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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수절Ⅰ (80/111)


80. 수절Ⅰ
2023.05.07.


사랑.

생전 처음 느낀 그 감정의 동요를 부정한 대가를, 채하는 혹독히도 치러야 했다.

계약 결혼 3년째의 봄. 마침내 그날이 왔다.

5월 24일. 설원과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자 두 사람의 계약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꽃이라도 주문하라며 저를 채근하는 정 비서는 아마 알지 못할 터였다.

사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얼마나 속이 시끄러운지를.

부정하고 회피하고 달아났던 감정이, 빨리 답을 내놓으라며 그를 조급하게 했다.

그리고 비로소 끝을 앞둔 순간, 채하는 깨닫게 되었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니, 처음부터 사랑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날 아침, 유독 살갑게 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작별이었다.

채하가 설원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결심한 날, 그녀는 이미 떠날 결심을 마친 뒤였다.

이어 강원도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방파제 아래로 차가 추락했다는 소식과 함께, 설원은 권채하의 세상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전하지 못한 진심만 그의 가슴에 남겨두고.


 
사람에게도 테두리가 있다는 것을, 채하는 생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늘 보던 풍경 속에서 익숙한 존재 하나가 사라지자 그 테두리만이 무섭도록 선연했다.

민설원의 테두리.

그녀는 사라지고 없는데, 그녀가 있던 모든 곳마다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퇴근해 돌아와 비어 있는 방을 볼 때면 괴로움이라는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을, 깊고 깊은 허무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불을 켜도, 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민설원의 테두리는, 그녀의 부재를 잔인하게도 속삭여댔다.

침대에 누우면 텅 빈 옆자리에는 늘 자그마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뒤척일 때마다 몰래 팔베개를 해줘도 깰 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말간 얼굴.

잠결에 터뜨리던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예쁜 웃음.

가끔 손발이 닿을 때마다 흠칫 놀라 떨어질 때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견디다 못해 채하는 도피처를 찾았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물건들과, 깊숙이도 숨겨져 있던 산모 수첩 등.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들을 모두 모아 그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었다.

정원의 가장 안쪽, 설원이 꽃을 가꾸는 모습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었을 직한 자리에 채하는 간소하게 별채를 지었다.

침대에서 혼자 뒤척이는 게 버거운 날엔 거기에서 며칠이고 머물곤 했다.

두어 평짜리 작은 공간에 숨어서 그는 원 없이 울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미친 듯 가슴을 쥐어뜯었다.

바다에서 건져낸 가방에서 나온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흐릿하게나마 인쇄해 가운데 놓아두고 닳도록 어루만지며 말을 걸었다.

어디에 있느냐고. 제발 살아 있어 달라고.

‘실종’이라는 통보에도 미련은 쉽게 접어지지 않았다.

그 접어지지 않는 미련을 채하는 말린 은방울꽃과 함께 유리 돔 안에 담아두었다.

은밀하게 간직해두었던, 그녀가 제게 던졌던 은방울꽃 부케.

마치 그 꽃잎이 설원의 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태가 부서지지 않도록 지키고 또 지켰다.

이 은방울꽃이 남아 있는 이상 언젠가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찾기 위한 노력은 더욱 필사적으로 기울였다.


“사람은 쓸 수 있는 만큼 모조리 푸세요. 양양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역 해안, 아니. 동해안 전체를 수색해주십시오. 잠수 요원 역시 비용은 상관하지 마시고요.”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채하는 남는 시간 전부를 설원을 찾는 데 썼다.

잠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그녀의 생사를 알아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주말에는 양양에 직접 가서 흙 한 줌, 모래알 한 알까지 제 손으로 뒤졌다.

하나 애초에 설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그였다.

멋쩍다는 이유로,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도 설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탓이었다.

게다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딸이 떠난 다음 날 그녀의 어머니도 떠나버렸다.

그녀의 죽음에 설원과 이어진 마지막 줄까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저라도 임종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현실은 그저 냉혹하기만 했다.

멍하니 파도만 바라보다 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정 비서뿐이었다.

채운의 황태자, 권채하는 겉으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에 일밖에 없는 냉혈한. 그것이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어제 아내가 사고 났는데 멀쩡하게 오늘 출근하다니, 무섭다. 무서워.’

 
겉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완전히 무너져내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수단임을 남들이 알 리가 없었다.

세간에서 숙덕대는 소리 따윈 채하의 가슴에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를 상처입히는 것은 오로지 설원을 향한 후회였다.

살면서 후회라곤 해본 적 없던 그가, 내쉬는 숨보다 더 잦은 후회에 잠겨 살았다.

그 후회는 채하의 가슴 속을 깊이 좀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고 간 결혼반지의 베젤을 휘어 트려 목걸이로 만들어 걸었다.

그녀의 체온이 스민 물건이 제 몸에 함께 있다는 것은 유일한 위안이자 벌이었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그토록 애씀에도 미칠 것 같을 때마다, 그는 그 반지를 가슴에 낙인처럼 눌러 찍었다.

민설원은 아직 살아 있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무정하고 무심했던 저를 벌하고 또 벌했다.

가슴팍에 생긴 상흔이 나을 새도 없이 덧나고 덧났지만,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의 통증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괜찮은 거냐. 안색이 통 좋지 않구나.”

전무 승진을 앞두고 계속되는 철야에, 보다 못한 권강호가 채하의 집을 방문했다.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는 모양새인지라 우려가 된 모양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회사 일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회사 말고 너. 채하 너 말이다.”

“…….”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우길 수 없을 것 같아, 채하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여도 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그 자신조차 몰랐던 설원에 대한 마음을, 먼저 알아챘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깊이 숨겨두었던 한숨을 나직이 뱉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잘해주라고 하셨었죠.”

“그랬지. 나도 사별하고 후회가 많았기에 했던 소리였다.”

“그녀에게 하나도 잘해준 게 없어서, 이렇게 벌을 받나 봅니다.”

“채하야. 설원이는…….”

“아뇨. 지금은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어리석어 보인다는 거 압니다. 바보처럼 후회하고 있는 꼴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전 정말 못 견딜 것 같습니다.”

다행히 권강호는 허영주와는 달리 아들의 행복을 중시하는 아버지였다.

그가 묵직한 음성으로 아들의 처연한 부탁에 화답했다.


“기다리마. 너도, 설원이도.”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설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가 죽었다고 말했고, 이제 채하조차도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흔적도 없이 그녀를 삼켜 버린 바다는 애타는 외침에도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야속한 파도 소리만이 그의 귀를,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말이 좋아 실종이지, 바다에 빠져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매일 밤 악몽이 엄습했다.

고함을 치며 깨어나 보면 침대 시트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여전히 옆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그렇게 셀 수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봄.

채하가 홀로 별채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아무리 크고 좋은 집도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설원이 없는데, 번드르르한 집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에게는 그녀를 기억하고, 마음껏 부르며 그리워할 수 있는 이 작은 별채가 유일한 위로였다.

이 공간 속에서만 그는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다.

점점 그 안에 잠식되어가는 그를 보며 정 비서는 우려를 표했다.

하나 바깥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채하에게, 달리 건넬 충고가 없었다.

채운의 최연소 전무가 된 뒤로는 더더욱.

점점 높이 올라갔으나, 아내를 잃은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이 빗소리와 함께 세차게 별채의 천장을 때렸다.

간이 건물인지라 소리가 여과 없이 내부를 뚫고 들어와 퍽 시끄러웠다.

그날 저녁도 채하는 별채 안에 있었다.

설원이 떠난 후 한 번도 이곳의 조명을 끈 적 없었다.

심상치 않은 천둥 번개에 전구가 깜박거리는 것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을 밝혀두면 떠난 사람이 돌아온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에, 전구를 줄줄이도 달아두었다.

정원 역시 그러했다.

돌봐주는 사람의 손길을 잃은 정원은 이전의 모습을 많이 상실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수선화만큼은 어설프게나마 심어두었다.

설원이 돌아왔을 때, 황폐해진 정원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쏴아아. 야속한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며 수선화 줄기를 꺾으려 들었다.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는 느릿느릿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 이대로 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몇 송이 되지 않는 그 여린 꽃들에, 우산이라도 씌워줄 요량이었다.

정원 가드닝 창고에 우산이 들어있었던 기억이 났다.

결심한 채하는 삐거덕 소리가 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문이 열리자, 비가 쏟아지는 정원 한가운데에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민설원.”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설원이, 세심한 손길로 수선화를 매만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수수한 옷차림에 꽃을 볼 때마다 으레 짓곤 했던 은은한 미소까지.

틀림없었다. 그의 아내, 민설원이었다.


“민설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채하는 단박에 정원을 향해 뛰쳐나갔다.

한데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그곳에 서자마자 설원의 모습이 사라졌다.


“민설원……? 민설원!”

분명 조금 전까지 여기 쪼그리고 앉아 수선화를 보며 웃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채하는 미친 사람처럼 정원을 찾아 헤맸다.

뒤쪽 뜰과 옥상으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설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입고 있는 셔츠가 세찬 비에 흠뻑 젖고, 구두는 젖은 흙으로 질척거렸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시야마저 흐리게 번져갔다.

설원을 부르는 처절한 목소리가 천둥을 뚫고 정원에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머리 위에서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비가 그친 게 아니라 우산이 씌워진 것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전무님. 이러다 몸 상하시겠습니다.”

“정 비서님…… 방금 제 아내가…….”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채하는 제가 정원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채, 비를 맞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사람인 정 비서의 등장이, 그에게 또한 잔인한 진실을 깨우치게 했다.

방금 그가 본 것은 그저 환영이라는 것을.


“으…… 으윽…….”

결국 속절없는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더불어 억눌린 후회가 짐승의 포효처럼 새어 나왔다.

제 어깨를 토닥이는 투박한 손을 붙들고, 채하는 하염없이 울고 울부짖었다.

민설원이라는 존재는, 이제 더는 그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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