 채하의 목소리에 설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 출근 전 코스라도 되듯 채하는 그녀에게 손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건만, 이 일은 좀처럼 쉬어가는 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또요?”

“연고 발라야지.”

“……진짜 괜찮다니까요. 벌써 며칠이나 지났잖아요.”

“내가 안 괜찮아. 그날 당신 손바닥이 얼마나 빨갛게 부어올랐었는지 못 봤어?”

이미 손에 짜도 짜도 끝이 없을 듯한 대용량 연고를 들고, 채하가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렇게 설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연고를 발라주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다름 아닌 며칠 전, 백사라의 뺨을 연타하느라 손바닥이 몹시 아팠을 거라는 것.

정작 호되게 맞은 건 백사라인데, 채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뇌리에서 지운 듯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못 이기는 척 설원은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손을 후후 불면서 깃털처럼 가볍게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백 씨 남매 일당을 응징할 때의 매서운 기세는 어디 가고, 눈앞의 권채하는 꼭 설탕 덩어리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간질간질, 살랑이는 손끝이 닿을 때마다 설원이 절로 움찔거렸다.

워낙 간지럼을 많이 타는 탓에 연약한 손바닥을 간질이는 채하의 손짓을 유독 견디기가 힘들어서였다.


“……앗. 으…….”

결국 간지러움에 굴복한 설원이 몸을 비틀며 손을 빼내려는 찰나였다.

채하가 강하게 손을 붙들고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갓 불을 붙인 심지처럼 타닥타닥 타오르는 시선으로.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이 내는 소리가 너무 섹시해서.”

“……이, 이 변태!”

순식간에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설원이 나머지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통통 쳤다.

이런 상황에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채하는 되레 유쾌한 듯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설원이 좋아하는 웃음.

왜일까. 문득 이 순간, 설원은 그와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펄펄 끓는 열로 아플 때조차 내외해야 했던 지난날들.

그의 아픔도, 자신의 아픔도 꼭꼭 숨기며 서로의 앞에 꺼내 보이길 꺼렸던 시절.

부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붙어 있었지만, 실은 등지고 서 있어 서로를 보지 못했던 세월이었다.

한데 지금은 스스럼없이 농담이나 장난기 어린 말들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깊은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설마 권채하와 이런 사이가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어 입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흠. 웃는 걸 보니 나랑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다시 침대로…….”

“아니에요!”

설원이 올라가던 입꼬리를 단호하게 일자로 다물었다.

여기서 말려들었다가는 우주의 아침을 챙겨줄 시간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으응~.”

마침 엄마의 위기를 눈치챘는지, 우주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

푹 자서 통통하고 발그레한 볼이 귀여워 설원은 얼른 채하를 등지고 아이에게 입 맞추러 가려 했다.

그러나 설원은 잠시 잊고 있었다.

연고를 든 팔불출이 된 채하만큼이나, 우주에게도 요 며칠 큰 변화가 생겨났음을.

그것은 설원에게는 아주 서운한 변화였다.


“아빠~ 우주 코 잘 잤어요.”

“그래? 누구 아들인지 참 잘했네.”

“아빠. 오늘은 회사 안 가는 날이에요?”

“응. 오늘은 우리 아들하고 종일 놀 거야.”

“와~! 엄청 엄청 좋아요. 아빠! 우주도 아빠랑 종일 놀고 싶어요. 아빠!”

“…….”

아빠, 아들. 두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 부자의 대화를 듣는 설원의 입이 샐쭉 나왔다.

대왕 아빠의 정체를 알게 된 우주는 며칠 동안 질리지도 않는지, 채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빠’라고 부르기에 바빴다.

둘 다 쫓아다니는 데 소질은 있어 보이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었다.


“우주야. 여기 엄마도 있는데~.”

“으응~?”

우주가 그제야 퍼뜩 설원에게 눈을 돌렸다.

마치 방금 발견했다는 듯 똥그래진 우주의 눈을 보며, 설원이 두 손을 힘없이 떨궜다.

채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모자 사이를 메웠다.


“……얄밉게 웃지 말아요.”

“하하. 어쩌겠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아빠가 좋다는데.”

“그래도 그렇지. 나는 부르지도 않잖아요.”

“당신은 엄마 소리 그동안 원 없이 들었잖아. 그러니 나도 아빠 소리 많이 들어야지. 안 그래?”

맞는 말인지라 설원은 무어라 토를 달지도 못하고 우주에게 애꿎게 되물었다.


“우주야. 아빠가 그렇게 좋아?”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순수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아빠 엄청 엄청 엄청 엄청~ 좋아요!”

어느새 졸음이 가셔 똘망똘망해진 얼굴로, 우주가 활짝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 가득 담긴 행복의 기운이 집 안 가득히 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우주, 혼자서 세수하고 올 수 있지? 엄마가 우주 좋아하는 팬케이크 만들어줄게.”

“응! 우주 어푸어푸하고 올게요~.”

발랄하게 콩콩 뛰며 우주가 다시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설원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주말에는 조금 손이 가더라도 직접 음식을 하고 싶어서 아주머니를 부르지 않기로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연고를 발라주고, 시도 때도 없이 열띤 눈빛을 발사하는 채하의 모습을 남에게 보인다 생각하면 아찔했으니까.

한데 채하에게는 다른 의미로 잘한 일인 모양이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등 뒤에 묵직하게, 그가 찰싹 달라붙었다.


“왜 이래요? 나 팬케이크 반죽해야 하는데…….”

“해.”

“채하 씨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반죽을 해요.”

설원이 툴툴거리며 저를 품 안에 가두고 있는 채하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그들만 온전히 있기에 이런 은밀한 스킨십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그는 원 없이 누리고 있었다.

볼멘소리에도 몸을 떼어내기는커녕, 채하는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바짝 붙이곤 속삭였다.


“아까 우주가 기뻐하는 거 보니 기분이 참 좋았어.”

“……우주가 진짜 아빠가 생겨서 정말로 기쁜 것 같아요.”

“기왕 기쁘게 해줄 겸 우주가 오매불망 바라는 동생도 얼른 심어주는 게 어때.”

“동생…….”

벌써 몇 번이나 하는 유혹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설원이었다.


“그래.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번처럼 괜히 집 정리한다는 둥 일부러 바쁜 척하지 말고. 응?”

“아이의 아침을 만드는 시간에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이따 다시 얘기할까. 밤에. 진지하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귓불이 따스한 숨결에 머금어졌다.

뒤돌아보면 붉어진 얼굴을 들킬 것 같아, 설원은 애써 태연한 척 반죽만 저었다.

젓고, 젓고, 또 저었다.

*



“……?”

복도의 어스름한 불빛이 문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있던 채하가 가느다란 시선으로 열린 문틈을 응시했다.

거기엔 우주를 재워주러 갔던 설원이 돌아와서 서 있었다.

다만 평소의 수수한 가을 잠옷 차림이 아니었다.


“…….”

조금 더 문이 열리자 그녀의 실루엣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채하의 말문이 턱 막힘과 동시에, 들고 있던 손목시계가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문 너머에서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채하 씨.”

“……민설원.”

이름을 부르면서도 눈앞의 설원이 진짜 설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제 사랑스러운 아내는 얇디얇아 반쯤 비치는 레이스 슬립을 걸치고 있었다.

희고 투명한 피부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 슬립은, 보는 것만으로도 하늘하늘해 꼭 요정의 날개옷 같았다.

당연히 그 옷을 입고 있는 설원은 요정 그 자체였고.

귀 뒤로 넘긴 길고 찰랑이는 머리카락에서는 싱그러운 꽃향기가 풍겨왔다.

살짝 시선을 내리자 과감하게 드러난 가녀린 두 어깨와 쇄골,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굴곡이 채하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게다가 어찌나 잘 만든 날개옷인지 길이도 완벽했다.

한 손에 잡힐 듯 가느다란 허리와 뽀얀 허벅지까지, 몇 초 본 것만으로도 아찔해져 왔다.

격하게 느껴지는 몸의 반응이 아니라면,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마법의 옷이네. 순식간에 이렇게 나를 미치게 하는 걸 보면.”

“……채하 씨.”

사뿐사뿐, 설원이 소리 없이 침대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곧 그녀가 침대 중간쯤에 가볍게 앉았다.

그 사소한 몸짓마저도 꼭 요정이 날아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참지 못하고 채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목선을 따라 느릿느릿 쓸어내렸다.


“이게 제임스와 로라가 준 선물인가? 핑크색으로 은밀하게 포장되었다는?”

“……맞아요. 꺼내는 데 너무 오래 걸렸지만.”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들 말이 맞았어. 정말로 나를 딱 미치게 하는 옷이야.”

수줍음에 설원이 눈을 내리깔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뺨에 번지는 홍조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생생히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예쁜 입술을 열고 쑥스러운 듯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나도 우주 동생을 만드는 데 찬성이에요. 우주도 이제 다섯 살이고, 또…….”

덧붙일 말이 충분치 않았는지 설원의 뺨이 더욱이 짙게 붉어졌다.

그 모습에 아까부터 이미 아슬아슬했던 채하의 인내심은 급격히 동나버렸다.


“당신이 이렇게 입고 있으면, 둘째를 가지는 건 수월하겠어.”

“……네?”

“이리 와. 설원아.”

아주 오랜만에, 성을 떼고 부른 이름을 설원이 미처 멋쩍어하기도 전이었다.

침대 가운데 걸터앉았던 그녀의 몸이 가볍게 들려 채하의 위로 옮겨졌다.

곧바로 말간 복숭앗빛 살결 위로 자잘한 입맞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열띤 그 애정 공세에 뜨거운 열기가 금세 그녀의 몸 안으로 고여 들었다.

그의 입술이 설원의 촉촉한 입술을 머금었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

뜨거운 입맞춤이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며 그녀를 깊게 파고들었다.

이제 키스 정도는 일상이 되었다고 여겼건만, 오산이었다.

제가 유혹해놓고 되레 수줍어하는 설원의 모습에 채하 역시 빠르게 열기에 휩싸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밤새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이제야 이 비밀스럽고도 완벽한 선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허투루 할 수 있겠는가.

손짓도, 눈짓도, 몸짓도,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한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입술 역시도.

시선이 얽히는 순간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는 통에,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그 밤,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부드럽고도 격렬한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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