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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우주의 소원 (94/111)


94. 우주의 소원
2023.06.25.


그 발언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채하가 꼭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우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제야 그는 눈앞의 이 아이가 저를 대왕 아빠가 아니라 그냥 아빠라고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

그 사실을 깨달은 채하의 눈동자 속에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놀라움이 스쳤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채하는 설원을 바라보았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그녀가 긍정의 의미를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되묻기도 전에, 기특하게도 우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시금 당당히 선언했다.


“우주는 우리 아빠 아들이에요. 아빠 이름은 권채하니까, 나도 권우주예요!”

세 사람의 기적 같은 순간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가 넓은 품을 열고 손을 뻗었다.


“우리 아들, 이리 와.”

“아빠! 아빠!”

채하가 설원과 우주를 품 안에 끌어안으며 뺨을 비벼댔다.

마침내 마음이 놓였는지, 코를 훌쩍이며 우주가 채하를 꼬옥 단단히도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작은 두 손으로 아빠를 끌어안으며, 아이는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있잖아요. 우주, 별똥별 보면서 대왕 아빠가 진짜 아빠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별똥별?”

“응! 들판에 엄마랑 아빠랑 놀러 간 날~ 별똥별에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

“아…….”

천문대에서 빌었다던 소원이 그것이었나.

가슴이 울컥하면서도 벅차 설원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어설픈 대답 대신 설원은 그저 두 사람에게 폭 안긴 채 고개를 파묻었다.

엄마 아빠와의 행복한 포옹에 만족했는지, 우주가 앙증맞은 입술로 즐겁게 조잘거렸다.


“정말로 우주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거참, 이거 왜 갑자기 눈에서 물이 흐르나 몰라.”

“달링. 나도요.”

로라와 제임스가 서로 꼭 붙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것을 보며, 설원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별똥별은 다름 아닌 우주였다.


*

채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허영주와 권강호는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원이 떠나가라 요란스럽게 구는 허영주 탓에 제임스와 로라는 기겁을 하고서 돌아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이 면회를 하는 동안 설원은 재윤과 병원 바깥을 거닐기로 했다.

물론 우주도 함께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허영주와 우주를 같이 있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우주를 보는 그녀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오늘 하늘이 높고 맑네요.”

“엄마! 구름이 둥둥 크게 떠 있어요~.”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가을 하늘이었다.

뒤로 작은 언덕을 끼고 있는 병원은 어느덧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은 경황이 없어 보이지도 않던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설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인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설원아.”

다정한 음성에 설원이 힐끗 옆을 보자 재윤이 그녀를 향해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항상 친오빠처럼 든든하게 느껴지던, 바로 그 미소였다.

잠시 지그시 보더니 그가 결심한 듯 운을 떼었다.


“아무래도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일을 정리하고 섬으로 돌아가야겠어.”

“……재윤 씨.”

뜻밖의 통보에 설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그가 서울에서 내리 살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올해는 불과 두어 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덤덤하게 재윤이 말을 이었다.


“역시 나는 섬이 살기 편한 것 같아. 도시에서 작은 방에 혼자 갇혀 지내는 것보단, 섬의 바다 냄새를 맡으면서 배를 타고 넓은 바다에 있는 게 좋아.”

“으응? 섬으로 돌아가요? 재윤 아…….”

설원의 손을 잡고 있던 우주가 재윤에게 물으려다 문득 입술을 멈췄다.

습관처럼 부르곤 했던 ‘아빠’라는 호칭에 새삼 어색함을 느낀 탓이었다.

그러자 재윤이 우주를 향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주야. 이제 알겠지? 우주 아빠는 권채하 씨 한 사람이야.”

“으응~.”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우주는 지금 막 얻은 깨달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이제 재윤 아빠는 뭐라고 불러야 돼요?”

싱긋 웃으며 재윤이 우주 앞에 키를 낮추고 앉았다.

작은 두 손을 꼭 붙들고서, 재윤은 우주에게 친절히 답을 들려주었다.


“삼촌.”

“삼촌이요?”

“그래. 우주, 이제는 재윤 삼촌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 말에 우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곧 우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재윤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응! 재윤 삼촌!”

설원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피가 섞인 건 아니었지만, 이 순간 재윤은 정말로 우주의 외삼촌처럼 느껴졌다.

병원 주변을 가볍게 한 바퀴 돈 뒤, 설원은 우주를 데리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손을 휘휘 흔드는 아이의 얼굴에 그득한 ‘행복’의 감정이 재윤의 가슴도 충만하게 해주었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부모님께도 인사하러 갈게요.”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마. 무리할 거 없으니까.”

“고마워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요. 재윤 씨.”

시야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재윤은 한참이나 자리에 선 채 바라보았다.

이윽고 둘의 모습이 병원 안으로 사라지자 그가 커다란 단풍나무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홀가분하네. 속이 좀 쓰릴 줄 알았는데.”

막상 우주가 권채하에게 아빠라고 불렀을 때, 의외로 서운함은 별로 없었다.

그의 가슴 속을 차지한 감정은 우주에게 진짜 아빠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그간 우주가 내심 권채하가 아빠였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을, 재윤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것 역시도.

당연했다. 진짜 아빠니 끌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까 세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재윤은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들 셋은 이미 온전히 가족이라는 것을.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설원을 향한 마음을 접는 것일 터였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마음이, 묘하게 가벼웠다.


“아무래도 내가 결국 바란 건 설원이, 너와 우주의 행복이었나 봐.”

살랑, 하고 이마를 간지럽히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 드니 붉고도 선명한 단풍잎이었다.

꼭 우주의 자그마한 손 같아, 재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두 사람이 권채하의 곁에서 행복하다면, 응당 그래야 했다.

홀가분한 기분을 가득 담아 재윤은 기지개를 쭉 켰다.


“아아~ 날씨도 좋은데, 단풍 구경이나 더 하다 가야겠다!”

 

*

며칠 뒤, 채하는 완전히 회복해 회사로 복귀했다.

다행스럽게도 몇몇 상처만 제외하면 몸에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채하의 마음속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설원이 걱정할까 봐 며칠 동안은 회복하는 데에만 힘썼지만, 인내심은 진작에 바닥났다.


“부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라고 하세요.”

채하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약속한 정시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곧 부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익숙한 체크무늬 셔츠 차림의 남자가 여유롭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최재윤이었다.


“이야. 덕분에 대기업 부사장실 구경을 다 해보는군요.”

“구경하는 김에 저쪽 벽도 한번 보시죠.”

“벽이요? 아아…….”

재윤이 채하가 가리킨 벽을 보고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은 아마도 우주가 그렸을 게 분명한, 그의 그림이었다.

같은 남자도 감탄할 만한 미남을 이렇게 빗살무늬 토기로 그려놓다니, 우주의 예술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아들이 그림 그려줬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채하가 빙긋 웃더니 소파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으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윤도 웃음으로 응수하며 흔쾌히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경계심 없이 마주 앉은 두 사람이었다.


“사실 최재윤 씨 부모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만. 지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잠시만 미뤄두죠.”

“그래야죠. 동감합니다.”

재윤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 지퍼에 곱게 싸놓은 자그마한 물건이었다.


“이게 설원이가 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입고 있던 옷 속에 들어 있던 겁니다.”

“단추…….”

그랬다. 재윤이 건넨 것은 낡은 단추였다.

다만 여자 옷에 달린 단추가 아니라 남성용이었다.


“아마도 저항하다 옷자락을 찢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옷감도 조금 남아 있었는데 경황이 없어 잃어버리고, 이 단추만 남았어요.”

“…….”

대답 대신 채하는 물끄러미 그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설원이는 전부 잊고 싶어 했지만, 혹시 몰라서 보관해뒀습니다. 지문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요.”

“현명한 선택이었군요.”

“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설원이는 그 꼴로 섬에 오긴 했지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전부 자세하게 털어놓진 않았어요. 상처가 될까 봐 나도 자세히 묻진 않았고요. 하지만 며칠 동안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는 걸 정황상 알 수 있었죠.”

“그 추측이 맞습니다.”

이번에는 재윤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단추에 묵묵히 시선을 두었다.

곧 그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단추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모쪼록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쉬워하는 재윤을 향해 채하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단추 주인은 내가 잘 데리고 있으니까.”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재윤에게 채하는 여유만만하게 단언했다.


“이 선물, 아주 유용하게 쓰도록 하죠.”

잠시 후, 재윤이 돌아간 뒤 채하는 정 실장을 불렀다.

이윽고 그가 두 손 가득 홍삼이며 굴비며 온갖 특산물을 다 들고 나타났다.


“……전 산지 직송 배달을 시킨 기억은 없습니다만.”

“어휴. 그냥 좀 받아주십시오. 부사장님. 아버지께서 부사장님 꼭 드려야 한다고 아주 난리세요. 난리!”

“정 비서님 본인이 더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도 않으십니다. 이번 일로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수행비서라는 놈이 제 상사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위험에 빠트리게 했다고요?”

정 실장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아십니까?”

“하하. 정 실장님 이전에 제 오랜 수행비서 아니셨습니까.”

“어휴, 참……. 어쨌거나 면목이 없습니다. 병원에 계신 동안 정말 심장이 철렁했다고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네?”

채하의 입에서 나온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정 실장이 대놓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그게 더 멋쩍어 채하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모든 퍼즐이 완성된 것 같으니 주인공들을 무대 위로 모셔보죠.”

“그럼……?”

정 실장이 꿀꺽 침을 삼켰다.

안 그래도 너무 고요하고 침착해, 더 두려운 폭풍전야였다.


“사과는커녕 이런 흉악무도한 일을 벌였으니, 절대 자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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