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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왕 아빠는 우주를 닮았어요! (88/111)


88. 대왕 아빠는 우주를 닮았어요!
2023.06.04.



 
평소라면 집 안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부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했을 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요. 백사라의 내면에는 그야말로 고요한 폭풍이 일고 있었다.

통보나 다름없는 약혼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뒤로, 그녀는 내내 화장대에 앉아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물렀어. 물렀다고.”

중얼중얼 음산한 목소리가 혀끝에서 흘러나왔다.

과거 잘못된 수를 두었음을 통감하고 나니, 스스로가 환멸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기껏 백재영이라는 망나니를 틀어쥐었으면서, 왜 그 망나니에게 제대로 칼을 휘두르게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정말이지 백사라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다.


‘민설원이가 우리 채하 애를 가졌어.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처음 허영주가 산모 수첩을 들이밀며 민설원의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백사라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심경이었다.

임신이라니.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거액을 쥐여주었는데도 좀처럼 나가떨어지지 않는다며 허영주는 노발대발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주먹을 꽉 쥔 나머지 긴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맺힐 정도였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하고 허영주를 돌려보낸 뒤, 백사라는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채운 가의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민설원의 어머니를 찾아간 게 그 시작이었다.

어느 곳이나 어중이떠중이는 있는 법이었고, 돈으로 못 살 정보도 없었다.

덕분에 백사라는 민설원의 어머니가 야외 산책을 자주 한다는 점을 손쉽게 알아냈다.

채운 가에 딸을 팔아넘기더니만, 그 덕분에 호의호식하며 제법 건강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그 어미에 그 딸이 아닐 수 없었다.

세트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마음먹은 백사라는, 그녀의 산책 시간에 자연스레 접근해 재미있는 정보를 흘려주었다.


‘김선화 씨. 그거 아세요? 권채하 씨는 원래 집안끼리 정해준 제 약혼자였어요. 이미 결혼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요.’

‘그게 무슨……?’

‘한마디로 댁의 딸과 권채하 씨는 불륜 비슷한 관계였단 뜻이에요.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민설원 씨가 제 예비 남편을 빼앗아 간 거고요. 아주 더럽고 부적절한 방식으로요. 어떤 방식인지까지는 민망해서 차마 설명하기 어렵네요.’

‘……!’

효과는 강력했다.

민설원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반쯤은 모험이었다. 그녀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면역성 질환인 것을 알았기에, 던져볼 만한 수라고 여겼을 뿐.

한데 기대 이상이었다.

본디 약해빠진 가지를 매서운 바람으로 한번 흔들어주었더니, 맥없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 ‘더럽고 부적절한 방식’이라는 거짓말을 한 스푼 얹어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저를 향해 뻗는 것을 백사라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휙 돌아섰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미끼를 민설원이 물게 하는 일이었다.

감히 권채하의 곁을 3년이나 차지했던 죗값을 치러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백사라는 희망을 줬다가 나락으로 떨어트린다는, 가장 악랄한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정작 자식 마음도 모르는 허영주는 알지 못했던 사실 때문이었다.

바로 권채하가 실제로 민설원을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내외하고, 냉정한 척을 해도 그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그녀로서는 모를 수 없었다.

권채하가 민설원을 보는 눈빛에 담긴 것은 오롯이 사랑이라는 걸.

게다가 아이까지 생겼다는 ‘결과’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은가.

저는 손끝 하나도 닿아보지 못한 남자의 아이를, 그 여자가 가졌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해서 백사라는 두 사람의 결혼 계약이 곧 끝남에도 불구하고 강수를 두었다.

만일 민설원이 그냥 단순한 계약 종료로 인해 떠나버린다면, 권채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예 죽어줘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백사라는 단순히 민설원을 쫓아 보내는 대신, 사고로 위장해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래야 권채하가 민설원이라는 여자를 잊을 거라 생각했다.

하나 명백한 오판이었다.

계약관계였던 아내를 잊기는커녕, 권채하는 되레 수절을 택했다.

어떤 여자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고, 죽은 아내의 이름조차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모두가 냉담하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이번에도 백사라만큼은 그 의중을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사랑이었다.

지난 5년 내내 백사라가 후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설원을 진짜로 없애버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위장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그 숨통을 끊어놓았어야 했건만.


“……좋아. 이젠 절대 같은 실수 따윈 하지 않겠어.”

거울 속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에 비릿한 웃음기가 번졌다.

하등 쓸모없는 백재영이나 그놈이 보내준 끄나풀 같은 인간들은 더는 필요 없었다.

여전히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백사라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 우주인지 뭔지 하는 아이를 향해 덮쳤던 트럭의 운전자.

그녀의 충실한 수행비서가 나서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



“백영이 명한 측과 뭔가 개인적인 일을 도모하는 모양입니다.”

“개인적인 일이요?”

정 실장의 보고에 채하가 집중하고 있던 턱을 치켜들었다.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친히 사과할 기회를 주었건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백영이었다.

뭐,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조심스럽게 정 실장이 책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예. 은밀하게 접수한 소식인데, 명한 장남과 백사라 양의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고 하더군요.”

“약혼이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미 명한에게 넘어간 리조트 부지엔 관심 없다고 통보했던 바 있으니, 백영 측으로서도 하나의 패만으로는 부족했을 터였다.

문제의 시초가 된 딸을 약혼시켜 버리는 것으로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려는 모양이었다. 다만…….


“백영은 사과의 뜻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랬다. 채운이 원하는 것은 진솔한 사과지, 허울 좋은 화해가 아니었다.

이제 와 채운과의 사돈 자리를 향한 욕심을 내려놓는다 해도, 이미 지나간 사건들이 백지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츳, 가볍게 혀를 차며 채하는 거듭 지시를 내렸다.


“계속 주시하세요. 중요한 때니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예.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부디 더는 제 발밑에 스스로 구덩이를 파지 않기를, 지금으로서는 그저 바랄 뿐이었다.

*



“대왕 아빠~!”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우주가 쪼르르 달려와 채하에게 안겼다.

겨우 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그새 훌쩍 자란 것 같아, 흐뭇한 손길로 채하는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우리 우주, 어린이집 잘 다녀왔어?”

“네! 엄마가 데리러 와줬어요~.”

해맑게 웃으며 우주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냈다.

트럭 사건이 있던 후로, 채하가 가지 못하는 날이면 언제나 설원이 우주를 하원 시키곤 했다.

생각 같아선 매일 직접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터진 문제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 아쉬움을 듬뿍 담아 채하가 우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 예쁜 엄마는 어디 있지?”

“으응~ 엄마는 방 청소를 한다고 했어요!”

“청소?”

의아해하며 채하가 2층 난간을 바라보자, 마침 부스럭거리며 나오고 있는 설원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분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곧 그녀가 아래층에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채하와 우주를 발견하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 당신 왔어요?”

“난 우리 예쁜 아내가 꼬마처럼 1층에서 반겨주길 바랐는데, 거리가 너무 먼 거 아닌가?”

“……청소를 좀 하려고요. 가을도 되었고 해서…….”

“청소 같은 건 당신이 하나도 안 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

“그래도 정리할 게 많이 있어요.”

“흐음.”

채하의 눈이 의심으로 가느다래졌다.

애초에 캐리어 하나만 가지고 돌아온 설원인데, 정리할 게 많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왜인지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얼굴의 홍조에서는 은근한 절박함이 엿보였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아, 채하가 장난기 어린 어투로 물었다.


“내가 둘째를 갖자고 한 것 때문에 그렇게 바쁜 척하는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럼 새삼스럽게 왜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집안일을 크게 벌이는 거지?”

“말했잖아요. 가을이니까…….”

입꼬리를 쭈욱 올리며 채하가 우주를 안은 채 2층 계단을 성큼 올랐다.

곧 마주 선 설원의 뺨에는 가을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당신보다 나를 더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가 있으니, 서두르지 않을 테니까.”

“응! 우주 대왕 아빠 엄청 엄청 좋아해요!”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우주를 보자, 안심해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설원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는 설원의 뺨에 이내 부드러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쪽.

채하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설원은 아예 말을 잃어버렸다.

밤의 격정적인 애정도 그녀를 한없이 달아오르게 했지만, 실은 마음을 몽글하게 하는 이런 일상적인 애정 표현이 더더욱 새로웠다.


“기왕 당신이 정리를 하는 김에 재밌는 걸 볼까?”

“……재밌는 거요?”

채하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설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가 품 안의 우주를 다정히 보며 아주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그래. 특별한 걸 보여주지.”

놀랍게도 채하가 보여준 것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앨범들이었으니.

모서리에 금색 장식이 된 두툼한 앨범들은 심지어 한 권만이 아니었다.

아기 시절에서부터 유아 시절, 초등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의 미소년에 이르기까지.

권채하의 일대기가 오롯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우와~ 사진이 엄청 엄청 많아요!”

“전부 대왕 아빠 사진이야.”

과연, 허영주가 자식에 대해 그토록 집착이 심했으니 무심한 차남의 앨범이 이토록 많은 것도 납득이 갔다.

그 덕분에 우주는 한껏 신이 나 고사리손으로 앨범을 정성스레 넘기는 중이었다.

반면 얼음처럼 차가운 권채하라는 남자에게도 이런 말랑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에, 설원은 넋이 나가 있었다.

물론 웃지 않는 건 어릴 때도 여전했지만, 그 나름의 귀여움이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속내를 들킬 것 같아, 설원은 애써 귀여움을 찬양하고 싶은 욕구를 삼켰다.

하지만 솔직한 아이인 우주의 입에서는 이미 설원의 속마음이 대신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대왕 아빠 엄청 귀여워요! 이 통통한 아가가 정말 대왕 아빠예요?”

“응. 대왕 아빠 맞아.”

“우와~ 이때는 눈도 엄청 똥그래요!”

“그렇지? 대왕 아빠도 아기일 땐 나름 깜찍했어.”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지그시 설원을 응시했다.

동조를 바라는 그 눈빛을 설원이 애써 외면하려던 찰나였다.

우주의 손끝이 한 사진 위에 멈췄다. 네다섯 살 정도 되었을 무렵의 채하였다.

곧 아주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이 우주가 힘차게 외쳤다.


“응? 대왕 아빠, 우주를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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