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반짝반짝한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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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반짝반짝한 단어들
2023.05.21.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수선화 구근이 순간 만개한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채하의 속삭임은, 힘이 컸다.
내 아내가 되어달라…….
불과 몇 달 전, 이런 비슷한 말을 그의 입으로 들었건만 느낌이 아예 달랐다.
그때는 계약과 거래였다면, 지금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프러포즈였으니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분명 바람도 불고 있고, 구름도 흘러가고 있는데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8년 전에 올리지 못했던 결혼식도 다시 올리자. 우주도 제대로 권우주로 살게 하고, 이제 셋이서 가족으로 살아가고 싶어.”
“채하 씨…….”
이 들판에서 청혼을 받았을 때, 어머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심장이 너무도 빠르게 뛰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들풀처럼 가슴을 간질이는 채하의 고백이 진솔하게 이어졌다.
“지금까지 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쟁터를 누비는 듯한 삶을 살았어. 평온함이나 안정 같은 건 느낀 적이 없었지. 하지만 아주 잠깐, 당신과 보낸 그 3년은 내 인생에서 드물게 좋은 시간이었어. 축복이었지.”
“…….”
“다시는 민설원, 당신을 잃지 않을 거야.”
눈을 지그시 마주한 채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설원이 손에 수선화 구근을 곱게 쥐곤, 반짝이는 반지가 보이는 손가락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나도 두 번 다시는 이 반지, 빼지 않을 거예요.”
“민설원…….”
“당신을 떠나는 일도 없을 거고요.”
“승낙하는 건가?”
구태여 답을 구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설원이 활짝 수채화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당신의 아내였어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민설원!”
기쁨에 목소리를 높이며, 채하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분명 설원도 기쁜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행복해서 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고마워. 여보. 나 권채하의 인생에는 나보다 민설원, 당신이 늘 우선일 거야. 당신하고 우주만 생각하면서 살 거야. 약속해.”
“나도 고마워요. 이 수선화 구근도요. 내가 지금껏 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워요.”
뺨에 닿는 바람이 서로의 말처럼 다정다감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입술이 이끌리듯 서로를 갈구했다.
들판 한가운데서 두 손을 꼭 붙든 채 설원과 채하는 다소 수줍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더없이 진솔한 맹세가 담긴, 애틋한 입맞춤을.
“으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리 높이에서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설원과 채하의 정신이 약속이나 한 듯 퍼뜩 들었다.
이 들판에는 두 어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순진무구한 아이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미처 잊고 있었다.
“……!”
당황한 설원이 얼른 채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우주가 서 있었다. 깜찍하게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다만 얼굴을 가린 손가락이 눈에서만 브이 자로 펼쳐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우주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엄마와 아빠의 뽀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우리 꼬마한테 애정 행각을 들켰네.”
“엄마랑 대왕 아빠 뽀뽀했어요?”
“그래. 우리 우주도 뽀뽀할까?”
“응! 우주도 엄마랑 대왕 아빠랑 뽀뽀하고 싶어요~.”
“이리 와.”
채하가 우주를 번쩍 안아 들고는 설원과의 사이에 높게 올렸다.
두 사람이 볼 한 쪽씩 사이좋게 뽀뽀를 나눌 수 있도록.
덕분에 들판에는 쪽쪽 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한참이나 경쾌하게 이어졌다.
*
민망한 장면을 뒤로하고, 설원과 채하는 아이의 작은 손에 이끌려 그네로 향했다.
엄청 엄청 재미있다고 조잘대며 우주가 잽싸게 그네에 뛰어올라 앉았다.
덩달아 설원도 채하에게 떠밀려 우주의 옆에 앉았다.
얼마나 정성껏 만들었는지, 나무 그네는 한눈에 보아도 무척이나 견고했다.
안정적으로 잘 깎은 나무 판에,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만들어진 부드러운 줄, 예쁘고 튼튼한 천장까지.
본체 역시 탄탄하게 땅에 잘 고정되어 있어서 손이 많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어?”
문득 의문 하나가 설원의 뇌리를 스쳤다.
땅에 고정된 그네를 보다 떠오른 것이었다.
“이 들판…… 주인이 있지 않아요? 옛날에 있다가 없어졌던 그네도 아마 노부부가 만들어두신 걸로 아는데.”
“내가 샀어.”
“네?”
“이 들판, 내가 샀다고.”
마치 과자나 장난감을 산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를 보며, 설원이 입을 벌렸다.
“설마…… 이 그네를 만들려고요?”
“당연하지. 말했잖아.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인데, 얼마를 내든 상관없어.”
“그렇다고 살 필요까지는…….”
“물론 그네만 타려고 산 건 아니야. 저길 봐.”
채하가 휘둥그레진 설원의 눈동자 너머로 뒤편을 가리켰다.
또르르 설원의 시선이 옮겨간 그곳에는, 동화처럼 예쁜 별장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앞으로 자주 올 거니까 쉬어갈 곳도 있어야겠지.”
“아…….”
“자, 그러지 말고 그네를 타 봐.”
“당신은 안 타요?”
그네를 타라면서 정작 설원과 우주의 등 뒤로 이동하는 채하를, 설원이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그러자 그가 다정한 아빠의 표본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난 안 타도 돼. 당신이랑 우주를 밀어줄게.”
“으응~ 우주는 대왕 아빠하고 같이 그네 타고 싶은데~.”
“…….”
곧바로 돌아온 귀여운 반대에 채하가 살짝 난색을 표했다.
사실 그네는 크기는 했지만, 어른 두 명과 아이 한 명을 앉힐 정도로 넓지는 않았던 것이다.
설원이 얼른 눈치껏 몸을 줄에 바짝 붙이며 공간을 만들려 했다.
한데 우주는 다른 제안을 꺼냈다.
“셋이 같이 타요~ 우주는 대왕 아빠 무릎에 앉으면 돼요!”
“그거, 정말 현답이로군.”
“으응~? 현……?”
“우리 꼬마가 엄청 엄청 똑똑하다는 뜻이야.”
칭찬을 받은 우주의 뺨에 발그레 홍조가 피어올랐다.
곧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무릎에 올린 채, 채하가 힘껏 발을 굴러 그네를 공중으로 띄웠다.
까르르 웃는 우주의 웃음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설원이 평생 간직했던 가장 아름다운 캔버스에,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덧칠되고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행복’이었다.
한참이나 그네를 탄 뒤, 세 사람은 손을 잡고 들판을 거닐었다.
시골의 가을은 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걷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한가하고 여유로운 오후의 평온함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잘조잘 잎새 어린이집 이야기를 하고 있던 우주가 대뜸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엄마의 엄마랑 아빠는 어디 있어요?”
“……어?”
“엄마 고향에 왔는데, 왜 인사하러 안 가요?”
“우주야. 그게…….”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자, 채하가 설원의 대답을 먼저 가로챘다.
“우리 꼬마,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응! 우주도 엄마의 엄마랑 아빠가 궁금해요~ 대왕 아빠도 대왕 할아버지가 있고, 재윤 아빠한테도 멋진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아이로서는 당연히 가질 법한 궁금증이었다.
다만 그 순수한 의문에 설원은 새삼 애달픈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두 분 모두 공교롭게도 우주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녀를 대신해 다정다감하게 눈높이를 맞추어, 채하가 우주에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음. 엄마의 엄마는 저기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셔.”
“그럼 엄마의 아빠는요? 불 속으로 사람을 구하러 갔어요?”
“지금은 잠시 쉬고 계시지. 너무 열심히 위험한 사람들을 구하느라 힘드셨거든.”
“으응~.”
우주가 손과 입술을 함께 꼬물거리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안쓰러운 그리움과 호기심을 담아 다시금 물어왔다.
“그러면…… 우주가 위험하면 구하러 와요?”
“당연히 구하러 오지.”
천만분의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에 바로 채하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뿐 아니라 그는 무척이나 진심 어린 답을 덧붙여 아이를 안심시켰다.
“우주가 위험하면 반드시 구하러 올 거야. 아빠니까.”
“응!”
든든하기 그지없는 그 답에, 우주의 얼굴에 다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빠니까.
그 안에 생략된 뜻을 다섯 살 아이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마음이 한없이 짠해짐과 동시에 설원은 깨달았다.
미뤄두었던 문제를 이제 더는 뒤로 할 수 없음을.
아이의 의문에는 본질적으로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주가 진짜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진짜 아빠’일 터였다.
아직도 누구인지 모르고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러보지 못한 아빠, 권채하.
설원이 시선을 돌려 채하를 응시하자, 그도 같은 마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은 눈빛을 굳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졌다.
여기서 돌아가면 함께 고민해볼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언제, 어떻게 우주에게 진실을 밝힐지를.
그날 밤, 별장으로 가기 전에 세 사람은 근처 천문대로 향했다.
뒤로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밤하늘이 맑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름이 우주임에도 정작 방 천장의 야광별밖에 보지 못한 우주를 위해, 채하가 특별히 장소를 엄선했다.
페가수스, 안드로메다……. 가을 별자리가 수놓은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자리를 보는 내내 채하는 우주의 옆에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제 이름의 기원이 된 진짜 우주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아이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거기다 운 좋게도 별똥별까지 만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날을 잘 잡은 모양이었다.
우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사리 같은 손을 꼭 모은 뒤 소원을 빌었다.
깜찍하게도 어떤 소원을 빌었냐는 두 사람의 질문에는 ‘비밀’이라 답하면서.
집에 천체망원경 하나를 들이기로 합의하는 것으로, 이 밤하늘 관측 코스는 막을 내렸다.
여행이 엄청 엄청 좋다고 즐거워하는 우주를 보며 설원은 따라 웃음을 지었다.
어찌 보면 처음으로 제대로 하는 가족 여행인 셈이었다.
최초의 가족 여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별장으로 가는 길,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즈음 채하가 문득 차를 세웠다.
왜 어두운 곳에서 차를 세웠는지 묻기도 전에 그가 문을 열고 설원과 우주를 밖으로 이끌었다.
내리자마자 그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뜻밖에도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소 투박한 징검다리가 놓인 하천 위로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딧불이였다.
캠핑을 갔을 때 봤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수의 반딧불이들이 날갯짓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조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와~ 반짝반짝 벌레다!”
보자마자 우주는 반딧불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반딧불이의 불빛을 따라 우주가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그 뒤를 지키듯 따라가는 채하를 보며, 설원은 그때의 약속을 떠올렸다.
우주에게 꼭 반짝반짝 벌레를 보여주겠다던 그의 약속을.
사랑도 믿음도, 약속 같은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 순간 설원은 알았다.
저와 우주의 세상을 채우는 것은 지금까지 없다고 믿었던, 바로 그 단어들이라고.
앞으로 세 사람의 세상을 함께 밝혀갈, 반짝반짝하는 단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