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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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속임수
2023.05.24.
“그래,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정 비서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회의를 마치고 부사장실로 돌아온 채하가 이 뜻밖의 방문객에 화색을 했다.
“별거 아닙니다. 간만에 여기서 창밖을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창가에 서 있던 정 비서가 바깥을 가리키자, 그곳엔 주말과 마찬가지로 더없이 맑고 높은 가을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늙었어도 가을은 타나 봅니다. 이렇게 서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군요. 돌이켜보면 제법 오랫동안 부사장님을 보필했지요.”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허허. 새삼스럽게 감사 인사를 듣자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가 채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버지의 친우임에도 전혀 어른 노릇을 하려 들지 않고, 늘 제 마음을 헤아려준 사람이었다.
표현에 인색했던 건 이제 과거로 족했다.
“이번엔 특히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덕분에 아내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사모님을 붙잡은 건 결국 부사장님의 진심이지요. 아무렴요.”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잔잔하게 마주쳤다.
곧 정 비서가 주름진 손으로 무언가를 채하에게 건네주었다.
얇은 서류 봉투였다.
“……이게 뭡니까?”
“사실은 우리 일환이가 내내 설득했는데, 마음을 굳히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백영 때문에 부사장님께서 곤란을 겪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서 이 늙은이 맘도 편치 않더군요.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을 이제 부사장님도 잘 아실 테니 모쪼록 이해해 주십시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채하는 신중하게 그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들어 있었다.
“정 비서님. 이건…….”
“백재영이 우리 윤서한테 아이를 지우라고 하면서 건넨 돈과 그 내역입니다. 당시에 돈을 주고 각서를 받아 갔는데, 윤서가 기지를 발휘했더군요. 제 앞날을 위해 임신 사실을 함구하는 조건으로 백재영에게도 각서를 받아냈습니다.”
거액이 오간 내역과 어설프게 작성된 각서에 휘갈긴 사인.
그야말로 뜻밖의 키였다.
“백재영은 태생이 생각이 짧은 인간이지요. 설마 윤서가 세상을 떠날 줄 모르고 사인을 해줬겠지만, 결국 이렇게 제 손에 들어왔으니까요. 아마 제대로 백영을 압박할 증거가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럼 따님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죽은 딸의 명예를 위해, 아픔을 고스란히 감추고 살았던 정 비서였다.
그것을 잘 알기에 채하는 차마 이 열쇠를 받아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한데 되레 그를 달래듯 정 비서의 입가가 둥글어졌다.
“이번에 부사장님하고 작은 사모님, 그리고 우주를 보면서 참 흐뭇하더군요. 앞으로도 그런 행복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걸로 전 됐습니다. 우리 윤서도 괜찮다고 할 겁니다.”
“……정 비서님.”
“부디 내 딸의 억울함도 풀어주세요. 그게 유일하게 남은 제 바람입니다.”
억눌린 슬픔을 토해내며 정 비서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고개 드십시오. 숙여야 할 건 오히려 제 쪽이니까요.”
두 손으로 그를 부축해 세워주곤, 채하가 깊은 존경과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지금 할 수 있는 말도, 해야 하는 말도 단 한마디였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
“아빠!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허허. 우리 딸, 그렇게 좋으냐?”
“당연하죠! 진짜예요? 지금 하신 얘기?”
백사라가 냉큼 아버지 옆자리를 비집고 앉아 팔짱을 꼈다.
찻잔을 가져오던 그녀의 어머니, 진 관장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
“넌 속도 없니? 그깟 게 뭐 기쁜 일이라고 헤벌레해선.”
“엄마도 참. 아빠! 빨리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진짜로 채운 가가 저희랑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고요?”
“그래. 너뿐만 아니라 재영이까지 다 초대했다.”
백재영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흠칫했지만, 백사라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그 인간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떠봐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쪽은요?”
“채하 부인을 말하는 거라면 동석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당연한 일이지. 어디라고 그런 여자를 데리고 나와.”
“흐응~.”
어머니가 좋아하는 홍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백사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듣기로는 무슨 일인지 최근 권채하와 민설원의 사이가 무척이나 크게 벌어졌다고 했다.
하루가 머다시피 어린이집에 오가더니, 요즘 들어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우주라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걸 봤으니, 아마도 지금쯤 꼴도 보기 싫은 그 모자는 떠나고 없을 것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모양이었다.
언감생심 감히 권채하의 옆자리를 탐내더니, 결국 꼬리를 내린 건가.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었다.
제 가족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걸 보면 아주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런 이야기를.
“아빠! 얘기 잘해주셔야 해요? 엄마도 괜히 성질부리지 마시고요. 아셨죠?”
“그거야 그쪽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렸지. 안 그래요, 여보?”
“하하. 우리 진 관장 비위 맞추려면 채운이 바짝 엎드려야겠는걸.”
“농담 아니에요! 솔직히 채운 때문에 우리 사라 마음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이까짓 초대, 그냥 거절하고 싶다고요.”
진 관장이 딸을 흘겨보며 있는 대로 못마땅한 티를 냈다.
성깔이라면 백사라에 지지 않는 그녀는 대대로 갤러리를 물려받은 품격 있는 집안의 장녀였다.
채운의 안주인이 여배우 출신인 허영주라는 점도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그 아들의 재가 자리라니.
제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진즉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목표를 위해 20대를 다 보내다시피 한 딸의 바람을, 차마 저버릴 수는 없었다.
“사라 너 때문에 가는 거야. 가서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질릴 만큼 뻣뻣하게 굴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지. 만일 그 리조트 부지 때문이면…….”
“아이~ 엄마. 오붓하게 가족끼리 식사나 하자는 건데, 딱딱한 일 얘기는 접어둬요. 네에?”
“……알았다. 알았어.”
아양 섞인 딸의 태도에, 진 관장은 훈계를 그만두고 찻잔을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깊고 풍부한 향이 코를 타고 올라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계산이나 제대로 해 볼 작정이었다.
제 딸과의 혼사를 원한다면 채운은 꽤나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터였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욕심냈던 채운 가에서 소장 중인 그림들도 그중 하나였다.
어리고 철없는 딸은 사랑을 운운할지 몰라도, 결국 부모들 간에 이 결혼이란 커다란 거래일 뿐이니까.
이득을 보는 쪽은 반드시 이쪽이어야만 했다.
*
“권 회장, 이거 오랜만이구만. 허 여사님도 반갑습니다.”
“그간 격조했네. 진 관장님도 모처럼 뵙는군요. 갤러리 일이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바쁘긴요. 채운만 할까요. 얼마나 바쁘시면 저희 쪽 초대도 늘 거절하시고…….”
“엄마!”
백사라가 옆구리를 찌르자, 진 관장이 흘깃 쏘아보곤 자리로 향했다.
그런 모녀의 모습을 허영주가 쭈뼛쭈뼛 곁눈질하며 반대편 자리로 가 앉았다.
먼저 온 채하는 이미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재영도 일찍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두 남자는 대화는커녕 냉기만 풍기는 중이었다.
일행이 모두 착석하기가 무섭게, 성격 급한 백 회장은 곧바로 본론으로 돌입했다.
“그래. 웬일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들어나 보세.”
“천천히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제가 오늘 특별히 최고의 코스 요리로 준비했으니까요.”
채하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식사를 권유해오자 백사라는 내심 흐뭇해졌다.
평소에는 저만 봐도 날을 세우더니 이렇게 정성껏 자리를 마련한 게, 조짐이 좋았다.
다만…….
“왜 안 드세요? 사모님 캐비어 좋아하시잖아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허영주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비록 최근 들어 불화를 좀 겪긴 했어도, 그녀 또한 이런 자리를 오매불망 바랐을 터인데.
마치 못 올 곳에 끌려오기라도 한 듯 좌불안석이었다.
“어, 그, 그래. 먹어야지.”
허영주가 스푼으로 캐비어를 떠 올리는 것을, 백사라는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산해진미가 아니라 꼭 사약이라도 받는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백 회장이 기다리지 못하고 캐물어 준 덕분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권채하 군, 지금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물을 마시고 있던 채하가 백 회장의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답답한지 백 회장이 보다 노골적으로 되물어왔다.
“이혼하느냐, 이 말이야.”
“이혼……?”
너무도 낯선 단어처럼, 채하가 그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하지만 한없이 서늘하게 백 회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제가 아내와 이혼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뭐?”
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백 회장이 곧바로 권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권강호는 채하의 말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묵묵하게 에피타이저를 들고 있었다.
“자네가 아들한테 전해준 거 아니었나?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거 아니냐 말이야.”
“글쎄, 자네 딸을 망신 준 걸 사과하면 리조트 부지 건을 양보하겠다는 이야기라면, 나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네.”
“뭐야? 그럼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게 아니란 말인가? 우리 사라를 며느리 삼겠다고 부른 게 아니면 뭐란 거야?”
피식, 동시에 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하나는 백재영이 백사라를 비웃으며 흘린 것이었고, 하나는 백 회장을 향한 채하의 것이었다.
이윽고 채하가 아버지를 대신해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혼이라뇨. 저희는 지난 주말에 오붓하게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걸요.”
“…….”
“아, 간 김에 아내에게 제대로 청혼도 했고요. 조만간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릴 예정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라 너, 알고 있었어?”
진 관장이 분에 겨워 제 딸을 재촉했다.
백사라 또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민설원이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청혼을 했다고……?
혼란스러운 백사라의 머릿속을 정돈해주듯 채하의 낮은 음성이 다시 식탁 위로 내려앉았다.
“공교롭게도 따님은 잘못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아내와 이혼하는 줄로.”
“뭐라고?”
“그렇게 보이도록 속임수를 썼으니까요. 일부러 숨겨두었다고나 할까요.”
부들부들 손끝이 떨려와 백사라는 포크를 내려놓고 대신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기다란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전 이만 일어서야겠어요.”
“아니, 앉아.”
“…….”
테이블 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강제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채하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백사라가 머뭇거리자, 채하가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경고를 던졌다.
“말했잖아. 최고의 코스 요리를 준비했다고. 그런데 벌써 가면 안 되지. 지금부터 너와 백재영이 내 아내에게 한 짓을 들려줄 예정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