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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수선화의 뿌리처럼 (83/111)


83. 수선화의 뿌리처럼
2023.05.17.



 


“가을바람이 좋네.”

“그러게요. 이제 더위는 다 가신 것 같아요.”

산들바람이 설원의 스커트 자락을 가볍게 스쳤다.

동시에 채하의 큼직한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간질였다.

겨우 손을 잡았을 뿐인데, 심장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감각을 매 순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니, 정말이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설원은 제 옆에서 곧은 자세로 걷고 있는 자신의 남편을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어떤 찬사를 늘어놓아도 부족할 정도로 근사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으려 했어도 결국은 사랑해버린 사람, 권채하.

그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걷는 날이 올 줄이야.


“괜찮아? 걷는 거 힘들지는 않고?”

“아직 십 분도 안 걸었는데요.”

“구두 신어서 발 아플까 봐 그러지. 그러지 말고 내가 업어줄까?”

대답도 듣기 전에, 등부터 내미는 그를 보며 설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걸어오는 십여 분 동안에도 어찌나 금이야 옥이야 했는지, 멀찍이서 지나가는 차를 봐도 요란을 떨었고 날아가는 비둘기에도 충돌을 걱정할 판이었다.


“됐어요. 벌써 다 왔는 걸요. 채하 씨 하는 거 보면, 내가 우주보다 더 아기가 된 것 같네요.”

“아니야. 아직 서른 발짝은 더 걸어야 해. 이리 와서 업혀.”

그가 아예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자, 설원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함께 우주를 데리러 잎새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니만큼 채하가 걱정할 만한 위험한 요소는 당연히 없었고.


“어휴. 정말~ 됐다니까요. 엇, 저기 우주! 우주 나와요. 빨리 일어나요.”

등을 토닥이듯 가볍게 치며 설원이 채하를 재촉했다.

정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샛노란 콩알 같은 귀염둥이들 사이에서 우주의 얼굴을 찾던 설원의 손이, 문득 허공에 멈췄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쁜 할머니~!”

“아이고, 우리 아가!”

“…….”

그랬다. 믿을 수 없게도 우주가 허영주의 품에 안겨서 활짝 웃고 있었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주를 쓰다듬고 있는 허영주의 모습에, 설원은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아무리 채하의 진심을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허영주가 제게 한 짓이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채하의 어머니이고, 우주의 친할머니기는 하나 핏줄만으로 모든 게 용납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예쁜 할머니, 우주 보러 온 거예요?”

“그럼 그럼! 자, 이거 받아. 우리 아가 먹으라고 할머니가 비싼 과자 사 왔어!”

“으응~ 우주 친구들하고 나눠 먹어도 돼요?”

“치, 친구들?”

“네! 우주 친구들도 과자 엄청 엄청 좋아해요~.”

사람을 녹이는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퍽 기뻐 보였다.


“아…… 그, 그래! 많이 사 왔으니까 나눠 먹어도 되고말고! 할머니가 우리 아가 과자 먹고 싶은 만큼 다 사 줄게!”

“와~ 예쁜 할머니 최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우주는 허영주를 제법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우주를 보는 허영주의 표정은 저를 볼 때와는 180도 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라는 표현이 바로 저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하도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물론 놀란 설원과 달리 그의 눈빛엔 분노가 더 서려 있었다.

곧 그가 나직하게 잠긴 음성으로 감정을 실어 내뱉었다.


“내가 쫓아낼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요.”

“왜?”

만류하는 설원을 채하가 의아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설원도 잘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저를 위해 나서려는 그를 막아선 건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주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적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정을 보류하고 싶었다.


“……그냥 잠깐 기다려요.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붙들어 우주 쪽에서 보이지 않는 담벼락 쪽으로 설원을 이끌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등을 기대서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상황도, 그와 손을 잡고 있으니 완전히 달랐다.

때마침 떠오른 것이 있어, 설원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유서, 아직 안 봤어요.”

“유서?”

“네. 정 비서님께서 서랍 아래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꺼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채하 씨하고 같이 보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설원을 마주 보는 채하의 눈빛이 짙어졌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유서는 우리 나중에 보도록 할까. 모든 일이 해결된 후에, 그때.”

그가 말하는 ‘모든 일’이 무엇인지 설원도 모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과 제 사건을 둘러싼 음모, 지금도 풀리지 않은 많은 의문들…….

유서를 열어보는 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나중이 적기일 듯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를 펼쳐보고 싶었기에.


“그래요. 그렇게 해요.”

“좋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설원이 묻자 채하가 여전히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다정히 응시했다.

눈빛만으로도 가슴을 토닥이는 듯, 한없이 말랑한 표정이었다.

하나 표정과는 달리 묵직하기 그지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굳이 용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당신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노력했으니까.”

“아…….”

“아. 이제 가시는군.”

채하가 담벼락 건너편을 향해 시선을 돌린 덕분에, 설원은 눈물이 핑 돌뻔한 것을 감출 수 있었다.

과연 허영주는 혹여 두 사람이 올 것을 우려했는지, 과자만 냅다 안겨주고 줄행랑을 쳤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두 사람은 잎새 어린이집을 향해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사랑스러운 우주를 향해.

*

그 주 토요일, 갑작스레 채하가 갈 곳이 있다면서 설원과 우주를 차에 태웠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짐도 곱게 싸인 채였다.


“대왕 아빠! 우리 여행 가요?”

“그래. 여행 가는 거야. 가족여행.”

“와~ 신난다! 우주, 여행 엄청 엄청 좋아해요.”

태어나서 가본 데라고는 섬과 이곳뿐인데, 순수한 아이의 말에 채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반면 설원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도 어딜 간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채하는 간단명료하게 상황 설명을 끝내주었다.


“원래 여행이란 즉흥적인 여행이 제맛이지.”

“아아…….”

“대왕 아빠! 우리 여행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건 비밀이야.”

“비밀~?”

동심을 저격하는 두 글자에 우주가 예상대로 커다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런 우주를 한 팔로 훌쩍 들어 올리며 채하도 함께 눈을 빛냈다.


“그래. 비밀로 하면 더 신나는 법이지.”

“우주, 비밀도 엄청 엄청 좋아해요!”

아이컨택을 하며 방글방글 웃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말 그대로 ‘엄청 엄청’ 즐거워 보여 설원은 도대체 어딜 가는 건지 물으려다 도로 집어넣었다.

그의 말대로 모르고 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기에.


“자, 도착했군.”

“여긴…….”

두어 시간 끝에 차가 멈췄을 때, 설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착한 곳은 그녀가 아주 잘 아는 장소였다.

높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수평선처럼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

그리고 그 들판을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 안고 있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바로 설원의 고향이었으니까.

가을 들풀과 들꽃들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춤을 추는 풍경을, 설원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세월에도 별반 변하지 않은 시골 풍경은 책장 속 동화책처럼 정겨웠다.

들판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곧 들판 한가운데서 멈췄다.

우주 역시 그것을 발견하고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엄마! 저기 대왕 그네가 있어요!”

“…….”

우주의 말대로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사이로, 커다란 그네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결을 싣고서 흔들리는 그네는 설원에게 있어 소중한 추억의 조각이었다.

순간 설원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절과 다시 마주친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아빠가 만들어주었던 그네.

거기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까르르 웃던 유년 시절이,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 추억을 비집고, 채하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어때? 두 사람 다 마음에 들어?”

“응! 엄청 멋져요~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는 엄마의 고향이야. 우주야.”

“고향?”

“그래. 우주의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사셨던 곳이지. 엄마가 태어난 곳이고.”

“우와~ 엄마가 어릴 때 살던 곳이에요?”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우주가 들판을 좌우로 살폈다.

저 멀리 꼭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는 집들 중 어딘가에, 그녀의 집도 있었을 터였다.

아련한 기억을 헤매며 설원이 중얼거렸다.


“응. 엄마가 우주만 할 때 여기서 살았단다.”

농도 짙은 그리움이 밀려왔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아마 옆에 있는 이 두 사람 때문일 거라고 설원은 생각했다.

이렇게 또 소중한 가족과 함께 있으니까.


“우주 그네 타보면 안 돼요?”

커다랗고 튼튼해 보이는 그네가 한눈에 마음에 들었는지, 우주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당연히 타도 된다는, 채하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우주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우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원이 채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을 햇볕보다도 따사로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왜 여기에 데리고 왔는지, 그게 궁금한 거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채하가 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등 뒤로 숨긴 손에 설원이 눈길을 주려는 찰나, 그가 손을 꺼내 그녀 쪽으로 뻗었다.

이내 펼친 손바닥 안에는 꼭 감자같이 생긴 알들이 여럿 들어 있었다.

설원으로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이건…….”

“로맨틱하지 못하다고 해도 할 수 없어.”

알감자 같은 동그란 것의 정체는, 수선화 구근이었다.


“당신이 그랬지. 장인어른께서 이 들판 한가운데서 꽃을 들고 장모님께 청혼했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는 민설원 당신이 이야기한 건,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잊지 않아.”

“……채하 씨.”

“당신이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풍경 속으로 데려오고 싶었어.”

아직 피어나지도 않은 꽃이 이토록 낭만적일 수 있다니, 설원의 가슴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행복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서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덤덤하게 채하가 말을 이었다.


“수선화.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지. 비록 지금 꽃피우진 못하고 이런 모습이긴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닮은 것 같아서 좋다고 생각했어. 이걸 함께 심고, 처음부터 다시 꽃을 피우는 거야.”

이윽고 그가 설원의 손을 끌어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그 위에 보석이라도 되듯 수선화 구근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곱게 흙을 털어낸 것이, 나름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곧 그가 심장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설원에게 속삭였다.


“민설원. 우리도 제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정식으로, 내 아내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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