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내 이름은 권우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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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내 이름은 권우주예요
2023.06.21.
이틀 뒤, 우주는 다시 잎새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우주를 데려다준 후에 설원은 곧바로 병원으로 와서 채하의 상태를 체크했다.
채하가 일주일이 되도록 깨어나질 않자, 심 원장의 낯빛에도 근심이 짙어졌다.
“바이털은 안정적인데 생각보다 의식 회복이 더디군요.”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럴까요? 혹시 후유증 같은 거라도…….”
“검사해본 바로는 딱히 호흡기나 내부 장기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음에도 심 원장은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는지, 그가 이번에는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때 현장에 같이 있었던 남자분 말에 의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아이를 구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아마 아들이니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게 아닐까 싶어요.”
“아…….”
확실히 모두가 기적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설원의 가슴은 무척이나 따끔했다.
“그때 심각하게 무리한 충격 탓인 것 같은데,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죠.”
“네. 감사해요. 심 선생님.”
“아닙니다. 작은 사모님도 식사 잘 챙기세요. 부사장님이 깨어나셨을 때 이렇게 야윈 얼굴을 보면 가슴 아파하실 테니까요.”
설원이 먹다 남긴 병원 식판을 힐끗 보며 그가 조언을 건넸다.
맞는 말인지라 설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에게는 밥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고 당부했으면서, 정작 엄마인 제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꼴이었다.
심 원장이 나간 뒤, 설원은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채하가 눈을 떴을 때 수척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가을 오후는 길었다.
내리 붙들고 있는 채하의 손이 따스해서 슬픔이 햇살처럼 밀려들었다.
검댕을 닦아낸 그의 얼굴은 마치 잠자는 왕자님처럼 수려했다.
입을 맞추면 거짓말처럼 번쩍 눈을 뜰까, 헛된 생각마저 들어 설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설원의 시선이 병실 문으로 옮겨갔다.
제가 있을 동안엔 최대한 허영주와 마주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권강호가 약속한 바 있었기에 누가 온 건지 의아했다.
“설원!”
“……로라, 제임스.”
뜻밖에도 방문객은 로라와 제임스였다.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를 영문이었다.
손수 만든 꽃바구니를 건네며 로라가 설원을 얼싸안고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걱정이 많아요. 설원.”
“로라…….”
넉넉한 로라의 품 너머로 개나리 빛 수염이 유독 길게 자란 제임스가 들어왔다.
“설원 씨. 슬퍼하지 말아요. 미스터 권은 금방 일어날 거예요.”
“제임스……. 미안해요. 말 안 해서.”
“괜찮아요. 불쑥 찾아와서 우리가 더 미안하지.”
로라와 제임스가 누워 있는 채하를 내려다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설원의 안색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시, 얼굴이 많이 상했네. 이럴 줄 알고 설원 좋아하는 디저트도 사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로라가 플라워숍 근처의 유명한 케이크 가게 쇼핑백을 흔들었다.
다정한 그 배려에 내내 굳어 있던 설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방문 내막은 금방 밝혀졌다.
“미스터 권의 비서라는 분이 전화해서 알려줬어요. 설원이 병원에서 적적할 테니까 병문안을 가보면 어떻겠냐고.”
“정 실장님이…….”
과연 그가 할 법한 행동에, 설원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확실히 혼자서 채하를 바라보며 기다리기만 하는 건 외로운 일이었으니까.
“자, 일단 이것부터 먹어요. 설원. 무화과 케이크 좋아하잖아요.”
“……고마워요. 로라.”
담뿍 한 스푼을 떠서 내미는 로라의 상냥한 눈길에, 설원의 가슴이 따스해졌다.
우주에게 밥을 먹일 때 우주의 눈에도 제가 이렇게 비쳤을까.
사람에게 조금은 더 기대며 살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맛있어요. 로라랑 제임스도 먹어보세요.”
“그러려고 이렇게 잔뜩 사 왔죠.”
한 판짜리 홀 케이크를 가리키며 로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화과 향이 물씬 풍기는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세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하의 상태가 양호한데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설원이 말끝을 흐리자, 제임스가 흐음 하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일이 떠오르네요. 설원이 베이비와 함께 고향으로 떠나려고 고민하던 무렵에 미스터 권이 숍에 찾아왔었죠.”
“……네?”
금시초문이었다.
예상했다는 듯 제임스가 빙글거리며 그때의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전해주었다.
“저에 대해서 물어봤다고요……. 채하 씨가…….”
“아마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했겠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보다 모르고 있다는 점은, 때론 굉장히 나약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
“그래서 설원 씨 얘기를 원 없이 해줬어요. 내가 개발한 꽃차도 마시고.”
“아…….”
개나리 빛 수염을 어루만지며 제임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스터 권도 꽤나 자신을 혹사하면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 같더군요.”
설원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채운의 후계자로서, 죽은 형의 몫까지 책임을 짊어지고 그가 걸어온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을 테니까.
“미스터 권은 그동안 무척 피곤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아마 푹 자두려는 걸 테죠. 깨어나면 이제 예쁜 와이프랑 귀여운 아들하고 오순도순 평생 즐겁게 살아가야 하니까요.”
“제임스…….”
그의 진심 어린 위로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였다.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설원아. 나야. 오늘 병문안을 가고 싶어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우주를 조금 일찍 끝내달라고 했어. 내가 지금 데리고 가고 있으니까 오늘은 마중 나오지 말라고.>
재윤이었다.
사고가 있던 당일, 병원에 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와는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 그의 상태도 통 좋지 못했는데, 너무 무심했다 싶었다.
<고마워요. 재윤 씨. 로라랑 제임스도 같이 있는데, 괜찮으면 와서 무화과 케이크 먹어요.>
답장을 보낸 뒤 설원은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겨 앉았다.
채하가 저 몰래 로라 앤 제임스에 찾아가서 무엇을 캐물었는지, 이제부턴 그녀가 캐물어 볼 작정이었다.
*
30여 분 뒤, 재윤이 우주를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다.
넓은 특실이 북적북적해지자 병문안이 아니라 그냥 모임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최재윤입니다.”
“오~ 우리 베이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설원 씨를 많이 도와준 분이라고요.”
“아닙니다. 제가 더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제임스 아저씨. 로라 아줌마. 우주도 왔어요~.”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주가 두 사람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들었다.
“그래그래. 우리 예쁜 베이비. 보고 싶었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이 우주를 어화둥둥 안아 들었다.
제임스의 무릎에 앉은 채 로라가 떠 주는 케이크를 먹는 동안에도, 우주는 채하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그 사이 재윤이 창가에 서 있는 설원에게 다가와, 미안한 듯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우주를 못 구해서 미안해. 권채하 씨도…… 그렇게 혼자 위험하게 둬선 안 됐는데.”
“그게 왜 재윤 씨 잘못이에요.”
“하지만…… 너희 아버지께서는 우리 어머니를 구하셨잖아.”
뜻밖의 말에, 설원은 재윤의 착실해 보이는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섬에서 진 신세만으로도 넘친다고 여겼는데,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재윤 씨.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 아버지는 소방관이셨어요.”
“…….”
“소방관이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 당연한 진리를, 설원도 한때는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엄마와 저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 놓고 떠난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누구에게나 목숨이 하나뿐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어째서 생판 모를 남을 위해 그 목숨을 던졌냐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긍지 높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서운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로소 설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빠가 아들을 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재윤 씨가 미안하게 여길 일이 아니에요.”
“설원아…….”
더 말을 잇는 게 부질없으리라 여겼는지, 재윤이 따스한 눈빛으로 설원의 말에 수긍했다.
누군가를 구하고 돕고, 또 그 누군가가 다시 누군가를 구하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기에 다행인 게 아닐까.
그때였다.
달콤한 무화과를 볼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우주가 어른들에게 물어왔다.
“우주 아빠 언제 깨어나요?”
“…….”
순간 병실 안이 정적으로 휩싸였다.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려줄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원이 무어라 둘러대려던 찰나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우주가 제임스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며칠째 누워 있는 채하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눈, 코, 입을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손가락이 채하의 코와 입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마치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미약한 숨결과 핏기없는 얼굴을 새삼 마주한 우주가 순식간에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아빠 안 깨어나는 거예요?”
“우주야…….”
“아빠 죽는 거 아니죠? 네? 우주 아빠 죽으면 어떡해요.”
일부러 걱정할까 봐 병원에 자주 데려오지 않았는데, 꾹 참고 있던 아이의 불안이 일시에 폭발한 모양이었다.
결국 우주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훌쩍 가슴을 들썩이며 우주가 연신 아빠, 아빠를 중얼거렸다.
무어라 설명이든 변명이든 해야 하는데, 그 애처로운 모습에 모두가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이의 설움이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해져 통증을 안겨주는 것만 같았다.
굵직한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잘못 들을 리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우주의 곁에서 흘러나왔다.
“……주야.”
가장 먼저 그 목소리를 감지한 설원이 놀라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낮은 음성이 다시금 귓가에 닿았다.
“……우주야.”
“아빠……?”
“채하 씨!”
이름을 부르는 설원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이토록 간절하고, 애타는 것이었던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지닌 무게가, 생명의 무게가 이토록 크다는 것을 설원은 절감하고 있었다.
이름을 들은 채하의 눈동자가 눈앞의 우주에게 먼저 머물렀다가, 이어 설원 쪽으로 옮겨왔다.
“……채하 씨.”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가는 길이 천리만리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그러나 동시에 찰나이기도 했다.
우주와 설원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채하의 너른 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빠! 아빠가 깨어났어요!”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가운데, 채하가 빙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대왕은 쉽게 안 죽어. 꼬마.”
그때였다. 우주가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작은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당차고도 애틋함이 그득 담긴 목소리로 선언했다.
“꼬마 아니에요. 내 이름은 권우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