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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악연 (87/111)


87. 악연
2023.05.31.



 


“대체 이 일을 어쩔 거예요?”

돌아오기가 무섭게 진 관장이 남편을 향해 다다다 쏘아붙였다.

다 큰 자식들이라고 손 놓고 지내긴 했지만, 이런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얻은 건 아무것도 없고, 되레 궁지에 몰린 꼴이 되고 말다니.

명예와 위신을 중시하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신은 권 회장이랑 친구면서 돌아가는 분위기도 파악 못 했어요? 어쩐지, 새삼스럽게 초대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더라니! 아휴!”

백 회장 역시 차에서부터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권강호와 권채하. 나름 사돈이 될 수도 있었을 관계인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거듭 찬물을 들이켜던 진 관장은 일단 본연의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지금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치밀하게 판까지 짜놓고 우릴 유인한 걸 보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에요.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확실한 증거도 있을 테고요.”

“동감이야. 아무 증거도 없이 우릴 몰아세울 인물들이 아니지.”

“하…… 아무리 그래도 사라랑 재영이도 그렇지. 저지를 만한 일을 저질러야 옹호를 하죠. 이 사실이 새어나갔다간 주주들이 난리가 날 텐데! 백영도 백영이지만, 사라 코스메틱이며 재영이 엔터며 다 어쩔 거예요. 내 갤러리는 또 어쩌고요!”

진 관장의 친정도 백영에 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 위기는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탓에 그녀의 분노는 배가 되고 있었다.


“이미 엎어진 물인데 어쩌겠나.”

백 회장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지금껏 그는 제 딸 백사라를 아내인 진 관장보다 잘 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야망 하나만큼은 저 못지않은 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5년 전 권채하의 부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냥 우연한 사고라고만 여기지는 않았었다.

추궁할 이유도, 추궁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저 넘어갔을 뿐.

하나 드러나지 않아야 할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면, 그것은 결코 좌시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채운이 아닌가.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채운은 이제 백영에게 있어 한없이 걸쩍지근한 관계가 된 지 오래였다.

진 관장 역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는지, 다시금 언성이 드높아졌다.


“속 편한 소리 말아요. 엎질러진 물을 지금 우리가 핥아서라도 담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아까 채하 걔 눈빛 못 봤어요? 우리를 아주 씹어 먹을 기세였다고요!”

“……그 애송이 자식.”

공개적으로 사과하라던 채하의 말이 떠오르자, 백 회장은 이를 꽉 악물었다.


“제 형이랑은 다르게 그릇이 큰 줄 알았더니, 마누라 치마폭에 싸여서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어디 감히 건방지게…….”

자수는 제쳐두고서라도, 재계에 사실을 공표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게 명백했다.

그럴 수야 있겠는가. 백영은 타고나기를 굽힐 수 없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일단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따로 강호를 만나보겠네.”

“권 회장을요?”

“그래. 보아하니 권 회장도 오늘 이야기는 금시초문인 것 같더군. 적어도 권 회장은 채하 놈처럼 물불 안 가리고 날뛸 인물은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권 회장도 며느리를 꽤 끔찍이 여긴다고 들었어요. 손주까지 가진 몸으로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알았는데, 과연 적당히 넘어가 주겠어요?”

“물론 적당히는 안 넘어가 주겠지.”

침울한 어조로 백 회장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제 성정을 꺾어야 할 때가 오고야 만 듯했다.


“우선 그 리조트 부지를 위자료 격으로 처리해봐야지.”

“리조트 부지요? 아까 못 들었어요? 필요 없다잖아요. 게다가 명한에서 어떻게 돌려받을 건데요?”

“생각해둔 게 있어. 그리고 물론 채운에 내밀 게 그것만은 아니야.”

“무슨 방법이 더 있어요?”

“본질적으로 채하 그놈이 바라는 건 돈 같은 게 아니야. 제 마누라를 괴롭힌 것에 대한 복수심이지. 한마디로 화가 난 거야.”

그렇기에 더욱 골치 아픈 것이기도 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들이 이렇게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을 테니까.

살살 달래려면 어느 정도는 수그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했다.


“……우리 쪽에서도 포기할 건 포기해야겠지.”

 

*



“아빠!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명한 건설 장남과 네 약혼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백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통보에, 백사라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분개하기까지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명한 장남은 저랑 열 살은 차이 난다고요!”

“네 엄마랑 나도 여덟 살이나 차이 나지만 이날 이때까지 잘살고 있다.”

“하! 그 남자 얼굴 못 보셨어요? 피곤에 찌든 아저씨 같은 데다 시퍼런 수염 자국까지 있고, 벌써 머리까지 까지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리조트 부지 건으로 그를 만난 바 있는 백사라였기에 더욱이 분노가 치밀었다.

제가 원하는 남자는 누가 봐도 탐낼 채운의 황태자, 권채하였는데.

남도 아니고 아버지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남자를 들이대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야. 솔직히 털어놔 봐라. 정말로 사라 네가 꾸민 짓이냐?”

“…….”

“재영이하고 손잡고 그런 짓을 한 게 맞느냐 말이야.”

홧김에 마구 놀리던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백사라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딸을 보며 백 회장은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심을 확고히 굳혔다.

부지를 찾아오려면 명한과 사돈을 맺는 방법만큼 빠른 길이 없었다.

게다가 백사라가 권채하를 완전히 포기했음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했다.

더는 그의 옆자리를 욕심내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사과 비슷한 시늉이라도 받아 들여줄 터였다.

그리하여 백 회장은 제 딸의 오랜 희망을 제 손으로 결국 꺾어버렸다.


“이제 인정해라. 사라야. 넌 권채하와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야.”

“……악연이라고요?”

“그게 아니면 뭐냐? 여기서 더 가면 진짜로 벼랑 끝일 거다. 사업가는 모름지기 전진해야 할 때와 멈춰 설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해.”

“아빠. 저는……!”

지금은 백 회장으로서도 멈춰서야 할 때였다.


“다행히 명한 쪽에서도 혼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을 거다. 네가 저지른 일들은 이 아비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 테니 당분간은 몸 사리고 있도록 해라. 심심하면 신부수업이나 받고 있든지.”

“아빠!”

분기탱천한 백사라의 외침이 백영 가의 높은 천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제 아버지의 가슴에 가 닿지 못했다.

이 순간 그녀는 백 회장이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과제로 전락하고 있었다.


“가 봐라. 이 아빠는 머리가 아파서 좀 누워야겠다. 네 엄마 오늘 일찍 들어온댔으니 괜히 마주치지 않게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

백 회장이 슬리퍼를 끌며 방 안으로 사라지자, 백사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분노가 그녀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믿었던 아버지마저 제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니.


“뭐, 명한?”

픽 하고 백사라가 입술 사이로 비웃음을 한껏 뱉어냈다.

어디 그따위 혼처를 들이미는지. 그러려고 십 년간 권채하의 뒷모습만 쫓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래. 좋아.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이래도 저래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제가 갖지 못한 장난감은 남도 가질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도 감히 민설원 따위 잡초 같은 여자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행복을 누리게 할 수는 없었다.

아주 철저히, 짓밟고 망가뜨려 줄 작정이었다.

장난감의 형태조차 남지 않도록.


*



“그래, 시킨 건 알아봤어?”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오기 무섭게, 백재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어온 남자는 그가 백사라에게 붙여두었던 끄나풀이었다.


“예. 카지노 쪽에 있었던 건 확실한데, 돌연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본 사람이 없다는 것 같습니다.”

“……하. X! 일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네.”

백재영이 제 이마를 치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5년 전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남자.

질이 안 좋은 놈인 걸 모르지 않았지만, 당시의 그는 사람을 가려 사귀는 법이 없었다.

큰돈을 쥐여 보내긴 했으나 그 남자는 사건의 진실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확인차 연락을 시도하면 늘 노름 판돈을 요구해, 차츰 연락의 빈도도 줄어들던 참이었다.

변변찮은 쓰레기 같은 놈이니 별 탈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몇 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하나 권채하가 모든 내막을 알아낸 이상, 그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돈을 더 주든 어떻게든 구슬려서 입을 막은 뒤 아예 외국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다니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손안을 벗어나선 곤란한데, 이미 누군가 손을 쓴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설마…….”

문득 백재영의 뇌리에 백사라의 앙큼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함께 도모한 일인 이상, 남자는 교집합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증인. 즉, 언제고 어느 한쪽을 배신할 수도 있는 존재.


“왜 그러십니까? 부대표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예.”

백재영은 남자의 마른 얼굴을 빤히 응시하곤,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계속 알아봐! 사람을 더 풀어도 괜찮으니까 반드시 내가 먼저 찾아내야 해.”

“알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 나가자 백재영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발칙하기 짝이 없는 여동생을 주시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말은 도와달라는 둥 번드르르하게 했지만, 백사라가 언제고 제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앉아서 당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저도 백사라의 농간에 놀아난 희생자일 뿐이지, 일을 벌인 건 결국 그녀가 아니던가.

이 사실을 아예 역으로 이용하면, 어쩌면 그에겐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정 비서의 딸 건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의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철없는 시절의 실수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었고.

중요한 건 역시 민설원의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뿌리를 뽑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 무렵 백재영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더욱이 온갖 비행을 저질렀다.

백사라가 민설원의 일을 의뢰했을 때도 반쯤은 그냥 호기와 재미였다.

방파제 아래로 차를 밀어버리자는 의견에 그는 굳이 위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없애버리면 그만인 것을, 일을 되레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으니까.

반면 백사라는 어설픈 악행을 택했다.

순진하고 고귀한 공주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제 손을 그렇게까지 더럽히지 않아도 세상이 원하는 대로 돌아갈 거라 믿은 것이다.

결국 민설원은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여자를 끝장내지 않은 탓에, 그들은 지금 일생일대의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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