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배신자들 Ⅰ
(95/111)
95. 배신자들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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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배신자들 Ⅰ
2023.06.28.
하도 잘근잘근 깨물어댄 통에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졌다.
벌써 며칠째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칩거 중인지, 이젠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다.
귀신처럼 이불 밖으로 팔만 쭉 내밀곤, 백사라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이윽고 커다래졌다.
“……!”
벌떡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보호구처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 없이, 백사라는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채운 그룹의 부사장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이 떠 있었다.
그 보도에 따르면 며칠 전 권채하가 깨어났고, 오늘 아침 완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출근했다고 했다.
“채하 씨가…….”
초조한 듯 백사라는 손톱을 더욱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묘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권채하의 의식불명. 그것은 그녀가 짜놓은 판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제가 지금껏 보아온 권채하는 가족조차 남과 다를 바 없이 여기던 남자였다.
한데 설마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그 본인이 화마의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민설원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까득, 백사라의 손톱 밑 살에 새빨갛게 이빨 자국이 생겨났다.
“이 인간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뉴스 화면을 끄고 백사라는 연결이 되지 않는 통화 화면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바로 외국으로 떴어야 할 강 비서가 줄곧 연락 두절 상태였다.
집은 텅 비어 있는 데다, 외국에 있는 그의 가족 또한 소식이 닿질 않고 있었다.
어쩐지 일이 잘못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드물게 등장하는 적신호에, 피가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백사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벼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그녀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
“이야~ 우리 동생. 오늘도 아주 화려하시구만.”
수척해진 낯빛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화장에 공을 들였다.
거기에 이번 시즌 명품 의류로 몸을 휘감고, 번쩍이는 보석들까지 주렁주렁 치장했으니 백재영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고고한 태도로, 백사라는 백재영이 아끼는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런 그녀를 백재영이 관찰하듯 빤히도 응시했다.
저를 살필 틈 따윈 주고 싶지 않아, 백사라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 강 비서 좀 찾아줘.”
그녀의 부탁 아닌 부탁에 백재영이 흐응~ 하면서 목을 쭉 뺐다.
언제 봐도 재벌가 자제라기보단 날건달처럼 느껴지는, 불쾌한 몸짓이었다.
곧 그가 히죽거리며 대답을 해왔다.
“네 비서를 왜 나한테 와서 찾냐?”
“그건…….”
“예상은 했지만, 이번 불장난. 역시 사라 네 짓이었구만.”
정곡을 찔리자 움찔했지만, 백사라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시 빳빳하게 콧대를 높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사실을 망나니 같은 제 오빠에게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기진 않았으니.
“도와줘.”
“내가 왜?”
“그때 들었잖아. 채운은 이제 우리에게 공공의 적이야.”
식사 자리까지 야무지게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망신을 주었으니 백재영 또한 제법 울분이 쌓였을 터였다.
그 분노를 역이용할 셈이었다.
“공공의 적?”
“그래. 오빠하고 정 비서 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묻고 싶으면…….”
“어쩌냐, 사라야.”
대뜸 말허리를 자르며 백재영이 코웃음을 쳤다.
“거한 불장난 탓에 이번엔 한발 늦었네. 그걸로 날 협박할 속셈인가 본데, 아버지는 이미 그 일을 다~ 알고 계신다.”
“……알고 계신다고?”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백사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재미있다는 듯 실실거리며 백재영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때 우리가 떠난 뒤에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잘난 권채하가 다 불어버렸거든. 덕분에 이미 난 불려갔다 왔고.”
“……아버지가 부르셨다고? 불렀는데 별말 없었단 말야?”
“무슨 말? 엔터 부대표 자리를 내놓으라던가, 뭐 어릴 때처럼 자택 감금이라도 시킬 줄 알았냐?”
솔직히 그 비슷한 조치 정도는 취할 줄 알았다.
속내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는지, 백재영이 의자에서 일어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울리지 않게 담뿍 웃음을 띠고서 그가 여유롭게 말을 던졌다.
“사라야. 내가 애도 아니고, 게다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냐. 아버지도 피곤해하셔. 암묵적으로 묻겠다 하시는데 괜히 들쑤시지 말자. 응?”
기껏 태연자약하게 있었는데, 다시 지난 며칠처럼 어깨가 떨려왔다.
물론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로.
번들거리는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곤 백재영이 이때다 싶은지 훈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잊었어? 좋든 싫든 나는 네 오빠야. 내 추락은 네 명성에도 흠이 된다는 거 기억해둬라. 아, 지금은 사라 네가 추락하고 있는 건가?”
“…….”
백사라는 가는 눈을 뜨고 제 오빠를 한껏 노려보았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그는 위기에 빠진 그녀의 처지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 오빠 명성에 흠나지 않게 처신 잘해라. 불을 질렀으면 잘 꺼야지, 안 그래?”
한계였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테이블을 내려치며 백사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찾아와서 본전도 못 찾고 화재 사건에 대한 힌트만 드러낸 셈이었다.
문 역시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온 뒤, 백사라는 분을 견디지 못하고 씩씩댔다.
그때였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이야, 안녕하세요. 대표님 아니십니까.”
“……당신.”
인사를 건넨 것은 백재영이 보내주었다가 제가 도로 쫓아낸, 비실비실한 끄나풀이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날도 화창한데 좀 웃으셔야죠, 네?”
“지나가던 길인가 본데 가던 길 가. 괜한 사람 속 긁지 말고.”
“아이참. 서운하네요. 그래도 한때 같이 일했던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습니까.”
유들유들한 태도로 남자가 살가운 체를 했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인사 타령인지, 기가 차서 백사라는 홱 몸을 돌렸다.
한데 끈질기게도 남자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대표님 방에서 나오시는 거 보니, 뭐 중요한 일이라도…….”
“이봐, 당신! 자꾸 이따위로…….”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고, 백사라는 붉은 입술을 다물었다.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앙큼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구체화하며, 백사라가 태도를 바꿔 그의 인사에 응했다.
손을 까딱이며 그녀는 남자를 이리 오라 손짓했다.
“당신 말이 맞아. 한때 같이 일했던 사이에 내가 너무 매몰찼네. 그럼 우리, 내려가서 커피라도 한잔할까?”
급격한 태세 전환에 남자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무능력한 인간이라 별로 할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이 한가하고 비실비실한 어린양을 데리고 새로운 판을 짜기로, 백사라는 결심했다.
희생양은 당연히, 괘씸하기 그지없는 제 오빠였다.
*
“돈은 얼마든지 줄게. 감옥에서 썩다 나와도 억울하지 않을 수준으로.”
“그거 아주 솔깃하네요. 사실 저희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빚더미에 나앉았거든요. 운이 아주 나빴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런 운이 또 저한테 오나 봅니다.”
남자에게 보이지 않게 백사라는 삐죽 입꼬리를 올렸다.
한심하긴, 역시 돈이 궁한 인간만큼 손쉽게 조리할 수 있는 부류는 없었다.
아무리 차고 넘치게 돈을 받아도 감옥살이가 뭐가 좋다고.
“그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무슨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데요? 설마 살인이나……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런 거면 곤란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기껏 잡은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재빨리 그물을 치며, 백사라는 친근한 척 몸을 들이밀었다.
생글생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띠곤 그녀가 이 계획을 설명했다.
“별거 아냐. 그냥 방파제 아래로 차 한 대 밀어버렸다고 하면 돼.”
“예?”
“사람 없는 낡은 차야. 걱정할 거 없어.”
가슴께로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백사라는 그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진짜로 차를 밀었던 백재영의 수하는 행방불명된 지 오래였다.
듣기로는 도박장에서 돈을 탕진하고 주변에 원수진 자가 많다고 했으니, 모를 일이었다.
그 남자야말로 지금쯤 어디 가라앉은 신세가 되었는지도.
어쨌거나 나타나지도 않는 남자 대신에 대역을 내세우자는 작전은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대신 죄를 뒤집어쓰는데 안 된다며 원래 범인이 나타날 리도 없지 않겠는가.
“그때 너튜버 사건에서 얘기했었던 여자, 기억하지?”
“민설원 씨인가, 하는 여자요?”
“그래. 5년 전에 백재영이 시켜서 그 여자 차를 밀었다고만 하면 돼. 당연히 차는 빈 차였으니 안심하고.”
어차피 이후 민설원이 갇히고 도주하고의 과정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빈 차라는 말에 남자는 아리송해하는 기색이었다.
“백 부대표님이 왜 그 여자 차를 밀라고 시키죠?”
“그야, 백재영은 여색을 밝히는 난봉꾼이었으니까. 민설원을 어떻게 해보려다 안 되니까 앙심을 품고 바닷가로 끌고 간 거야. 차는 밀어버렸지만, 여자는 도주한 거지.”
“아아~.”
생각보다 쉽사리 넘어오는 기미가 보이자, 백사라는 중요한 본론을 조심스레 꺼냈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 차를 밀어버린 일 정도는 처벌 수위가 그렇게 높진 않을 터였다.
어차피 민설원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기도 했고.
다만 그녀가 며칠 전 저지른 일, 즉 강 비서를 시켜 아이를 납치하고 방화를 한 게 문제였다.
채하가 깨어났다고 했으니 이 전말을 알아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여자의 아이가 불이 난 건물에 갇혔었어.”
“아아, 뉴스에서 본 것 같습니다. 권채하 부사장님이 구하고 며칠간 의식을 잃었다죠.”
“……그것도 백재영이 시켰다고 해줘야겠어.”
“예에? 설마…….”
예상대로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금세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당연했다. 납치에 방화는 아예 다른 부류의 범죄였으니까.
“일단 들어봐. 자수하면 감형되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야. 게다가 어디까지나 백재영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면, 당신 죄는 더 줄어들 거고.”
“…….”
“이번에도 돌아온 그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다 안 되니까, 앙갚음하려고 아이를 데려가서 불을 지르라고 시킨 거지. 어때? 내 스토리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백사라는 여유만만한 표정 너머로 초조함을 힘겹게 감췄다.
상황에 따라선 제시한 금액에 공 하나쯤 더 붙일 각오도 하고서.
한데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탕 같아서 그토록 무시했건만, 이럴 때 장점이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겨우 마음이 놓이며 가슴 속 깊은 울분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새로 손질하고 온 손톱을 한번 후 불고는, 그녀가 남자를 향해 눈을 빛냈다.
“자, 그럼 우리 알리바이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