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몰락
(97/111)
97. 몰락
(97/111)
97. 몰락
2023.07.05.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남매를 힐끔대며, 장민식과 강 비서는 눈치를 살폈다.
이제 권강호는 아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들이 벌이는 극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이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자, 이제 등장인물이 다 모였군.”
“채, 채하 씨. 저 남자는…….”
“괜찮아. 놈은 당신 털끝도 다치게 할 수 없을 테니까. 내 옆으로 가까이 와.”
여유가 물씬 풍기는 채하의 말투에 설원은 애써 불안감을 달랬다.
설마 저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비록 5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당시 겪었던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떨렸다.
채하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아 품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말문을 잃은 백 씨 남매를 향해 다시 음산하게 일갈했다.
“왜 그러지? 둘 다 아주 열렬히 찾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권채하,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이야?”
분을 삭이지 못한 백재영이 기어이 씩씩 소리를 내자, 채하의 입에서 피식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짓이냐고? 그건 내가 백재영, 네놈한테 물어야 할 질문 아닌가? 대체 내 아내한테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응?”
“…….”
“뭐, 그대로 입 다물고 있어도 상관없어. 네가 시킨 짓은 이미 전부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채하가 장민식을 향해 눈짓하자, 그가 한없이 비굴한 태도로 히죽거렸다.
“형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전 다 불었어요. 제 옷 단추에서 지문도 나왔걸랑요. 헤헤.”
“뭐? 단추?”
“이놈이 내 아내를 납치하고 감금할 때 아내가 잡아 뜯은 거야. 벌써 지문 감식 결과도 나왔지. 네놈이 돈을 주고, 모든 일을 지시한 게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지.”
이마까지 벌게진 백재영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장민식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XX! 감히 네놈이 날 배신해? 어?”
“어어. 형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게 제가 잘 숨어있도록 넉넉하게 자금을 주셨어야죠!”
“뭐야? 이 빌어먹을 새끼가!”
두 사람이 회포를 풀며 실랑이하는 사이, 한쪽에서는 불길한 적막이 감돌았다.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음에도, 백사라의 낯빛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드러나 있었다.
외국으로 도주했어야 할 강 비서가 권채하와 함께 나타났다…….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을 겨우 파악한 그녀가 콱 깨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강 비서. 왜 강 비서가 여기에 있지?”
“……대표님. 저는…….”
“아니, 아니야. 됐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아무 말도…….”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전 더는 못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강 비서가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이어 그가 옆에서 실랑이 중인 백재영 일당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외쳤다.
아니, 자백했다.
“건물에 불이 났다고 권채하 부사장님께 알린 게 바로 접니다.”
“……뭐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차마……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었어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제 아이들이 생각나서……. 비록 돈은 없어도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잘근, 백사라가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함이 배가 될수록 깨무는 강도도 세져, 이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반면 분노를 다스리는 자제력은 급속도로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날 배신하고 내 연락도 안 받으셨다?”
강 비서의 두 눈에서는 이제 콸콸 눈물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후회했습니다! 처음부터…… 대표님이 시킨 일들을 거절했어야 했는데. 트럭으로 아이를 치려 했다니, 저도 정말 미쳤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뭐, 뭐야? 트럭으로 아이를 쳐?”
그 말에 권강호 뒤에 숨어 있던 허영주가 기함을 하며 튀어나왔다.
눈알을 커다랗게 뜨고 허영주는 백사라의 철면피 같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라 너, 네가 꾸민 짓이었구나. 역시!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어?”
“……하!”
백사라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제게 입안의 혀처럼 굴던 허영주의 태세 전환이, 그녀 안의 발작 스위치를 눌렀다.
백사라가 광기 어린 눈으로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사람이냐고요? 이거 왜 이러실까? 여기 있는 이 며느님하고, 배 속의 아이를 처리해달라고 저한테 부탁한 게 누구셨는지 잊으셨어요?”
“너…… 너!”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모님 소원대로 저세상에 보내주려고 한 것뿐인데, 뭘 그렇게 화내세요.”
“저, 저, 저, 마귀 같은 년!”
허영주가 뒤로 넘어가며 제 가슴을 팡팡 쳐댔다.
윤 실장이 다시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백사라를 쏘아보았다.
제 주인도 못된 심보라면 뒤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백사라는 그 레벨이 달랐다.
“며느리 삼고 싶어서 그렇게 벌벌 기실 땐 언제고, 마귀 같다고요? 하! 웃기지도 않아. 정말! 이래서 천박한 출신들은 애초에 상종하면 안 된다니까!”
눈이 희번득해진 백사라가 들으란 듯 설원을 향해 외쳤다.
모든 것의 시발점이자 원흉.
그녀를 지금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천박한 여자.
그에 생각이 미치자 백사라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바로 눈앞에 원수가 있지 않은가.
제 것이었던 권채하를 빼앗고, 그의 아이를 낳고, 허영주마저 등 돌리게 만든.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민설원. 너만 없었으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백사라가 설원을 향해 기다란 손톱을 뻗었다.
흉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설원아!”
놀란 채하가 백사라의 공격을 막으려는 찰나였다.
짜악! 하는 소리가 먹먹하게 귀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찾아온 침묵과 함께, 그 자리의 모두가 두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너……. 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백사라는 방금 맞은 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얼한 기운이 얼굴 반쪽으로 퍼져나가자,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분기탱천한 백사라가 반대쪽 손을 설원을 향해 치켜들었다.
“민설원! 이 나쁜 년!”
이번에도 백사라의 손은 설원에게 닿지 못했다.
짜악! 오히려 당당하게 한 발짝 나간 설원이 더욱더 세게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곱게 화장한 얼굴이 흉하게 붉어지고,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설원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백사라의 인생에서 타인에게 따귀를 맞은 것은 처음일 터였다.
그것도 이렇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마침내 설원의 손이 멈췄을 때, 백사라는 반쯤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다.
그 비참함에 더해 강 비서의 고해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 이미 자수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네놈들은 내가 신고했고.”
채하가 백재영과 그의 수하를 보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마침 타이밍 좋게, 채운 가의 높다란 담벼락 너머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굳어 있던 그의 입꼬리가 마침내 호선을 그렸다.
“이런 걸 일망타진이라고 하지. 아마.”
*
“제발 용서해 주게.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딸과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으로 백 회장은 남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오랜 친우임에도 늘 제 밑으로 여겨왔던 권강호에게.
몸을 바짝 굽히고 있는 백 회장의 모습은 드물게 초라해 보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바야흐로 지금 백영은 시한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5년 전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 것은 물론이고, 납치에 방화 사주까지.
백재영과 백사라의 악행은 줄줄이 물꼬를 트며 드러나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건물에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백사라에게, 명한은 오가던 혼담을 즉시 철회했다.
뿐만 아니라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까지 하고 나섰다.
한 번 시작된 악재는 연달아 줄줄이 터졌다.
백사라가 고용했던 너튜버는 이제 와 양심 고백을 한답시고, 그녀가 민설원을 모함하라 사주했음을 채널에 공개했다.
그 건으로 조회 수가 대박이 터졌으니, 정말로 양심 고백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당연히 사라 코스메틱의 주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락 중이었다.
백재영의 엔터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 실장이 공개한 각서 덕분에 백재영의 과거 또한 낱낱이 드러났다.
연인에 대한 배신과 낙태 강요.
비록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해도, 세간의 도덕적 잣대까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탓에 정윤서라는 여자를 향한 동정 여론은 일파만파 커졌다.
엔터 건물 앞에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사직을 요구하고 나섰고, 해당 엔터 소속 아티스트의 보이콧 이야기까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대대적으로 맞아보는 여론의 뭇매는, 천하의 백재영조차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전에 두 사람 다 실형을 피하는 게 문제였다.
본격적으로 캐내 보니 죄상이 차고 넘쳐,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것이, 지금 백 회장이 권강호에게 굽히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부탁하네. 구속만 되지 않도록 선처해주게. 이미 지나간 일들이 아닌가.”
“지나간 일이라…….”
쥐고 있던 따뜻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권강호가 차디찬 눈으로 백 회장을 응시했다.
이미 그 눈동자 속에 우정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며느리와 손주를 죽이려 들었던 인간들을 선처하란 말인가?”
“그,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백 회장은 바닥만 애꿎게 노려보았다.
권강호가 그들을 용서할 이유는 하등 없는 게 사실이었다.
정말로 그의 자식들이 모의해서 권강호의 식구를 해하려 한 게 맞았으니.
진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혔다.
이대로라면 평생을 일궈 온 백영의 이름과 업적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어떻게 거머쥔 부와 명예인데.
백 회장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갔다.
“도와주게. 이번 일을 도와주면…… 명한에게 주려던 리조트 부지는 물론이고, 그 리조트 사업 자금도 백영 측에서 전부 대겠네.”
아마도 천문학적인 금액이 되겠지만, 지금은 별도리가 없었다.
최근 흑자를 올리지 못한 채운으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니만큼, 적어도 고려해볼 만한 가치는 있으리라.
“저런, 백영 자네도 날이 무뎌졌군.”
“……뭐?”
조금도 망설이는 여지조차 없는 권강호의 말투에, 백 회장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자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찬찬히, 권강호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나? 백영이 내내 운운하던 그 부지, 리조트 설립이 어차피 허가되지 않을 거네.”
“그, 그게 무슨……?”
“틀어쥔 것에 그저 안주만 하고 살피지 않으니, 썩고 있는 줄도 몰랐겠지. 자네 조상님이 물려주신 그 땅은 애초에 유적 가치가 높은 곳이었네. 얼마 전부터 발굴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던데, 역사 쪽에도 관심을 좀 가져보지 그랬나.”
“……!”
명백한 낭패의 기색이 백 회장의 낯빛에 드리웠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권강호가 여유로이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안색이 허옇게 질린 그에게 최종 통보를 날렸다.
늘 기세등등했던 백영에게 있어 몰락의 신호탄을.
“이미 늦었네. 구속 영장이 지금 막 발부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