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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수절Ⅱ (81/111)


81. 수절Ⅱ
2023.05.10.



 
속절없는 세월만이 그를 놓아두고 흘러갔다.

매해 덧없이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을 헤아리는 것으로, 채하는 또 한 해가 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곤 했다.

남들은 시간이 약이라는데.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무뎌진다는데.

괜찮기는커녕 그의 가슴은 도리어 썩어 문드러져만 갔다.

누군가의 부재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은, 남은 삶의 페이지를 전부 흑백으로 칠해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아무런 색채도 없는 세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그것이 민설원이 사라진 권채하의 세상이었다.

설원의 테두리는 진득한 그리움이 되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좀처럼 옅어지는 법 없이.

어느덧 그것은 채하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숨, 그의 눈, 그의 가슴. 모든 것에 설원이 머물렀다.

정작 테두리만 남은 채 안은 텅 비어 버렸는데도 그토록 존재감이 선연할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나고 벌써 몇 번의 계절이 흘렀지만, 채하는 아내의 흔적을 쫓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설원이 살아 있다는 희망만이, 산소호흡기처럼 그에게 미약한 숨을 불어넣고 있었기에.

여전히 그는 주말이면 그 바다에 갔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노력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했다.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설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 돔 안에 말려둔 은방울꽃도 세월에 바스러져 우수수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더는 찾지 말라는 듯이, 더는 기다리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계절이 벌써 몇 바퀴를 돌았다.

설원이 사라진 지도 꼭 4년째, 또다시 결혼기념일이 돌아왔다.

살아 있다면, 그녀는 이제 서른 살이 되었을 터였다.

스물아홉이었던 채하도 어느덧 서른세 살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나 그저 부질없이 숫자만 바뀌었을 뿐, 스물아홉 살의 그도, 서른세 살의 그도 똑같은 장소를 맴돌고만 있었다.

어김없이 이번 결혼기념일에도 그가 있을 곳은 한 군데였다. 설원의 정원.

차가운 문손잡이의 감촉을 그녀의 손 대신 잡으며 채하는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변함없는 풍경.

어둠에 잠겨가는 별채 안의 풍경이 꼭 그의 마음 같았다.

잔뜩 취하려고 병째로 술을 들고 왔지만, 막상 이곳에 들어오니 마실 기분도 나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그가 나무 책상 위에 놓인 설원의 사진을 손끝으로 쓸었다.

닳도록 어루만져 먼지 한 톨 없는 사진이었다.

단 한 장뿐인 그녀의 사진이기도 했다.


“민설원.”

늘 그랬듯 대답 없는 사람을 향해 채하는 부질없는 혼잣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언제 돌아올 거지? 서른 살의 당신은 어떨지, 궁금한데 말이야.”

여전히 그렇게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빛인지.

여전히 간지럼을 많이 타는지, 여전히 그 가녀린 손가락에서 꽃향기가 나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넘치도록 많았다.


“기억나? 그 겨울밤……. 형의 기일에 당신이 나를 위로해줬었는데. 그땐 취해서 내가 당신을 안았다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를 안아준 건 민설원, 당신이더군.”

사진 속 설원의 눈빛이 꼭 그걸 이제 알았냐고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그 밤을 보낸 뒤, 제 감정을 더 솔직하게 마주했어야 했건만.


“알아. 미안하다는 말, 백번 천번을 해도 모자라겠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와 줘.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정말 잘할 테니까…….”

애달픈 언어는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한계였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것도, 그녀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참는 것도.

툭, 하고 손가락이 나무 탁자로 힘없이 떨궈졌다.

동시에 툭, 하고 애써 유지해온 이성의 마지막 끈마저 끊어져 버렸다.

와장창!

술병을 거칠게 내동댕이친 뒤, 채하는 별채 바깥으로 튀어나오다시피 발을 옮겼다.

그길로 운전대를 잡은 그는 곧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강원도 양양, 설원을 집어삼킨 그 방파제.

제정신이었는지, 혹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채하에게는 더 이상 설원의 환영을 볼 자신이 없었다.

매번 손끝에서 물거품처럼 부서지기만 하는 그 환상을, 더는 견뎌낼 요량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차라리 그녀의 곁으로 가기로.

그러나 허탈하게도, 그 결심조차 저지당하고 말았다.


“부사장님! 안 됩니다! 부사장님!”

방파제 끝, 삶의 벼랑 끝에 몰린 그를 건져낸 건 정 비서였다.

지나치게 충성스럽고 지나치게 저를 주시한 나머지, 그의 오랜 수족은 기어이 바다로 뛰어들려는 그를 막아서는 데 성공했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지, 정 비서는 강한 손아귀 힘으로 채하를 땅 위에 묶어놓고는 절대 한 발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도록 버티고 서 있었다.

나직한 탄식을 내뱉으며 채하가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부사장님 차를 따라왔습니다. 진정하세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 비서님. 저더러…… 대체 어떻게 이 이상 견디라는 겁니까? 네? 말씀해보세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 허리를 단단히 붙든 정 비서를 차마 떨쳐내지 못한 채, 채하는 어둠 속에 대고 울부짖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가 만나러 가는 수밖엔 없지 않습니까. 이거 놔주세요. 정 비서님. 제발 놓아주십시오.”

당연한 일이지만, 정 비서는 그를 놓아주는 대신 혼신의 힘을 다해 붙들었다.

설원의 곁으로 가는 것까지도 허락되지 않다니.

아무래도 신은 제게 내린 후회라는 몹쓸 형벌을 거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짐승처럼 부르짖었을까.

겨우 그의 울먹임이 잦아들 무렵에서야 정 비서는 대답을 해주었다.

세월에 마모된 목소리로, 세월에 조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을.


“……잘 압니다. 깊은 후회는 때론 망각을 허락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는 이 바다가 제 딸아이와 작은 사모님에 이어 부사장님까지 삼켜버리길 원치 않습니다. 돌아갑시다. 돌아가요. 부탁입니다. 권채하 군.”

질끈, 감은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망각을 허락한다 해도 저는 그녀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야 하냐는 물음도, 결국은 삼켜버렸다.

그 답은 신조차도 모를 터이니.

*



“그 일이 있고 나서 정 비서가 별채 문을 잠그고 열쇠를 가져갔어. 나도 저항하지 않았지.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살 수 없으리란 걸 느꼈으니까.”

“…….”

덤덤한 눈빛으로 채하가 별채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그립기도 하다는 듯, 복잡한 눈빛을 하고서.


“하지만 나는 늘 여기에 있었어.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지.”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짙은 눈동자를 빛냈다.

수없이 지새운 깜깜한 밤이, 그 눈동자 안에 켜켜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그의 손가락이 설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빗어 내렸다.


“야속하게도 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머리카락 한 올도 남아 있지 않더군. 민설원. 당신은 정말로 철저하게 내게서 떠날 준비를 했던 거야.”

“채하 씨…….”

“그거 알아? 집 안에 맴도는 당신의 숨이라도 그러쥘 수 있다면, 전부 모아서 가둬놓았을 거야.”

“…….”

“말했지?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미친놈이라고. 나는…… 지난 5년간 민설원이라는 여자에게 미쳐 있었어. 그저 사라진 아내의 그림자만 붙들고 살았어.”

기껏 가다듬은 마음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설원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자 천천히 채하가 손가락을 옮겨선 그 눈물을 닦아냈다.

다정함을 넘어 애틋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눈물이 닿은 손가락이 뜨거운 것인지, 손가락이 닿은 눈물이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설원이 아는 건 오로지 채하의 진심이었다.


“……난 몰랐어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어요.”

“그랬겠지. 단 한 번도, 당신한테 내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으니까.”

눈꼬리에 머문 손가락 끝에서 안타까움이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내가 오만했어. 내 세상에 당신을 들인 적 없다고, 스스로 거짓말을 했어. 권채하라는 인간의 세상에 사랑이란 단어가 존재하질 않아서 민설원, 당신을 향한 마음이 사랑인 줄 몰랐어.”

“…….”

농도 짙은 진심에 설원은 호흡마저 버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계속해서 회한이 가득 담긴 고백을 이어갔다.


“그저 인정하기 싫었던 거야. 여자도, 사랑도 믿지 않는 내가 당신한테 한눈에 반했다는 걸.”

“채하 씨…….”

“이미 처음부터 내 세상은 민설원, 당신이 전부 차지해버렸는데.”

제 눈가에 머문 그의 손을, 설원이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젖은 뺨을 연신 비비며 그녀 또한 진심을 토해냈다.


“채하 씨가 나를 기다리면서 그 오랜 시간을 힘들게 견뎠다니…….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어요. 나만 당신을 그리워하고, 나만 당신을 사랑한 줄 알았어요.”

“미안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서. 내가 나쁜 놈이었어.”

“아뇨. 나쁘지 않아요. 당신은 하나도…… 나쁘지 않아요.”

그녀의 눈가에서 기어이 눈물이 쏟아졌다.

심장을 도려낸 듯한 고통을, 두 사람이 함께 겪고 있었다니.

애타는 서로의 진심을 몰랐기에, 사랑인 줄 몰랐기에 이렇게 돌고 돌아야만 했다니.


“민설원.”

이윽고 채하가 설원을 품 안 가득히 안았다.

설원 역시 두 팔을 그의 등에 한가득 두른 채, 맞닿은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정말로 다행이야. 믿지도 않는 신에게 수도 없이 감사했어.”

“……채하 씨 곁에 돌아오는 날을 수없이 꿈꿨어요. 몇 번이고 상상했어요. 당신과 우주의 손을 잡고…… 함께 밥을 먹고, 웃고, 걸을 수 있는 순간을…….”

“앞으로는 영원히 그럴 수 있을 거야.”

강한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채하가 그녀에게 약속했다.

이어 천천히 채하의 손이 설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젖은 눈망울이 이 세상 유일한 존재인 서로를 뜨겁게 응시했다.

마주한 눈빛 사이에, 이제 허물지 못할 갈등 따윈 없었다.

채하가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실은 당신한테 하고 싶었던 마지막 부탁은 다른 거였어.”

“……?”

“나를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라, 사랑해달라는 거.”

“아…….”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고, 옆에서 나를 사랑해달라는 거.”

이런 말을 솔직히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눈물로 보내야 했던 걸까.

이제는 일 분 일 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설원은 손을 뻗어 채하의 차가운 뺨을 어루만졌다.

빠르게 홍조가 번지는 그 뺨을 향해, 설원은 뒤꿈치를 들고 답을 전했다.

저 역시 가슴 깊이 눌러둔 채 살아왔던 고백이었다.


“사랑해요. 채하 씨. 사랑해요.”

그의 대답은 말 대신 입술로 돌아왔다.

달빛이 어른거리는 정원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긴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길고 길었던 마음의 공백을 전부 메우려는 듯이.

마침내 그의 오랜 수절은 보답을 받게 되었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설원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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