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제발 눈 좀 떠요 (92/111)


92. 제발 눈 좀 떠요
2023.06.18.


순간 설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호사를 호출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쥐고 있는 작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우주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득히 차올랐다.

우주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또다시 울먹였다.


“아빠…….”

“우주야…….”

놀랍게도 우주는 채하를 아빠라 부르고 있었다.

평소 부르던 ‘대왕 아빠’와 헷갈린 것도, 무심결에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채하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망울에는 자신의 아빠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우주는 이제 채하가 진짜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된 게 분명했다.

설원이 우주의 손을 토닥이며 말없이 달랬다.

그 손길에 다시 피로가 몰려오는지, 우주는 스르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그래도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일어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병상에 누워 있는 걸 보며 그녀의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

아이가 깨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설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침대 머리맡의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 아래쪽에서 우주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빠가…… 우주를 구하러 왔어요…….”

순간 울컥한 나머지 설원의 가녀린 몸이 휘청였다.

재윤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이의 입으로 그 사실을 들으니 새삼 목이 메어서.

제가 달려가지 못한 그 불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다니, 권채하는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이 이미 우주의 세상 하나뿐인 아빠였다.


 
채하가 의식을 잃은 뒤로 벌써 며칠이 지났다.

먼저 퇴원한 우주와 함께 설원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실은 내내 채하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그게 우주에게 좋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많이 놀랐을 아이를, 깨어나지 않는 채하를 보면서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우주도 안정을 취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지라 집으로 돌아온 뒤 우주는 어린이집을 쉬며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다.

최대한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엄마의 기분이란 건 좀처럼 아이에게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엄마~ 밥 안 먹어요?”

“어?”

그제야 설원은 제가 수저를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주의 밥그릇에도 밥은 반절도 줄어들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걸 보며 설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우주야. 엄마가 잠깐……. 자, 우리 우주도 씩씩하게 밥 잘 먹어야지?”

“으응…….”

눈을 내리깔며 우주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주,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우주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설원을 빤히 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대왕 아빠가…… 우주 아빠예요?”

“…….”

요 며칠 아마도 무척이나 궁금했을 터였다.

어린 나이에도 엄마의 기분을 먼저 살필 줄 아는 효자인 우주는,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삼키고 삼키다 이제야 내뱉은 것이었다.

기특하면서도 짠해, 설원은 수저를 내려놓고 그 손으로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우주야. 엄마랑 아빠가 우주한테 조만간 말해주려고 했었는데…….”

연신 시무룩하던 우주의 안색이 비로소 해사하게 밝아졌다.


“진짜로 대왕 아빠가 우주 아빠예요? 네?”

“……응. 맞아. 우주 아빠야.”

순도 백 프로의 기쁨이 담긴 얼굴을 보면서도, 그간 숨겨온 것이 미안해 설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좋아하리라 당연히 예상은 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반응이 걱정되기도 했고.

문득 궁금해진 설원이 우주에게 도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우주야?”

“응~ 예전에 엄마가 말해줬잖아요. 엄마의 아빠도 불 속에서 사람을 구했다고요~.”

“그랬지.”

“예쁜 들판에서 같이 그네 탔을 때 우주, 물어봤어요. 우주가 위험하면 구하러 오냐고. 그때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니까 꼭 구하러 올 거라고. 그런데 정말로 아빠가 구하러 왔어요. 우주한테 아빠가 왔다고 그랬어요~.”

“……그랬구나.”

정말이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참으로 가슴 아픈 방식으로 우주는 진실을 알게 된 셈이었다.

언제였을까.

셋이서 함께 채하의 회사에서 퇴근하던 길, 도로에서 커다란 소방차가 지나가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잠시 아버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엄마, 아빠는…… 언제 일어나요?”

설원의 눈치를 살피며 우주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아이에게 늘 가르쳤건만, 선의의 거짓말은 역시나 필요한 법이었다.

우주의 밥그릇에서 크게 한술 떠 작은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금방 일어날 거야. 우리 우주가 밥 잘 먹고 기다리면. 자, 아~.”

“으응~ 우주 밥 잘 먹을 거예요!”

앙 하고 우주가 냉큼 밥을 받아먹었다.

도토리처럼 볼록해진 사랑스러운 양 볼을 바라보며, 설원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서 깨어나서 당신 아들의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라고.

채하와 함께 자던 침대 위에 우주를 재워두고, 설원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늦은 밤의 공기가 서늘하게 살결을 스쳐, 괜스레 몸이 움츠러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도 옛날엔 채하 없이 혼자 있다시피 했던 집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가 없는 집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도 우주와 둘이서 살아왔는데, 이젠 절대로 둘이서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아…….”

꾸욱 참고 있던 한숨이 시린 밤공기에 섞여 흩어졌다.

오늘 밤도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설원은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집 안 전부 환하게 불을 밝혀두었다.

우주를 위해 바다 느낌으로 꾸며둔 다이닝룸과, 거실 곳곳에 놓인 장난감들…….

새삼 그가 얼마나 아이를 위해 노력했는지가 실감 났다.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밀어내는 동안에도, 얼마나 그는 마음을 다했었는지.


“…….”

달빛 드리워진 창가로 홀린 듯 발이 움직였다.

샤라락 설원은 달빛이 스며든 커튼을 옆으로 걷어보았다.

얼마 전 첫 데이트를 하고 돌아왔던 밤, 이 창에 기대어 나누었던 열띤 입맞춤이 떠올랐다.

뜨겁고 보드라웠던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자, 눈꼬리가 금세 촉촉해졌다.

아무래도 바람을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정원으로 나오니 제법 쌀쌀했다.

두 팔을 끌어안으며 설원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집 안과 마찬가지로 대문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길까지 모두 조명을 밝혀둔 상태였다.

혹여나 어두워서 채하가 집을 찾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우려 탓이었다.

덕분에 어둠이 깔린 밤임에도 불구하고 바깥은 꽤 밝았다.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온 뒤로 정원은 몰라보게 생명력을 얻었다.

그런 기운에라도 기대고 싶은 심정으로, 설원은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함께 만든 추억들이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어엿하게 선인장의 자태를 갖추고 있는 가족 화분.

선인장의 앙증맞은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왕 화분 탓에 지나치게 여백이 많았다.

하지만 선인장에 담긴 우주의 기특한 마음과, 동생을 심어달라고 했던 엉뚱한 바람이 떠오르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조금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에는 평평하게 잘 고른 흙이 시야에 들어왔다.

담벼락 바로 아래 자리한 그 꽃밭은, 다름 아닌 그가 프러포즈를 하며 건넸던 수선화 구근을 심어둔 곳이었다.


“채하 씨…….”

결국 참지 못하고 이름을 내뱉자, 가슴 한구석이 시큰했다.

이 땅속에 소중하게 그 구근을 심으면서 두 사람은 맹세했었다.

여기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걸 매년 함께 보자고.

우주의 대왕 화분 속 선인장이 마르지 않고, 우주와 키가 비슷한 살구나무가 쑥쑥 담장을 넘어설 만큼 자라 뽀얀 열매를 맺고, 언젠가 나무 막대기를 쓰지 않고도 우주가 제 손으로 그 살구 열매를 딸 수 있을 때까지.

우주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로, 대왕 아빠처럼 엄청 엄청 키가 커질 때까지 그렇게 언제나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그들이었다.

이제야 진정한 가족이 되는 첫발을 겨우 내디뎠다 여겼는데, 어째서 이토록 시련이 끊이질 않는지 통탄스러웠다.

시련……. 차라리 하늘이 준 것이라면 달가울 터였다.

채하가 저렇게 누워 있는 마당에 당장 움직일 수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권강호나 정 실장의 태도로 보아 대충 배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백사라. 달리 누가 있겠는가.

병실 복도에서 허영주가 권강호에게 당장 범인을 잡아야 한다며 노발대발하는 것을 들으니, 백사라는 명한 쪽과 혼담이 오가던 모양이었다.

예의 리조트 부지가 명한으로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설원도 명한의 장남에 대해 들은 바 있었다.

평생 채하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백사라의 눈에 찰 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궁지에 몰린 데다 악에 받친 나머지, 그녀는 최강의 악수를 둔 게 분명했다.

지난번 트럭 사건 이후 채하가 우주에게 경호원을 붙였건만, 용케도 따돌렸다.

설원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은 그 여자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채하가 깨어나는 것만, 일어나는 것만 생각하고 싶었다.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깊은 눈빛으로 다시 저를 바라봐 주기를 원했다.


“…….”

문득 시야 끝에 별채가 들어왔다.

정원의 구석에 있는지라 그쪽에는 조명이 들지 않아 이런 밤에는 퍽 어두웠다.

하지만 순간 설원은 지금 가장 있고 싶은 곳이 바로 그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떠날 결심을 했다가 정 비서의 도움으로 채하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 별채의 자물쇠는 열어둔 상태였다.

그 안에 아직 있을 어머니의 유서도 펼쳐보지도 못했다.

새삼 설원은 채하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이토록이나 무궁무진하게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긴 해도 부부의 인연으로 무려 8년을 보내왔다.

한데 시간은 절대 넘치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채하 씨.”

별채 안, 창밖이 보이는 소파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 안에서 채하가 5년 동안 수없이 느끼고 느꼈을 감정.

그것이 마치 제 것인 양 몸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깊은 후회. 이 공기 속을 먼지처럼 부유하며 떠다니는 감정은 다름 아닌 후회였다.

왜 그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도, 아니, 확신한 뒤에도 정작 자신은 마음을 아꼈을까.

채하가 표현하는 반만큼이라도 애정을 표현했다면.

수줍음으로 둘러대지 않고, 샘솟는 사랑을 솔직하게 전했어야 했다.

아낄 필요도,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 그를 향한 사랑이었는데.

그리고 채하는 제게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는데.


“……당신도 내가 사라졌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여전히 형태를 구분하기 어려운, 돔 안에 바스러진 은방울꽃 줄기를 보며 설원이 중얼거렸다.


“당신만 나한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당신을 너무 많이 아프게 한 것 같아요.”

결국은 참고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눈앞에 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설원은 절박하게 울음을 토해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채하 씨. 제발 눈 좀 떠요……. 부탁이에요.”

별채의 자그마한 창 너머로, 고개를 파묻은 설원을 달빛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