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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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만개
2023.06.07.
대왕 아빠가 우주를 닮았다…….
우주의 발언에 세 사람 사이에 일순 묘한 기류가 흘렀다.
긍정을 바라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우주가 설원과 채하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봐요~ 대왕 아빠 우주랑 엄청 엄청 똑같이 생겼어요!”
“…….”
“…….”
우주의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 발견에 설원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였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니.
게다가 기억을 잃은 척하는 동안 유독 능글맞게 굴던 채하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딱 보니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 닮아서 바로 알아봤다고.
그땐 차갑기 그지없는 권채하라는 남자가, 이렇게 귀여운 우주와 닮았을 리 없다고 속으로 부정했던 설원이었다.
한데 지금 함께 앨범을 보는 동안 그 말이 진실이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우주의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의 앙증맞음과 심장을 부여잡게 하는 깜찍함은 다름 아닌 아빠인 채하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을.
우주는 그야말로 권채하의 미니미였다.
설원과는 달리 채하는 우주의 눈썰미에 무척 만족한 듯했다.
그가 우주의 말랑한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다정하게 설명해주었다.
“우주가 대왕 아빠를 닮은 거지.”
“으응~? 그런 거예요?”
“우리 꼬마가 대왕 아빠보다 늦게 태어났으니까. 그래도 대단한 걸? 용케 그런 비밀을 알아채다니.”
“우주 대단해요?”
“엄청 엄청 대단하지. 그건 원래 엄마랑 대왕 아빠만 알고 있던 비밀이거든.”
비밀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주가 사진 속 채하와 제 옆의 듬직한 채하를 번갈아 보며 연신 방글거렸다.
순간 설원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이토록 좋아하는 우주에게 대왕 아빠와 닮은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다는.
하지만 때가 되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우주에게 밝히자고, 그와 합의한 바 있었으므로 설원은 지금은 그저 앨범을 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권채하의 과거를 속속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기에.
“어…….”
다음 페이지를 펼치던 설원의 손이 문득 어색하게 멈췄다.
그와 반강제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활짝 웃고 있는 소년이 눈에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무표정한 채하와는 사뭇 다른 밝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우리 형이야.”
“형님이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진을 본 적이 없겠군. 형은 어릴 때하고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이 얼굴 그대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덤덤한 채하의 말투가 되레 설원을 아리게 했다.
희석되지 않는 종류의 슬픔. 그것이 혈육을 먼저 떠나보낸 비통함일 터였다.
실제로 설원이 본가에서 함께 사는 동안, 집 안에는 장남 권태하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의 서재랍시고 채하가 방으로 썼던 공간에조차 사진 한 장 없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이 슬픔의 깊이를 더욱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민설원.”
“……아.”
허공에 멈춰 있던 손에 별안간 느껴진 온기에, 설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채하를 보았다.
그 옆에서 우주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진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안쓰러운 표정 하지 마. 나는 괜찮아. 여기 당신하고 우주가 있으니까.”
“응! 대왕 아빠한테는 엄마랑 우주가 있어요~.”
“들었지? 우리 꼬마가 이렇게 효자야.”
“채하 씨…….”
그가 잡은 손을 설원이 힘주어 붙들자, 채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해묵은 아픔 속에서도 어딘가 홀가분함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곧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원에게 진솔한 심경을 전했다.
“당신을 만나고 비로소 깨달은 게 있어. 형은 틀리지 않았다는 거야.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다가 세상을 떠났으니까, 형은 행복했을 거야.”
참 이상했다.
형의 이야기인데 꼭 그녀가 고백받는 기분이 들었으니.
*
거의 연대기와도 같은 앨범을 죄다 넘겨 본 후, 우주는 곤히 잠이 들었다.
설원과 채하는 2층에서 내려와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향긋한 가을 꽃차의 향이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당신이 청소 대신 티타임을 선택해 줘서 다행이군. 청소를 무척이나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아까 채하 씨가 말한 그런 이유는 절대로 아니에요.”
“굳이 해명까지 하는 걸 보니 더 수상하지만, 그냥 넘어가 줄게. 더 놀렸다간 당신 얼굴에도 붉은 꽃이 필 것 같으니까.”
그의 말대로 이미 설원의 뺨에는 옅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뜨거운 차 탓인 척, 설원은 눈을 내리깐 채 잔에 입술을 대고 홀짝였다.
꽃향기가 물씬 풍기자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생전에 엄마도 꽃차를 좋아하셨어요. 제임스가 종종 꽃차를 만들어서 나눠줬는데, 약 때문에 입이 쓸 때면 늘 찾곤 하셨죠.”
“그랬군.”
슬쩍, 설원이 눈을 들어 채하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이 타이밍에 엄마의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나름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나 대신 엄마를 돌봐줘서 고마워요.”
순간 찻잔 손잡이를 쥔 채하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곧 그가 하아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한숨 속에는, 느른한 웃음도 반쯤 섞여 있었으니까.
“심 원장도 그렇고, 정 비서나 정 실장도 그렇고 당신한테는 참 약하단 말이야.”
“심 선생님은 내가 알았다는 사실을 당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굳이 모른 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요.”
“하긴 맞아.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은 필요 없지.”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테이블 위쪽의 은은한 조명 덕분에 그의 얼굴이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솔직히 털어놓는 건데, 아무래도 당신 어머니는 사위를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설원이 싱겁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찾아갈 때마다 채하 씨 칭찬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요.”
“그거 아쉽군. 당신이 어머니 말씀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나한테 더 흠뻑 빠져들었을 텐데.”
이미 더 흠뻑 빠져들 데도 없었어요, 라고 말하려다 설원은 다시 차를 홀짝였다.
서로의 마음을 의심 없이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진한 애정 표현은 낯설고 쑥스럽기만 했다.
다행히 채하는 설원이 삼킨 말을 짐작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었다.
“장모님하고 당신은 닮은 데가 참 많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찾아뵐 때마다 그런 확신이 들더군. 그래서 더욱이 자주 찾아갔다면, 장모님께서 서운해하실까?”
“채하 씨…….”
설원이 찻잔에서 눈을 떼고 채하를 빤히 응시했다.
이 남자 또한 처음부터 저를 이토록이나 마음에 품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힘들고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어도 되었을까.
괜히 울컥해지려는 설원의 손을, 채하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찻잔 속에 일렁이는 꽃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민설원, 당신을 낳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끝내 못 드렸다는 거야.”
“…….”
“당신을 나한테 보내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꼭 전했어야 했는데.”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더없이 따스했다.
설원은 꼭 그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제 손을 감싼 채하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셨을 거예요. 엄마는 그런 분이니까요.”
채하가 수긍한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소 힘겹게 다시 입술을 떼었다.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장모님은 편안해 보이셨어.”
“……아.”
설원은 그가 말하는 게 어머니의 임종 때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사실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백사라의 협박으로 몸을 숨기느라, 우주의 생명을 우선하느라 포기해야만 했던 것.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한 딸이라서 차마 묻기에도 어려웠던 이야기.
“고마워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 순간 설원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비록 제 일에 휩쓸려 갑작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했지만, 어머니는 여한이 없었을 거라는 것도 딸인 제가 가장 잘 알았다.
“……이젠 좀 알 것 같아요.”
“뭘 말이지?”
제 커다란 손등 위에 겹쳐진 설원의 여린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채하가, 고개를 들었다.
한없이 믿음직한 눈빛. 그것이 확신을 심어주었다.
“엄마가 왜 당신한테 유서를 줬는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군.”
“아뇨. 아마 제가 있었어도, 엄마는 채하 씨에게 유서를 줬을 거예요.”
싱긋 웃으며 단단한 눈빛으로 설원이 채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내내 고민하던 것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아까 우주가 당신을 닮았다고 말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했지만…… 이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 말은…….”
“네. 우주한테 밝히고 싶어요. 채하 씨가 아빠라는 걸.”
순간 채하의 깊게 잠겨 있던 눈동자가 탁하고 조명이 켜진 듯 빛났다.
무수한 기쁨이 별 무리처럼 눈동자 속에 쏟아지고 있었다.
“우주도 진실을 알게 된 다음에, 어머니 유서를 읽어봐요. 우리.”
그날 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순식간에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춰 온 채하 때문이었다.
설원의 것인지, 채하의 것인지, 아니면 꽃차에서인지 모를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곧 그 꽃향기는 두 사람의 입술을 오가며 하나로 섞였다.
계절 탓에 선선해진 밤공기 속에서, 사랑이 만개했다.
*
“부사장님. 오늘은 기분이 유독 좋아 보이십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업무 보고를 하러 왔던 정 실장이 채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심각한 일들을 줄줄이 보고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이 내리 벽에 걸린 그림에만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그림은 우주가 잎새 어린이집에서 그린 채하의 초상화였다.
“우주에게 제가 아빠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네에? 그게 정말이세요?”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하며 정 실장이 화색했다.
함께 캠핑을 갔을 때 그가 얼마나 우주에게 ‘아빠’라고 불리고 싶어 했는지, 옆에서 느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정말 잘됐네요!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는 걸 보고, 제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모릅니다. 진짜 아빠가 되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부사장님?”
“무척 떨리는군요. 설레고요.”
“햐~ 얼마나 감동적일지! 눈물 없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잔뜩 몰입했는지, 정 실장이 코까지 훌쩍였다.
그 모습에 채하는 왠지 모를 흐뭇함을 느꼈다.
옛날에는 그렇게 저를 보좌해주던 정 비서에게조차 남이라고 분명한 거리를 두곤 했는데, 이젠 남도 때론 가족 같을 수 있음을 깨달은 덕이었다.
권채하의 세상에 있어 모든 따스한 발견은 설원과 우주로 인한 것이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 애정과 믿음이 제 척박한 땅에 피어나, 가능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채하는 평소라면 먼저 하지 않았을 제안을 그에게 건넸다.
대왕 아빠가 아니라 진정한 우주의 아빠로 재탄생하는 기념으로.
“조만간 세쌍둥이들 데리고 가을 캠핑이나 같이 가죠. 제일 좋은 데로요. 최고로 멋진 아빠의 모습을 우주한테 보여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