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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배신자들 Ⅱ (96/111)


96. 배신자들 Ⅱ
2023.07.02.



 


“……그러니까 당신이 불을 질렀다는 건가?”

“맞습니다.”

채운 가의 높은 천장 아래.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른 남자를, 채하가 의구심 가득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뒤에서 권강호와 허영주는 입을 꾹 다물고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난데없이 백사라가 범인을 잡았다며 웬 남자를 대동해선 찾아왔다.

이 황당한 상황에 그들은 일단 당사자인 채하 부부를 불러들였다.

채하의 옆에 선 설원은 불안한 눈빛으로 남자를 살폈다.

전혀 일면식이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인상만으로 평가할 순 없지만, 그런 중범죄를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미심쩍어하는 채운 일가와는 정반대로 백사라는 적군의 장수라도 잡아 온 양 의기양양했다.


“백사라, 네가 이 남자가 범인이란 걸 어떻게 알지?”

“아아. 이 남자, 백재영 옆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이거든요. 얼마 전에 오빠 회사에 갔다가 우연히 둘의 대화를 엿들었어요.”

채하의 추궁에, 백사라는 막힘없이 내막을 밝혀왔다.

언뜻 그럴싸한 내용이었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것을 설원은 금세 간파했다.

마지막에 백사라가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백사라 씨? 이 남자가 5년 전에 내 차를 방파제 아래로 밀었다고요?”

“그래요. 본인이 다 자백했어요. 이봐, 맞지?”

“맞…….”

남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설원이 그들의 앞으로 돌연 나섰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본 적도 없어!”

“……에?”

“5년 전에 내 차를 민 남자는 나를 끌고 가서 감금까지 했어요. 그 인간 때문에 난 엄마 장례식에도 못 갔다고요! 그런데 내가 그 남자 얼굴을 잊었을 거 같아요?”

대본에 없던 내용에 남자가 백사라를 힐끔 곁눈질했다.

백사라와 남자가 시선을 교환하려는 찰나, 채하가 다시금 설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한없이 한심하단 눈빛으로 백사라를 노려보았다.


“궁지에 몰리니 하찮은 잔꾀나 부리는 모양이군. 대본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 안 들어?”

“채, 채하 씨. 아니에요. 잔꾀라니, 이 남자가 정말로…….”

“정말로 뭐?”

무미건조한 말투에선 그녀의 주장에 대한 믿음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백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그 입술이 변명을 쏟아내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고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백사라. 너 정말 완전히 돌았구나?”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백재영이었다.

눈앞의 이 마른 남자를 빌어, 배후의 진범으로 몰리고 있는 당사자.


“……뭐야? 오빠가 여길 어떻게……!”

움찔하며 놀라는 백사라를 향해, 백재영이 유쾌하단 듯 껄껄 웃어 보였다.


“어지간히 급하긴 했나 보네. 그런데 그새 잊은 거냐? 이 남자는 내가 아~주 아끼는 인재라고 했을 텐데.”

“……설마?”

“내가 너한테 괜히 내 사람을 붙여준 게 아니거든. 그동안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수집했지. 이번에 이 몸에게 방화 사건을 뒤집어씌우라는 사주를 한 것까지 말이야.”

“……!”

백사라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백재영의 끄나풀답게 그는 시선을 요리조리 피해버렸다.

곧이어 백재영이 자그마한 녹음기를 꺼내 들더니, 음성 파일 몇 개를 재생했다.

거기엔 설원이 섬에서 외간 남자와 살았다는 추문을 만들라는 지시부터, 너튜버를 고용한 일 등 백사라의 그간 행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음성 파일을 듣는 채운 가 일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백사라가 허영주와 만나 5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것까지 흘러나오자, 허영주는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어차피 채하에게 다 들통난 일이긴 했으나, 남편 권강호와 설원까지 있는 자리에서 낱낱이 제 죄가 드러나고 있었으니.

반면 백사라 본인은 오히려 빳빳한 태도로 양 팔짱을 낀 채 웃음을 지었다.


“이런, 오빠가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꽤 용을 썼네. 이런저런 공작을 다 하고 말이야.”

“공작이 아니라 진실이지. 안 그러냐?”

“그래? 그런데 왜 정작 차를 밀어버린 게 오빠 짓이라는 사실은 쏙 빠졌을까?”

“주도자 모르냐, 사라야? 일을 꾸민 게 누군지를 생각해 봐. 응?”

채운 가 거실 한복판에서 그야말로 남매의 난이 벌어지고 있었다.

권강호의 표정은 노여움으로 딱딱하게 굳어갔고, 허영주는 어깨를 파들거리며 윤 실장에게 휘청이는 몸을 기댔다.

둘의 대치를 관망하고 있는 채하를, 설원 또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 속엔 폭발 직전의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침내 채하의 입술 사이로 스산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 목소리에는 언뜻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백재영. 백사라. 그렇게 싸울 것 없어. 두 사람 모두에게 내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 남자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거실에 서 있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렸다.


“헤헤. 여기 있습니다. 권채하 부사장님.”

“……?”

“……?”

갑자기 꾸벅 허리를 굽히며 채하에게 그 물건을 건네는 남자를, 백 씨 남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곧 그가 건넨 물건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백재영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왜 그렇게 놀라? 이게 뭔지, 아주 잘 아는 얼굴이군.”

“그…… 그걸 어떻게?”

“오래전 모델이긴 하지만, 녹화기능까지 제법 쓸만하더군. 백재영. 백사라. 둘이서 내 아내의 사고를 모의하는 장면이, 목소리까지 아주 깨끗하게 담겨 있어. 바로 이 안에 말이야.”

휙, 백사라가 백재영 쪽으로 고개를 꺾고는 죽일 듯 그를 쏘아보았다.

후환이 없도록 뒤처리를 깔끔히 하라 했건만,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증거품을 남겨 놨다니!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어야 할 물건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당신!”

백사라의 고개가 이번에는 마른 남자를 향해 휙 꺾였다.

속았다. 제대로 낚인 것이다. 백재영도, 저도 함께.

백재영 또한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입까지 벌리고선 제 끄나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죽일 듯 노려보는 백사라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으며, 남자가 유유히 웃음을 흘렸다.

이전의 비굴하던 웃음과는 사뭇 다른 승자의 미소였다.


“그거 아십니까? 제 별명이 사실 빠른 손입니다.”

“……빠른 손?”

“제 안타까운 사연 좀 들어보세요. 제 고향이 강원도인데, 어릴 때부터 형편이 어려웠지요. 부모님께서 카지노 청소일을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습니다. 저도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카지노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했는데, 손이 빨라서 꽤 예쁨을 받았고요.”

난데없는 과거 얘기에 백 씨 남매의 표정이 동시에 험악해졌다.

그러나 채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들려주기 위해 데려온 것이리라.

해서 설원 또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어머니께서 부탁을 받고 손님 돈을 가져다드리는 중에 웬 놈이 그 돈을 갈취해갔습니다. 증거도 없어서 되레 어머니가 도둑으로 몰렸죠. 당연히 일자리도 잃었고요.”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백사라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렸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느긋하게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께선 단번에 빚더미에 나앉았습니다. 카지노에서 오가는 돈의 액수는 상상 이상이니까 말이죠. 정말이지 질이 나쁜 놈이었습니다. 울고불고 사정했지만, 오히려 사람을 풀어 아버지를 반 불구로 만들었거든요. 뒷배경이 아주 짱짱하더군요.”

“……너, 설마…….”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재영이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안색이 희게 질렸다.


“놈의 뒤를 봐준 인간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선 그놈들 때문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어요.”

“…….”

“그래서 저도 결심했죠. 놈들에게도 반드시 나락을 보여주리라.”

어느새 마른 남자의 흐릿하던 눈빛에는 이채가 돌고 있었다.

그 눈빛이 향하고 있는 과녁은, 명백히 백재영이었다.


“제 손이 빨라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덕분에 놈이 카지노 사물함에 숨겨놓은 이 블랙박스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요. 잊지 않으셨겠죠? 이걸 갖고 있던 장민식, 형님의 옛 부하 말입니다.”

밝혀진 진상에 백재영은 기함했다.

백사라의 뒤통수를 치려고 데리고 있던 것이, 실은 제 발등을 찍는 도끼였다니.

그것도 단번에 발목이 날아갈 만큼 강력한 도끼.


“카지노에서 도박꾼 행세를 하면서 조사를 좀 해보니, 우리 재영 형님과 놈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더군요. 블랙박스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습니다. 치밀하게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형님 곁에 붙어 있기로 했죠.”

“이 새끼, 너…….”

“아까 들려드린 녹취는 우리 화려한 여동생님 버전이고, 형님 버전도 당연히 있습니다. 말씀드렸죠? 제 별명이 빠른 손이라고. 특별히 형님은 핸드폰도 털었거든요. 아주 탈탈. 엔터 대표가 되겠답시고 이런저런 로비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야, 이 미친 새끼야!”

결국 참지 못하고 백재영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주먹은 남자에게 가 닿기 전에 채하에게 저지당했다.

싸늘한 시선으로 백재영을 내려다보며, 채하가 그의 팔을 비틀었다.

억! 소리와 함께 남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거기 서 계신 부사장님 비서분한테 특별히 장민식의 사진도 선물해드렸죠. 찾기 쉬우라고요. 역시 손이 빠르면 아주 쓸모가 많다니까요?”

“아!”

말없이 뒤에서 듣고만 있던 정 실장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외마디 외침을 내뱉었다.

그의 주머니에 사진을 넣은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남자의 활약상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러게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사는 법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백재영, 백사라 씨.”

남자가 또박또박 힘주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존칭을 싹 지우고 마치 죄인인 양 이름이 불리자, 백재영은 분노로 파들거렸다.

백사라 또한 파들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 오빠와는 달리, 그녀는 대놓고 발악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생쥐 같은 놈이 건방지게 날뛰어? 그따위 가짜를 증거라고? 헛소리하지 마! 나는 아무것도 시킨 적 없어!”

“허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한데요.”

차고 넘치는 증거가 한순간에 튀어나왔는데도, 백사라는 인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태껏 미끼로나 꿰어 쓰던 지렁이가 한순간에 튀어 올라 꿈틀거리자, 그녀의 이성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꺼져! 쓰레기 같은 놈이 어디서 이따위 더러운 수작을 부려! 회장님. 사모님. 속지 마세요! 돈을 노리고 저를 협박하려는 수작이에요!”

“글쎄, 과연 그럴까.”

백사라의 발악을 끊어내며, 채하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뒤로 이윽고 그림자 두 개가 나란히 등장했다.

설원의 눈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커다래졌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것은 백사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하의 뒤에서 나온 사람은 지금껏 말했던 백재영의 수하, 장민식이었다.

그리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백사라의 수족인 강 비서였다.

반쯤 혼이 나가 기절할 듯한 백 씨 남매를 향해, 채하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속삭였다.


“왜 그래? 두 사람이 애타게 찾고 있던 사람들을 내가 친히 데려와 줬는데, 반갑게 맞이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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