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모든 순간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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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모든 순간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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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모든 순간이 전부
2023.05.03.
‘……몇 시지?’
불현듯 눈을 뜬 채하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손목시계를 찾았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 시곗바늘이 새벽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깊이 잠들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다.
눈을 떠 버린 이유는 명확했다.
서재 문 너머로 신음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깨어버린 불쾌함을 뒤로하고 채하는 그 희미한 소리를 붙잡기 위해 촉각을 기울였다.
잘 들어보니 신음에는 버거운 호흡이 섞여 있었다.
덕분에 민설원, 그녀가 끙끙대며 앓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탁.
손목시계를 테이블에 내려놓곤, 채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30분쯤 지났을까. 채하는 노려보듯 빤히 천장을 응시했다.
아무리 잠을 청해봐도 도통 잠들 수가 없었다.
제 청각이 이 정도로 민감했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을 사이에 두고 새어 나오는 끙끙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가끔 터져 나오는 거친 호흡은, 그녀가 심하게 앓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마 당장 체온계를 들이밀면 족히 39도는 나오지 않을까, 싶은 숨이었다.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 채하는 이불을 걷고 바닥에 발을 딛었다.
문까지 고작 다섯 걸음이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일어선 이상 적어도 확인은 해봐야 했다.
삐거덕.
그가 가벼운 손길로 문을 조심스레 살짝 열었다.
침대 위로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창과 바깥의 가로등 덕분에, 설원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눈을 꼭 감은 채 두 손으로 이불 끝을 꼭 붙잡고,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말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물 흐르듯 떨어지고 있었고, 흐린 조명 아래서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음이 드러났다.
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 보는 그녀의 아픈 모습이었다.
순간 채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려다, 손을 멈칫했다.
‘안 돼.’
그랬다.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안에 들어가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짜 남편이라도 된 양 땀을 닦아내고 물수건을 얹어주면, 설원은 되레 기겁할 것이었다.
상비약들은 이미 그 방 안에도 충분히 있었다.
새삼 걱정하는 척하며 간호 비슷한 것이라도 하려 들었다간, 그녀가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무지 이 문턱을 넘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연히 두 사람은 계약 관계였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부부가 아니라.
이치. 규칙. 거래 조건.
오직 이성적인 범주 안에 있는 것들만이 둘 사이에 존재할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린 채하는 천천히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날 정작 채하는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아침이 다 되어갈 무렵, 겨우 설원의 신음이 멎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그는 내내 침대에 걸터앉아 동트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즈음 되니 차라리 제가 아픈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길거리에서는 겨울의 냄새가 풍겼다.
늦은 밤 무렵부터 눈송이가 날리는가 싶더니, 제법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채하는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취한 밤이던가.
일, 일, 또 일. 채운이라는 묵직한 왕관에 짓눌려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기대라는 명목으로 원치 않게 주어진 많은 것들이 숨통을 꽉 틀어막았다.
원래 이렇게 그 혼자서만 짊어질 짐이 아니었는데.
“하. 형은 왜 그렇게 빨리 가선.”
하얀 입김과 함께 담아본 적 없는 원망이 새어 나왔다.
오늘은 형, 태하의 기일이었다.
착하기 그지없던 형은 제가 겨우 몇 마디 내뱉는 말에도 늘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간 꾹꾹 눌러 참아온 모든 감정이, 한계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허한 줄은 미처 몰랐다.
해서 그는 어울리지 않게 혼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춥네.”
찬바람을 맞으면 조금은 깰까 싶어, 대리를 부른 차를 멀찍이 세워두고 걷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편안함보단 늘 위압감을 먼저 느끼게 하는 채운의 본가 저택.
높다란 담벼락과 대문을 바라보는 대신, 채하는 조금 더 고개를 높이 올려보았다.
오늘은 조금 더 따뜻한 풍경을 보고 싶었다.
3층에 자리한 자신의 방 창문이 아래에서도 선명히 시야에 잡혔다.
새벽이 꽤 깊었는데도 방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마 아직도 그녀가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일까. 그 따뜻한 조명이 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홀린 사람처럼 문을 열고서 층층이 계단을 지나 채하는 제 방 앞으로 걸어갔다.
본디 침실로 쓰던 서재 쪽 문을 뒤로하고, 그는 그 조명이 켜진 방의 문을 열었다.
역시나 그녀는 깨어 있는 채였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마주 보더니, 설원이 놀라며 책을 덮었다.
“……채하 씨? 왜 여기에…….”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이끌리듯 들어 왔다고, 여기에 있고 싶었다고.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나열하는 대신 채하는 그냥 침대로 몸을 던졌다.
똑같은 침대인데도 그녀가 있던 침대는 더 푹신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내 설원이 다급하게 어깨를 흔들며 방으로 돌아가라 권유했지만, 그는 그녀가 베고 있던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냥 이렇게라도 누군가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오늘은, 오늘만.
그때였다.
머리카락에 가볍게 닿는 자그마한 손길이 느껴졌다.
움찔, 채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이 가득 담긴 사랑스러운 눈길이 거기에 있었다.
껍데기가 아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저 진심만이 어린 눈동자였다.
아무래도 정말로 많이 취한 모양이었다.
민설원이 이렇게 다정한 우려를 담아 저를 바라보고 있다니.
몽롱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가 다시금 그 예쁜 입술을 열었다.
“얼른 가서 자요. 권채하 씨. 내가 일으켜 줄…….”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채하는 몸을 훅 기울이곤 그녀의 입술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가녀리면서도 포근한 어깨를 붙들고,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쉴 새 없이. 쉴 새 없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취기 어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구어진 심장은 그저 그녀의 입술만을 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혼란 속에서, 어떤 또렷한 사실 하나가 머리에 입력되었다.
설원이 입술을 열고 제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살포시 떨리는 자그마한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순간 인내의 끈이 모두 끊어졌다.
얄팍한 문을 사이에 두고 있던 거리감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채하는 민설원이라는 사랑스러운 존재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동시에 그녀가 머리맡의 조명을 꺼버렸다.
남은 것은 창밖에서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소리와, 두 사람의 옷자락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곧 둘의 온기가 뒤엉켰다.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또 달콤한 밤이었다.
*
그녀를 안은 뒤로 채하의 온도가 변했다.
바깥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변화는 너무도 명확했다.
남들이 으레 말하던 대로 권채하라는 인간은 타고나길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한데 설원을 안고 나니 제 가슴이 불을 피운 것처럼 온통 뜨거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그 겨울밤, 설원의 손이 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을 때 느낀 감정의 정체도.
다정한 위로를 갈구하는 마음.
보다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에 가까웠다.
그 겨울밤의 일은 채하가 그간 눈을 돌린 채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진심과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계약’이라는 둘 사이의 고리만큼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높아진 마음의 온도는, 머리와는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춥다는 핑계를 대고 서재 방을 정리하고 설원과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게 그 시작이었다.
한시도 편하게 잠들지 못했던 자신이, 그녀의 곁에선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입춘이 되자마자 분가를 했다.
설원과 오롯이 둘만 있고 싶었고, 그녀를 빤히 보이는 허영주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당연히 그녀에게는 다른 핑계를 둘러댔고, 그녀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분가한 뒤 채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설원에게 새 정원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허영주가 멋대로 망쳐놓아 정원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내 모른 체했던 자신이었다.
두 사람만의 공간이 생긴 후로 그녀보다 늦게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잠들지 않은 채 옆에 누워 있는 설원을 살피는 날이 많아졌다.
한 침대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은근히 그녀가 뒤척이며 불편한 자세를 자주 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설원이 베개를 밀쳐내고 머리를 어색한 각도로 놓고 있기에, 무심코 팔베개를 해준 것뿐이었다.
한데 목덜미 아래로 손을 뻗자 설원은 잠결에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럼을 탄 듯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작 그 웃음은 권채하, 자신의 심장을 간질였으므로.
누군가 웃는 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만지고 싶고, 갖고 싶은 욕망이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치밀어오르는 것 또한.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오롯이 인정하기 어려웠다.
오래 부정해 온 것을 선뜻 받아들인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기 마련이므로.
“이게 뭡니까?”
“유서예요.”
“……유서요?”
계약이 끝날 날이 다가와서인지 싱숭생숭해져 병원을 찾아간 채하에게, 설원의 어머니가 대뜸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제법 도톰한 무지 봉투였다.
유서라는 말을 꺼내는 것에 비해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덤덤해 보였다.
“나중에 설원이랑 둘이서 같이 봤으면 좋겠어서요.”
“이걸 왜 저에게…….”
“설원이한테 주면 괜히 슬퍼할 것 같아서. 우리 딸, 그래 보여도 마음이 약하고 여리거든요.”
“…….”
“나 대신 많이 아껴줘요. 우리 설원이, 많이 좋아하죠?”
갑작스러운 직구에 채하가 눈만 끔벅거리자 그녀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권채하 군이 처음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부터 내 딸이랑 인연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어떻게…….”
저도 모르는 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간단히 그 추리를 설명했다.
“그야, 한 번 본 여자 집을 굳이 찾아오는 남자한테 사심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처음 결혼식장에서 설원을 만났던 날.
손등 위로 은방울꽃이 떨어진 순간,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 순간.
그 작고 고결한 흰 꽃은 제 손이 아니라 가슴에 떨어진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몰랐고,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 따윈 더욱이 몰랐다.
그래서 그땐 알 수 없었고, 알면서도 부정했다.
그녀를 만난 뒤로 그의 모든 순간이, 전부 사랑이었다는 것을.