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귀여운 여인
(8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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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귀여운 여인
2023.05.14.
가을을 반기는 청아한 새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왔다.
기진맥진한 설원이 눈을 떴을 땐, 채하가 이미 눈을 뜨고서 그녀를 열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아…….”
그의 시선이 무방비하게 설원의 뽀얀 살결 위로 와 닿았다.
민망함에 애써 이불을 끌어 올리며 설원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채하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붙박인 채였다.
“간밤에 힘들었을 텐데 빨리 일어났네.”
“……!”
은밀한 속뜻이 담긴 그의 말에, 설원의 뺨이 속수무책으로 붉어졌다.
“우, 우주가 돌아올 거잖아요. 시간 맞춰서 등원 준비해야죠.”
잽싸게 몸을 일으킨 설원이 어깨와 등 뒤로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다.
한데 무언가 평소와 다른 위화감이 들었다.
“저런, 애정 행각이 너무 격했나. 당신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졌어. 아무래도 엉킨 것 같은데.”
“…….”
부정하기에는 명확한 인과관계 지적이었다.
격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듯한 어젯밤의 일이, 문득 설원의 뇌리를 스쳤다.
놀랍게도 그녀 쪽에서 되레 그를 더 갈구한 것 같았다.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몇 번이고 달뜬 숨을 내쉰 것도 제 입술이었고, 옛날보다 더욱 탄탄해진 그의 몸에 잔뜩 매달린 것도 제 손이었다.
밤새 놓아주지 않는 그에게 입맞춤을 꽃잎처럼 흩뿌린 것 또한.
“무슨 상상을 하길래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는 거야?”
“아, 아무것도 상상 안 했어요!”
“흐음.”
나른한 한숨을 쉬며 채하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에 바짝 붙이며,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열기를 전달했다.
그 틈 없는 밀착에 온몸의 세포가 또다시 일깨워지려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가 두 손을 설원을 향해 뻗어왔다.
“이…… 이러지 말아요.”
“뭘 말이지?”
곧 그의 두 손이 설원의 엉킨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고 들어왔다.
이어 마치 빗이라도 된 듯, 천천히 그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설원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채하가 입술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다정히 바라보았다.
“역시 맞네. 이상한 상상 한 거.”
“그게 아니라…….”
“우리 아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아쉽지만, 아침에 정 비서님께서 우주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잖아. 올 시간이 다 됐어.”
“욕구라뇨? 난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아쉬운 건 채하 씨겠죠.”
“맞아. 아쉬워. 이젠 한시도 놔줄 생각 없으니까, 당신도 각오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어째 걸려든 기분에 설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상하게도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설원은 그와 마주 서서 넥타이를 매 주었다.
손수 머리를 묶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면 보답이었지만,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비단 누워 있을 때만 긴장을 유발하는 게 아니었다.
막상 제 손끝에 그의 시선이 머무는 게 느껴지자, 심장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꼭 첫사랑에 빠진 열다섯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슬그머니 설원은 그 시선의 진원지를 따라 눈동자를 올려보았다.
거기엔 저를 더할 나위 사랑스럽다는 듯 보고 있는 권채하가 있었다.
순간 간지럽던 심장이 미친 듯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이런 충동은 처음이었다.
그의 촉촉한 입술이 마치 돋보기로 확대한 듯 설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설원의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해 버렸다.
“…….”
대답 대신 설원은 홀린 듯 발꿈치를 들었다.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고, 가슴의 고동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 판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이보다 더 과감한 도전은 없을 것이었다.
병아리처럼 입술을 모은 채 설원은 목표물을 향해 다가서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뜻한 만큼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제법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닿아야 할 것이 닿지 않고 있었다.
곧 뜨거운 숨 대신, 잔잔한 웃음이 그녀를 향해 내려앉았다.
“이런, 이런.”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 설원이 반쯤 눈을 떠 보았다.
그러자 시야 가득 채하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들어왔다.
다만, 그것은 수줍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키스보다, 이러다 목이 졸리는 게 더 빠르겠어.”
“헉! 미, 미안해요!”
소스라치게 놀란 설원이 재빨리 넥타이를 붙든 손을 놓았다.
긴장한 나머지 너무 힘을 준 바람에, 그는 입맞춤을 기다리다 졸지에 목이 졸리던 중이었다.
황급히 몸을 떼어내려는 찰나, 채하가 설원을 제 안에 다시 가두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얽혔다.
“하려던 건 마저 해 줘야지.”
“아…… 그게…….”
“민설원. 당신은 앞으로도 그렇게 귀엽게 유혹만 해. 행동은 내가 할 테니까.”
“……네? 읍…….”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채하가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먼저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쳐온 것이었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졌다.
간밤에 셀 수도 없는 입맞춤을 나누었는데도, 또다시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젖은 입술을 몇 번이고 반복해 촉촉하게 머금으며 두 사람은 숨결을 교환했다.
우주를 데리고 온 정 비서가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엄마~! 대왕 아빠~!”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두 사람의 소중한 아이가 돌아왔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오는 우주를 향해 채하가 두 팔을 가득 벌렸다.
곧 품 안에 쏘옥 안긴 우주를 그가 번쩍 들고는 설원에게 보란 듯 흔들었다.
그야말로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장면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사장님. 작은 사모님.”
“정 비서님.”
우주의 뒤로 정 비서가 걸어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좋은 풍경이라는 게 꼭 자연경관만 이르는 건 아니군요. 이 늙은이가 이런 모습을 보니 울컥해집니다.”
“……정 비서님.”
“떠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작은 사모님.”
“으응~? 우리 떠나는 거 아니에요?”
정 비서의 말을 들은 우주의 얼굴이 아침 햇살만큼이나 밝아졌다.
설원이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로 화답했다.
“응. 우리 아무 데도 안 가. 이제 엄마랑 우주랑 여기에서 사는 거야.”
“정말요? 대왕 아빠랑 같이 살아요?”
“그렇단다. 꼬마.”
채하가 우주의 뺨에 제 뺨을 비비며 답하자, 우주는 안긴 채로 만세를 불렀다.
“자, 그럼 우주도 계속 잎새 어린이집 토끼반에 다녀야겠지? 어때?”
“응! 우주, 토끼반 엄청 엄청 좋아요!”
허공에다 작은 두 발을 구르며 우주가 넘치는 기쁨을 표현했다.
실은 아이가 얼마나 이곳에서 살고 싶어 했는지 잘 알기에, 설원은 가슴이 찡해졌다.
이제 미안해할 일보다는 행복해할 일만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채하도 같아 보였다.
우주의 복숭앗빛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영락없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세 사람의 온기 가득한 모습을 잠시 지켜보곤 정 비서가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출근 준비들 하셔야지요.”
“감사합니다. 정 비서님. 조만간 정 실장님하고 집에 초대할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주, 또 보자.”
“네! 할아버지! 우주 또 누나들이랑 놀러 갈게요~.”
다행히 우주는 채하와 설원의 사이에 거대한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줄도 모르고, 세쌍둥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했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벅차도록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과물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이윽고 채하가 성큼 걸어와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척이나 든든한 손이 저와 우주를 받치고 있었다.
어떤 폭풍이 몰아치든 변함없는 사실, 세 사람은 가족이었다.
*
“무슨 용한 수 없어?”
“차라리 용한 무당을 찾는 게 빠르시겠네요.”
아침부터 끌려온 윤 실장이 잠이 덜 깼음을 어필하기 위해 눈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나 늘 그랬듯 허영주는 윤 실장의 상태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허영주가 대리석 테이블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가리켰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될 것 같아?”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저는 전당포도 아니고, 감정사도 아니라서요.”
“아, 정말! 윤 실장. 자꾸 이럴 거야?”
결국 허영주가 노여움을 팡팡 터뜨렸다.
그녀의 분노어린 탄식이 테이블을 가득 채운 보석들 위로 내려앉았다.
할 수 없이 윤 실장이 그것들을 살피는 척했다.
권강호에게 시집올 때 받은 예물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사들인 값비싼 귀금속들이 저마다 몸값을 뽐내며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원래라면 금고나 보석함 속에나 있어야 할 이 물건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작은 사모님을 보석으로 매수하겠다는 겁니까?”
“매수라니, 말 곱게 못 해? 화해를 하겠다는 거지, 화해를!”
버럭 성질을 내는 허영주를 향해 윤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모님. 화해라는 건 일단 용서를 구하시고, 용서를 받은 뒤에나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런 보석을 대뜸 건넨다고 저절로 화해가 되는 게 아니라고요.”
“뭐? 용서를 구해? 내가?”
펄쩍 뛰는 허영주를 보니 윤 실장은 바른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없는 그녀를 일깨워줄 의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정말로 작은 사모님과 화해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어, 그러니까…….”
“진짜로 작은 사모님께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냐고요. 사실은 백사라 양한테 다 속았을 뿐이고, 그냥 우주를 보고 싶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닙니까?”
허영주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입도 따라 벌어졌다.
“용한 무당이 여기 있었네. 윤 실장, 나 모르는 새 신내림이라도 받았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럼 그렇지, 하며 윤 실장은 일부러 큰 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사모님을 모신 세월이 얼만데, 제가 그 시커먼…… 아니, 그 은밀한 속내도 모를 것 같습니까?”
“흥! 말이야 바른말이지. 난 진짜로 백사라, 고 계집애한테 속은 거라니까?”
“정말 잘못하신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나도…… 없지는 않지만, 그게 뭐! 시어머니가 그 정도는 다 하는 거지! 윤 실장, 뭐야? 지금 나 추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허영주가 기어이 역정을 냈다.
짜증스럽다는 듯 두 손으로 보석들을 쓸어 담으며, 그녀가 중얼중얼 푸념하기 시작했다.
“됐어! 윤 실장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차피 우리 아가 마음만 사로잡으면 돼! 그럼 저절로 화해도 하고 그렇게 되겠지!”
“글쎄요.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아도 해야지! 내가 반드시 우리 아가를 지켜내고 말 거야!”
“지킨다고요? 누구한테 말입니까?”
“몰라서 물어! 당연히 백사라 그 백여시 같은 계집애한테서지!”
“아아…… 네네. 아무렴요. 지키셔야지요.”
못 말릴 열정에 윤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석만큼이나 눈을 번뜩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감시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만 같았다.
허영주도, 백사라도, 아이에게 유해 요소인 건 매한가지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