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나이스 타이밍 (86/111)


86. 나이스 타이밍
2023.05.28.



 


“……뭐?”

백사라의 중얼거림이 챙! 하고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묻혔다.

동시에 여태껏 일언반구도 없던 백재영의 입에서도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내가 네 마누라를 뭘 어쨌다고?”

“하도 더러운 짓을 밥 먹듯 해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 아니면 뻔뻔한 건가.”

채하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보다 더 날카롭게 백재영에게 가 꽂혔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백영과 채운, 양가 부모들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혼사를 의논하리라 예상하고 왔는데, 난데없는 취조 분위기에 특히나 백 회장 부부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였다.

이번에도 역시 백 회장이 끼어들 기미를 보이자, 채하가 빠르게 그 틈을 차단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천천히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그러니까 뭘…… 말인가? 우리 사라랑 재영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진 관장이 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불안을 느끼며 답을 재촉했다.

선포한 대로 채하는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내막을 밝히기 시작했다.

범행 당사자와 당사자의 부모를 함께 모신 완벽한 자리에서.


“제 아내가 5년 전, 방파제에 차와 함께 추락해 실종되었던 사실은 다들 아실 겁니다. 모두가 죽은 줄만 알았었죠. 저 역시 그랬고 말입니다.”

“그,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결국 무사히 살아 돌아왔잖아.”

본능적인 부모의 예감인지, 진 관장의 어조에서는 이미 자식을 변호하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하나 채하는 자비 없이 냉담하게 그들의 턱 끝에다 진실을 들이밀었다.


“애초에 죽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여기 백재영과 백사라가, 제 아내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쫓아버렸던 겁니다. 그것도 장모님의 목숨을 빌미로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둘이서 작당 모의를 하고 아내를 속였습니다. 당시 아이를 가진 아내를 제 옆에서 몰아내기 위해 장모님을 살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했죠. 물론 여기엔 저희 쪽 과실도 다소 있었습니다만.”

채하의 눈길이 슬쩍 허영주를 향하자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기에, 채하는 다시 백영 일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고가 난 척 위장했던 겁니다. 그 사기극에 모두가 속았고요. 협박은 물론이고, 납치와 감금까지 했더군요. 덕분에 임신한 몸으로 제 아내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참혹한 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의 전말을 듣게 된 권강호의 얼굴에 짙은 노기가 서렸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이런 사기극을 벌이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이냐? 사라, 재영이. 두 사람이 함께 말해봐라.”

권강호가 매서운 눈초리로 백 씨 남매를 추궁했다.

잠시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는가 싶더니, 백사라가 난데없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참. 회장님도~ 당연히 아니죠! 저 말을 믿으세요? 제가 뭐가 아쉬워서 민설원을 속여요? 그리고 백재영이랑 저는 겸상도 안 하는 사이인 거, 모르시는 분들도 있나요? 하물며 저희 둘이 무슨 일을 꾸몄겠어요?”

“동감이다. 백사라. 나도 너랑 엮이는 건 사절이야!”

백재영이 지지 않고 반박을 해 왔다.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권채하. 너 예전에 내가 니 마누라 몸매 좀 언급했다고 억하심정으로 날 끼워 넣은 거 같은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피식, 냉소적인 웃음이 채하의 입가에서 흘러나와 남매의 입을 틀어막았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그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둘을 베어버릴 듯한 분노가 가득했다.

그 표정을 지켜보는 백사라의 입이 저도 모르게 바싹 말라왔다.

그러다 돌연 화가 치밀어올랐다.

민설원, 그깟 여자가 뭐라고. 예나 지금이나 그 여자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인가.


“에잇! 헛소리 집어치워!”

뜻밖에도 먼저 역정을 낸 건 백사라가 아니라 백 회장 쪽이었다.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그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기껏 이런 자릴 만들어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따위 헛소리인가?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했네! 권채하 군!”

“전 진실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실? 자네 아내가 늘어놓는 허황된 말만 듣고, 그걸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겠지! 한심하구만. 한심해! 어디 감히 무례하게 어른들을 모셔 놓고…….”

“백 회장.”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권강호가 제 친구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허영주는 이미 구석에 쭈그러져 숨다시피 한 채였다.


“방해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듣자 하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나? 만일 진짜라면, 이건 범죄야.”

“…….”

범죄라는 단어에 백 회장의 말문이 턱 막혔다.

진 관장 또한 일순 등골이 서늘해졌다.

딸의 집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예상 못 했던 탓이었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그때였다. 모두가 얼어붙은 가운데 백사라의 앙칼진 음성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채였다.

긴 기다림 끝에 잘 익은 사과를 비로소 따러 왔는데, 독 사과를 문 꼴이었으니.


“사, 사라야. 진정해. 일단 앉아. 앉아서 오해를 풀어야…….”

“아뇨! 전 갈 거예요! 내가 왜 이딴 수모를 당해야 해요?”

“저도 이만 갑니다~ 꼴 보기 싫은 얼굴들이 많아서 밥 먹기도 고역인데, 우리 예~쁜 동생이랑 한데 엮이니 아주~ 불쾌하걸랑요!”

“얘! 재영이 너까지 가면 어떡해!”

“더 할 말 없습니다.”

휙 하고 백재영이 먼저 자리를 뜨자, 백사라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채하를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애정이 이 순간 제가 뿜은 화염에 휩싸여 증오로 변모하고 있었다.


“저도 할 말 없어요.”

음산하게 한마디를 내뱉곤 백사라도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황망한 상황이었지만, 채하만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그가 백 회장 부부를 바라보았다.


“아직 중요한 얘기가 잔뜩 있는데, 당사자들이 퇴장해버렸군요.”

“중요한 얘기……? 할 말이 또 남았단 말인가?”

모멸감에 이를 꽉 물고 있던 백 회장이 분노에 차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두 분께 대신 해야겠군요. 바로 말씀드리죠. 백재영은 정 비서의 따님, 정윤서 양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었습니다.”

“……!”

이번에는 그야말로 모두의 입이 충격으로 쩍 벌어졌다.

여세를 몰아 채하는 그 충격에 더욱 쐐기를 박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당장 지우라고 종용했죠. 돈을 주고, 각서를 쓰게 하고. 결국은 윤서 양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자, 잠깐. 잠깐만……!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정 비서 딸은…….”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겁니다. 백재영 때문에요.”

낱낱이 까발려지는 과거 행각에 진 관장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행실이 복잡하고 망나니처럼 구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는 없을 거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자식들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내내 차분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채하가 살벌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따님과 아드님은 통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것 같지만, 적어도 두 분은 다르시겠죠.”

“이보게, 채하 군. 우리 이러지 말고…… 그, 그래! 리조트 부지! 그 리조트 부지를 채운에게 주면 어떻겠나?”

“그건 이미 명한에 넘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설립 허가도 받지 않은 단계야. 내가 어떻게든 되찾아올 테니까…….”

피식, 냉소 어린 웃음이 채하의 비스듬한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백 회장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거래를 하러 나온 게 아닙니다.”

“……뭐라고?”

“선택지는 백 회장님이 아니라, 제가 드리는 겁니다.”

“…….”

“공개적으로 제 아내와 정 비서님 가족에게 사죄하십시오.”

“사죄…….”

채하의 말을 읊조리는 백 회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개적으로 사죄하라는 뜻은, 결국 자수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예.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엔, 저도 어떻게 나올지 장담해 드릴 수 없군요. 제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라서.”

“…….”

냉정한 태도가 되레 그들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어 채하가 여유롭게 냅킨에 손을 닦으며 예의 바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느 쪽이 백영에게 도움이 될지, 현명하게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식사들 하시죠.”

“…….”

당연하게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할 여유는, 백 회장과 진 관장에게는 없었다.

그들 인생에 있어 최악의 식사 자리나 마찬가지였으니.

*



“어? 대왕 아빠!”

“왔어요?”

대문으로 들어오는 채하를 발견한 우주가 한껏 방글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설원도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그를 맞이했다.

늘 그랬듯 번쩍 우주를 안아 든 채하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서 설원을 향해 다가왔다.


“뭐 하고 있었어, 둘이?”

“아. 이걸 보고 있었어요.”

설원의 손끝을 따라 채하가 시선을 내리니, 거기에는 지난번보다 키가 훌쩍 더 자란 살구 묘목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여름 내내 햇살과 비를 잔뜩 맞더니 쑥쑥 잘 자란 모양이었다.


“우주 대왕 나무가 이만큼이나 자랐어요~ 그리고 또~ 통통 가시도 더 통통해졌어요!”

즐겁게 조잘거리며 우주가 선인장 화분을 작은 손으로 가리켰다.

과연, 세 사람의 이름표가 붙은 선인장은 매끈하게 윤기가 흐르는 것이 자태가 퍽 훌륭했다.


“우리 꼬마, 기쁘겠네.”

“응! 잘 자라서 우주 엄청 엄청 신나요~.”

방글거리는 아이의 뺨에 촉, 하고 채하가 가볍게 입을 맞추곤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엔 설원에게로 바짝 몸을 붙이며 다가왔다.


“우리 여보는 어때? 묘목이 자란 걸 보니 뭐 느끼는 거 없어?”

“……느끼는 거요?”

어쩐지 묘한 질문에 설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맑고 커다란 눈동자 속에 비친 채하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그 욕망 어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설원이 살구 묘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글쎄요. 자랐다고 해도 아직은 작아서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겠죠. 그러고 보면 봄에 피는 살구꽃도 참 예쁜데……. 살구는 향도 좋고, 맛도 좋고…….”

“민설원.”

“……왜요.”

“또 그렇게 티 나게 귀엽게 굴면 곤란해. 당신이 그럴수록 내가 더 미친다는 거, 이젠 잘 알 텐데.”

“무, 무슨 소리예요! 우주도 있는데…….”

선인장을 요리조리 살피고 있는 우주의 눈치를 보며, 설원이 채하에게서 슬그머니 한 발짝 몸을 떼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둘 채하가 아니었다.

겨우 반 발짝으로 다시 둘 사이의 거리를 훅 좁힌 그가, 그녀를 뜨겁게 응시했다.

잠시 감상하듯 설원의 눈과 코, 입술 위에 채하의 시선이 머물렀다.

언제나 불꽃이 타닥타닥 튀는 기분이 들게 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어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내려 설원의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더욱 나이스 타이밍이지. 모든 게 잘 자라나고 있으니까.”

“……네?”

“어때? 이제 우주가 바라는 동생을 심어줄 때가 된 것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