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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아빠가 왔어 (91/111)


91. 아빠가 왔어
2023.06.14.



 
물에 빠진 사람만 숨을 쉴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불은 아예 그의 온몸을 휘감으며 호흡을 극한까지 몰아갔다.

내쉴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불규칙한 호흡은 가빠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화염 속에 있다는 실감은, 끔찍할 정도의 공포로 채하의 등 뒤를 덮쳤다.

그야말로 뜨거운 수준을 넘어 용암처럼 타오르는 온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찢어질 듯 새빨간 불꽃은 도무지 이승의 풍경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였다.

설원의 아버지는 이런 곳을 매일 드나들었던 건가.

과연 그녀가 긍지를 가질 만도 하다고, 이제 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젠장! 빨리 가야 하는데……!’

쉴 새 없이 위를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발은 제 뜻보다 열 배는 더디게 움직였다.

아이의 목숨이 일각을 다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입안 여린 살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단 일 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몸을 던진 채하였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주는 맨 위층에 있으리란 것을.

방치된 폐건물에 아이를 데려다 놓고 불을 질렀다.

당연히 우연한 사고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가장 찾기 어려운 곳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새삼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채하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주소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명한 건설의 버려진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런 악랄한 방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은, 백사라의 특기였다.

기회를 주는 것은 끝났다.

여기서 나가면 무자비한 응징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우주부터 구해내야 했다. 그의 아들. 권채하와 민설원의 아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권우주를.


‘이제 마지막 층인가……!’

마침내 그가 7층 입구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자욱한 연기 탓에 좀처럼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우주야!”

보이지도 않는 공간을 미친 듯 살피며 채하는 우주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애써 막고 있던 코와 입으로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이런 상태에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자칫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필사적으로 불길을 헤치면서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발에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채이며 그를 방해했고, 천장에서는 타닥거리는 불꽃들이 몸집을 불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주야! 어디 있어? 우주야! 대답 좀 해 봐!”

애가 탔다. 애간장이 녹고, 끊어진다는 게 뭔지 채하는 이 순간 절감하고 있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 따윈 버려도 상관없건만, 그 말간 미소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잡히질 않았다.

쿵! 하고 불이 붙은 철근 기둥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하마터면 몸에 맞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그 요란한 소리 덕분에 채하는 미약한 아이의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소리에 놀랐는지, 기둥 너머 안쪽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으음…….”

“우주야!”

이번에는 몸에 기둥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채하는 불붙은 기둥을 단번에 뛰어넘어 신음이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우주야!”

세상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생명체처럼, 우주가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불길을 피하려고 한 모양이었으나 화염이 들끓는 7층짜리 건물에서 어린아이가 혼자 탈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희고 뽀얗던 아이의 얼굴에 상처와 검댕이 가득한 걸 보자, 채하는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제 이름을 들었는지 우주가 감고 있던 눈을 힘없이 조금 떴다.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순간 울컥, 하고 심장으로부터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채하는 재빨리 우주를 안아 들었다.

아이의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미약했다.


“…….”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우주가 웅얼거렸지만, 이미 우주에게는 말을 빚어낼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채하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괜찮아. 우주야.”

“…….”

“아빠가 왔어. 아빠가…… 우주를 구하러 왔어.”

“아……빠…….”

힘겹게 자그마한 입술을 여는가 싶더니, 이내 우주의 눈꺼풀과 입술이 도로 닫혔다.

그 위로 결국 투둑투둑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우주를 잘 감싸 안은 뒤, 채하는 앞서 올라온 계단을 단걸음에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은 불꽃 하나도 우주의 몸에 닿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뿌연 시야 속에서 드디어 바깥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 멈추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 너머로 소방차에서 내리는 소방관들의 모습과 주위를 둘러싼 시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놀라움과 불안함이 뒤섞인 최재윤의 얼굴도.

다섯 걸음, 세 걸음, 마지막 한 걸음.

헉, 헉.

틀어막은 입과 손바닥 사이에서 내뱉어지지 않는 가쁜 호흡이 맴돌았다.

마침내, 채하는 그들의 품에 우주를 온전히 건넸다.


“우주야! 권채하 씨!”

“여기 사람이……!”

“아이가 있어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아득해졌다.

동시에 무릎이 꺾이며 숨이 잦아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껴둔 숨이었으니까.

털썩!

깊은 안도와 함께 채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채운 그룹의 전담 병원.

채운 가의 일원들이 착잡한 얼굴로 병상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이게 대체……. 채하야! 얘, 눈 좀 떠봐! 채하야!”

“…….”

“우리 아가는 또 왜 이렇게 된 거야! 어? 말 좀 해 봐. 심 원장!”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허영주만이 분을 참지 못하고 날뛰는 중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사모님. 환자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무사한 걸 확인하셨으니 다들 나가주십시오.”

“무사하다고? 근데 왜 못 깨어나!”

“일단 좀 지켜봐야 합니다. 우주는 아마 금방 일어날 거고요.”

“뭐? 그럼 우리 채하는! 채하는 언제 깨어나는데!”

“여보. 일단 심 원장 말대로 나가세.”

보다 못한 권강호가 허영주의 팔을 붙들었다.

이대로라면 줄초상을 치르게 생길 판이었다.


“……저는 옆에 있을게요.”

아까부터 공허한 눈빛으로 침대 위의 부자만 쳐다보고 있던 설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차마 만류할 수 없는지라 심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구급차에 실려 온 채하와 우주를 봤을 때, 심 원장의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숨을 쉬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채하의 낯빛엔 생의 기척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몸 곳곳에 타박상과 검게 그을린 흔적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아이가 무사한 게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큰불이 난 건물에 갇힌 것 치고는, 심박수와 호흡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천운이었다. 혹은 아이를 구한 채하의 희생이었거나.

그런 만큼 설원의 지금 심정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닐 테니, 자리를 비켜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를 필두로 권강호와 허영주가 뒤따라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 비서의 가족들과 윤 실장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장님! 사모님!”

“부사장님하고 우주는 어떻습니까?”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겠죠? 예?”

“…….”

쏟아지던 질문 공세는 파리하게 질린 허영주의 안색에 약속이나 한 듯 멈춰버렸다.

다리가 풀려 휘청이는 그녀를, 윤 실장이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천하의 권강호조차 이 상황이 견디기 버거운지 이마를 짚으며 몸을 벽에 기댔다.

복도에 내려앉은 적막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지 않아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허튼 말을 내뱉을 수 없어, 모두가 이 정적에 동참했다.

대화 대신 적막을 깬 것은 울음소리였다.


“흐으윽……. 흐윽!”

윤 실장을 붙들고 겨우 서 있던 허영주가 엉엉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우리 아들, 우리 손주……. 어떡하면 좋아…….”

“사모님. 울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윤 실장……. 내가 아무래도 죗값을 받나 봐. 이 어미가 못나서…… 못된 짓을 많이 해서 나 대신 채하하고 우주를 괴롭히나 봐…….”

점점 복받치는지 허영주가 끄윽끄윽 오열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권강호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그러고는 윤 실장을 붙든 아내의 팔을 잡아끌었다.


“죗값을 받을 인간들은 따로 있어. 일단 집으로 가지.”

“뭐요? 집? 나, 나는 안 갈래요! 여기 있을 거예요!”

“……지금은 설원이가 있지 않나. 밤에 설원이도 쉬어야 하니 교대해서 보내려면, 우린 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챙기고 준비해서 오는 편이 나아.”

“…….”

설득력 있는 제안에 허영주가 윤 실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윤 실장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허영주의 핸드백을 주워들었다.

이윽고 일행이 병원 복도를 빠져나갔다.

*

고요한 병실 안.

설원이 겨우 모아쥐고 있던 두 손을 풀어선 천천히 채하를 향해 뻗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가락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 옛날의 악몽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했다.

재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땐 꿈을 꾸는 줄만 알았다.


‘권채하 씨하고 우주가 불이 난 건물 안에 갇혔어!’

 
운명의 장난일까.

어린 설원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던 날의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땐 아버지였고, 지금은 남편과 아들이라는 차이뿐.

심 원장의 말에 의하면 우주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문제는 채하였다.

의식불명. 그는 우주를 구하고 불에서 나오자마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언제 깨어날지, 깨어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태라고 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채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채하 씨……. 우주야…….”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나란히 누워 있는 부자의 모습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순간, 우주의 자그마한 손이 채하 쪽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

먹먹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설원은 조심스레 그 작은 손을 채하의 커다란 손 위에 얹어주었다.

이렇게라도 닿아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목숨 걸고 살린 아들의 손을, 잡게 해주고 싶었다.


“일어나요. 채하 씨.”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마 들리지도 않을 독백을, 설원은 하염없이 내뱉었다.


“아직 우주한테 아빠라고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돼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설원은 겹쳐진 두 사람의 손 위에 살포시 제 손을 얹어보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만큼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이 되어, 설원은 손을 얹은 채 고개를 파묻었다.

그대로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았다.

그때였다.

손 아래에서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

“으응…….”

“……우주야?”

“엄……마.”

천천히, 우주가 눈을 떴다.

감격한 설원이 우주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상태를 살피려 고개를 기울였다.

한데 그녀가 다시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우주가 또르르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더니 한껏 울먹이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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