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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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불꽃
2023.06.11.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아. 잘 왔어. 강 비서.”
기다리던 방문객의 등장에, 백사라가 들여다보고 있던 거울을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 명한 장남이 부쩍 연락을 자주 해오는 통에, 짜증이 깊어져 다크서클이 나날이 늘고 있었다.
“그래, 이민 준비는 잘 되어 가고?”
“……덕분에요.”
그녀의 수행비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쥐어 짜냈다.
갈 곳 없는 두 손이 불안하게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각오를 다잡아도 모자라건만,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라니.
“왜 그렇게 울상이야? 유학 가 있는 아들딸이랑 와이프를 생각해야지. 기러기 아빠 노릇 관두고 다 같이 이민 가는 게 강 비서 평생소원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그 소원을 이뤄주겠다는데, 그렇게 세상 다 무너질 것처럼 서 있을 거 없잖아.”
“……아닙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건넨 수표가 몇 장인지, 강 비서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백사라가 눈을 흘기며 치켜뜨자, 강 비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공들여 준비한 적임자였다.
제 옆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외국에 있는 가족에게 적잖은 돈을 보내느라 늘 허덕인다는 사실을, 백사라는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투자 실패로 제법 큰 빚까지 졌다는 것 또한.
타인의 곤란한 사정을 절대 허투루 보지 않는 게 백사라의 특기였다.
언제고 중요한 타이밍에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백재영이 선심 쓰듯 붙여줬던 비실비실한 남자를 돌려보낸 후, 충실하게 저 대신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해졌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사람을 움직일 최고의 무기인 ‘돈’이 차고 넘치게 있었다.
그래서 강 비서에게 트럭으로 아이를 다치게 하라 시켰고, 그 건을 빌미로 이번 일에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원래 한번 시작한 나쁜 일에서 발을 빼기란 어려운 법 아니던가.
“자, 여기 지도야.”
강 비서의 심정이야 그녀가 헤아릴 일이 아니었다.
저는 돈을 줬고, 그는 그 돈에 맞는 일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철거 예정이라 아무도 없을 거야. 아이를 거기로 데리고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해.”
“……정말로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럼 정말로 하지, 안 해? 내가 왜 강 비서한테 그 큰돈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도를 받아든 강 비서의 안색은 허옇게 질려 금방이라도 툭 치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그 역시도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명한 소유의 건물이 아닙니까?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가는…….”
“강 비서.”
싸늘한 백사라의 음성이 바닥에 차디차게 내리꽂혔다.
“잘못되지 않도록 똑바로 하는 게, 이제부터 강 비서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외국에서 새 출발 할 수 있다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
“너무 걱정하지 마. 폐건물이라 보는 눈도 없고, CCTV도 없어. 그야말로 딱 적당한 곳이지.”
희번덕 커다란 눈을 빛내며 백사라가 불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비서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장소는, 그녀가 특별히 엄선한 무대였다.
명한 건설이 오래전 진행하다 무산된 건축 부지로, 한참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 철거가 결정된 곳.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저를 탐내는 명한의 장남에게 엿 좀 먹일 겸, 일부러 고른 장소였다.
어린아이의 사고와 얽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면, 수습하느라 언감생심 장가 따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질 터였다.
“……알겠습니다.”
토를 달아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강 비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이렇게 나와야지.
저를 이토록 처참한 신세로 만들어놓고, 권채하와 민설원만 행복한 꼴을 두 눈 뜨고 절대 볼 수 없었다.
민설원의 아버지가 순직한 소방관이라는 사실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 최고로 걸맞은 비극을 선물해 줄 작정이었다.
희미한 만족감에 백사라의 붉은 입술이 꿈틀대는 뱀처럼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악랄한 속내가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어디, 아버지 말고 아들도 불 속에서 한번 잃어보라지.”
*
“네가 우주니?”
“으응~? 아저씨는 누구세요?”
가을 햇살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우주가 저를 부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갸우뚱하는 우주에게 강 비서가 애써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예쁜 할머니 친구야. 예쁜 할머니 알지?”
“어! 우주 예쁜 할머니 알아요~.”
“그래그래. 전에 예쁜 할머니 집에도 놀러 갔었잖니. 기억나지?”
“네! 엄청 엄청 재밌었어요~.”
경계심이 풀린 것을 확인한 강 비서는 그간 잎새 어린이집 앞에서 잠복하면서 보았던 정보를 십분 활용했다.
허영주가 가져와 아이에게 내밀던 과자와 똑같은 것을, 그가 냉큼 내밀었다.
“자, 이거. 예쁜 할머니가 우주 주라고 하셨어. 오늘도 우주랑 같이 집에서 놀고 싶으시대.”
“우와~ 우주가 엄청 엄청 좋아하는 과자예요!”
“더 맛있는 것도 잔뜩 사놓고 기다리신대.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으응~.”
아주 잠시, 아이의 맑은 눈동자에 머뭇거림이 스쳤다.
선생님들이 다른 아이들을 인솔 중인 틈을 타 다가온 것이었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끌었다간 들킬 우려가 있었다.
“할머니가 우주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예쁜 할머니가요~?”
“그래. 그러니까 아저씨 차 타고 얼른 예쁜 할머니 보러 가자.”
“알겠어요~ 우주 놀러 갈게요.”
냉큼 손을 잡자, 다행히도 우주는 얌전히 따라와 주었다.
목적지가 여기서 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아저씨?”
십여 분 뒤, 차를 세우자 흉흉한 건물 외관이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불안한 표정의 아이를 안심시키려 강 비서는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할머니 집에 거의 다 왔는데 아저씨가 깜박한 게 있지 뭐니. 여기는 아저씨가 일하는 곳인데 안에다 비싼 시계를 떨어트린 모양이야.”
“으응~.”
“잠깐 아저씨 시계 찾으러 갈 건데 같이 들어갈래? 깜깜해서 아저씨 혼자 가기 무섭네.”
“네. 우주가 같이 가 줄게요~.”
앞으로 제게 일어날 일을 상상조차 못 한 채, 아이가 해맑게 대답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우주의 커다란 눈동자에 강 비서는 잠시 멈칫했다.
외국에서 조기 유학 중인 제 아이들보단 한참 어렸지만, 이상하게 아이들의 얼굴이 오버랩된 탓이었다.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아, 그는 꽈악 주먹을 쥐었다.
“자, 그럼 들어가자. 우주야.”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주가 없다니요?”
“어머. 저희는 아버님하고 같이 돌아간 줄 알았는데요.”
토끼반 선생님이 연신 당혹스러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채하의 표정이 캄캄한 먹구름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이 끝나는 시간에 거의 맞춰 왔는데, 우주가 사라지다니.
“무슨 일이에요?”
아이들을 하원 버스에 다 태우고 출발하려던 재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차에서 내려선 다가왔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채하가 채근하듯 물었다.
“우주 못 봤나? 난 지금 도착했는데, 우주가 보이질 않아.”
“우주? 우주라면 항상 저 벤치에 앉아서 권채하 씨를 기다리잖…….”
시선 끝에 아무도 없이 텅 빈 벤치를 발견한 재윤이 말끝을 흐렸다.
원래라면 벤치에 앉아 두 발을 앙증맞게 총총 흔들며 아빠를 기다리는 우주가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벤치가 텅 비어 있었다.
채하의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던 그 찰나였다.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혹시 설원이 데려간 건가 싶어 채하가 잽싸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데 의아하게도 화면에는 발신자표시제한 표시가 떠 있었다.
본디 이런 전화는 받지 않았으나, 지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급습하던 중인지라 채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당장 00동에 있는 00 건물로 가십시오.]
꼭 변조한 것처럼 어색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잘못 건 건가? 미처 생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머리를 강타하는 듯 충격적인 말이 다시 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졌다.
[우주가 그 건물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 불이 났고요.]
“……불?”
경악한 채하가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자신의 세단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권채하 씨! 뭡니까, 권채하 씨!”
대신 핸드폰을 주워 들고는 재윤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채하에게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의 등을 토끼반 선생님이 가볍게 토닥이듯 두드렸다.
“가 보세요. 재윤 씨.”
“네? 하지만…….”
“아이들은 오늘 제가 데려다줄게요. 저도 운전 잘하거든요.”
“아…….”
“어서 가 보세요. 아무래도 우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럼 저희도 큰일이잖아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자마자 재윤도 서둘러 움직였다.
막 출발하려는 권채하의 세단 조수석에 냅다 뛰어들었지만, 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남자 모두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미친 듯한 속도로 그 주소에 도착하자 건물은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나 이성적이던 채하였건만, 끔찍하리만치 살풍경한 장면에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다.
그러나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젠장, 7층이나 되는군요. 소방차는 아직입니까?”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한 시민에게 재윤이 절박하게 질문을 던졌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제가 신고했으니 금방 올 겁니다. 그래도 폐건물이라 망정이지,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어어? 거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
재윤이 고개를 휙 돌리자 권채하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양반이 미쳤나! 이 불길 안 보입니까? 당장 나오시오!”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가…… 저 안에 있어요.”
“엥? 무슨 소립니까? 사람이 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재윤은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세진 불길이 건물을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불꽃이 이토록이나 붉고, 뜨거운 것이었던가.
그 옛날 자신의 어머니가 갇혀 있었던 화염 속의 풍경도 저랬을까.
“빌어먹을…….”
저 안에 우주가 있는데, 우주가 울고 있을 텐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젠장……!”
어린 시절 나들이를 떠났던 부모님이 불길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마터면 부모님이 돌아가실 뻔했다는 사실과, 그 화재로 인해 소방관 한 명이 순직했다는 사실은 어린 재윤에게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한동안은 불이 날까 봐 무서워 가스레인지도 켜지 못할 만큼.
“최재윤! 뭐 하는 거야. 이 못난 자식아! 빨리 가서 우주를 구하라고……!”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나머지 피가 났다.
주먹으로 내리치는 허벅지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마치 돌이 된 것처럼 그의 다리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귓가에 마침내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어올 무렵, 재윤의 눈가에선 처절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절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폭발할 것처럼 거대한 화염이 건물 밖으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